-기도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교제와 예배이며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기도가 응답받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알고 있는 죄이다.
즉 죄를 알면서도 행동을 하지 않고 죄를 남겨두는 것이다. 둘째는 이기심이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뒷전이고 자신을 위한 기도를 먼저 한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는 것이다. 셋째는 가정불화다. 하나님께선 함께 연합하지도 않고 배우자와 다른 지체들을 귀히 여지 않는다면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으신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때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는 항상 병행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한복음 15장 7절
->나의 문제는 이기적인 기도에 있는 것 같다. 사실 삶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잦아서 내 문제를 먼저 기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한다는 것은 실로 힘든 일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주의 뜻대로 기도하심을 믿기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2장>
-모세도 응답받지 못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이루시도록 구하는 것일 뿐 주님과 변론하는 것이 아니다.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범죄 했다.
첫째, 반석에게 명령하라 하였는데 지팡이로 반석을 쳤다. 둘째, 물을 내 준 것을 자기들의 공로로 돌렸다. 모세의 권위와 지도력 때문에 죄의 결과는 더 컸다. 하나님은 공정하고 의로우셔서 그의 죄를 눈감아 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오는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백성들에게 계시해 주시기 위하여 두 경우에 걸쳐 반석으로부터 물이 나오게 하셨다. 이것은 십자가에 반복 없이 단번에 찢기실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였기에 반석을 두 번이나 칠 필요가 없었다. 반석을 치는 것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 반석에게 말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그분의 사역을 의미한다.
성경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힘 때문에 실패한다.
-> 모세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높은 영적 권위를 가진 자라도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주님은 친하다고 해서 봐주는 분이 아니심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섰다고 생각할 때 넘어질 수 있음을 조심하라는 말씀처럼 무엇인가 이루었을 때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필요를 느낀다. 정상의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힘들다는 말처럼. 문득. 이솝우화가 생각난다.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던 사슴이 그 뿔로 인해 사자의 밥이 된 것처럼. 다윗의 아들이 숱 많은 머리칼로 인해 죽음을 당한 것처럼.
<3장>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가 응답 안된 이유는 첫째, 그들의 죄에 대한 그릇된 견해 때문이다.
죄를 인정한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 하였을 때 “여호와께 범죄 하였노라” 했지만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동기와 마음을 시험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불신앙, 불순종, 원망이었다.
둘째, 회개에 대한 그릇된 견해다.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은 용서하시지만 죄의 결과는 받아들여야 한다.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셋째, 기도에 대한 그릇된 견해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릇된 견해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발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하실 때 곧 행하라. 뒤로 미루지 마라. 만일 불순종으로 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완고함이 그 결과를 초래할 때까지 내버려 두신다.
-> 가장 마음에 부담이 되었던 장이다. 죄를 범하고 회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무(無)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한 징계는 하신다는 점이다. 심은 대로 거두고 뿌린 대로 거두고... 회개를 통해 죄를 반복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죄를 짓는 순간 내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하나님의 채찍이 기다릴 테니까 말이다.
<5장>
-누가복음 8장 (26절-39절)에 기록된 예수님이 가라사인의 땅을 가셨을 때의 일이다.
이때 세 종류의 기도가 있었다.
첫째는 주님께 귀신들이 자신들을 무저갱으로 보내지 말고 돼지떼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했던 기도다.
둘째,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하여 그 지방에서 떠나기를 간청했던 기도다.
셋째, 귀신에서 놓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던 기도다.
주님은 첫째, 귀신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귀신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먼저 알아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귀신들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지옥의 실재에 대해 알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둘째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방인)에 의해 마을에 소문이 났고 마을 사람들은 귀신 들렸던 사람들이 온전하여진 것에 주님께 고마워하기보다는 주님이 떠나기를 간구하였다. 예수님은 불신자의 무리인 이들의 간청에 응답하신 것은 자신을 강제로 영접하게 하지 않는 분이시란 것이다.
반면 세 번째, 귀신이 나간 사람의 기도는 거절하셨다. 그에게는 가정에서 마무리해야 할 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의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님이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계획을 갖고 계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귀신같이 안다는 말을 세상에서 많이 한다. 뭔가를 정확히 알아챌 때 관습적인 말하기다.
군대 귀신들이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아보고 두려워하며 스스로 지옥에 있음을 증거 하는 말씀을 보니 인간은 역시 사단보다는 아래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어야 귀신들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끊겼고 흥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동안 귀신에 들려 마을의 공포의 대상이었던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강퍅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온전케 된 사람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이유를 보니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주님의 제자가 될 필요는 없고 자기 자리에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내고 가정을 복음화하는 일도 주님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
<6장>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된 후에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고자 주어진 기회를 사용하였고 주님은 이를 칭찬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자신 앞에 놓인 기회를 잘 활용하라는 메시지를 주신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적절치 않은 장소, 즉 부자는 음부에서 기도하였다. 그리고 부적당한 대상에게 기도하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니다. 기도에 응답해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기도할 수 있는 장소는 이 땅이며 기도할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현재 살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이 순간이 감사하다. 짧은 인생길, 자신의 쾌락이 영원하리라 믿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니까.
<7장>
-이기심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채우기보다 나의 것을 먼저 채우는 것이다. 용서와 사랑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기적이고 탐욕(필요한 것 외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스러우면 주변 사람들을 주님께 인도할 수 없다. 손해를 입었을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만을 표하기보다는 차라리 불공평하게 손해를 보는 편이 낫다.
문명은 불필요한 많은 것들을 증가시킨다. 우리는 자신이 소유한 물질이 곧 우리의 생명이라고 생각될 위험에 놓여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매스 미디어를 자주 접하는 이 세상은 정말 많은 것들을 갖고 싶게 만들고 상대적 박탈감을 심화시킨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처럼 탐욕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신 분깃대로 살기를 원한다. 너무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의 마음은 공허하고 건강까지 잃기 쉽다.
<8장-9장>
-기도는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이며 하나님과 우리에게 있어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그래서 고통에서 벗어나길 구하기보다는 이 고통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이루시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영적축복이 육적축복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 고통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을 발견하는 것이 쉬운 것 같지는 않다. 육체적으로 힘들 때는 손을 들어 올리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 기도하기는 더 힘들다.
정신적인 고통도 마찬가지다. 온갖 스트레스가 정신을 지배한다. 그런 상태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기도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기도가 어떤 절차나 규칙에 따른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라는 점에는 공감한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면 기도 응답도 그만큼 빨라지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