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문학관이다.
신사 정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맞은 편에 이즈하라 주민들의 가정집들이 모여있었는데 그 골목 어딘가에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즈하라는 대마도 인구 대부분이 모여사는 중심지다. 이 곳 중앙도로를 중심으로 신사. 가정집들. 쇼핑점. 시청 등등이 줄지어 있다. 우리는 점을 찍 듯이 차례로 방문할 예정이었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열지어 선 집들이 담도 대문도 없다. 집 현관문을 열면 바로 골목인 집들....문득 어릴 적 살았던 동네들이 이와 비슷한 골목집들이 많았다는 기억이 난다. 일본식 집만 아닐 뿐 현관문만 열면 바로 골목인 집들이 줄지어 있던 ....그 골목에서 피어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음식냄새. 다투는 소리...등등.
가이드 말로는 관광객들이 집을 기웃대는 바람에 집집마다 커튼을 쳐서 내부가 안보이게 했단다. 창문마다 커튼을 안친 집이 없긴하다.
골목을 가다 왼쪽 골목으로 발길을 트는데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골목길이 펼쳐진다.
매끈한 갈색과 회색의 돌담이 골목양편에 직선으로 도열해 있다. 돌담 안 집의 얼핏 보이는 지붕들도 크고 화려한데 집 내부는 엄두도 못 낼만큼 담이 높다.
솟을 대문이 있는 집. 그 골목의 첫집이 바로 나카라토스이가 살았던 생가이자 문학관이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과 함께 거실문이 보인다. 한번에 봐도 귀족의 집이다.
에도 후기 19세기 전반에 춘향전을 일본으로 최초 번역한 사람이 바로 나카라토스이라 한다.
그가 번역한 소설이 일본 본토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일본어 번역판은 원문과 조금 달랐다.
조선의 한글본은 일본식 한문으로 또는 구어체로 번역되었고 조선 특유의 정서와 풍류는 줄고 일본식 유교 도덕이 강조되었다. 즉 신분제비판이나 민중의 저항의식은 약화되고 정절과 충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중국의 삼국지 연의가 조선으로 와 번역될 때 서민들의 애환을 그린 판소리로 재창조되었던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문학은 외국에서 유입되더라도 자기나라에 맞게 재편되어 현실을 반영하며 그 시대의 이념을 굳건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
일본 대마도는 조선 통신사들이 자주 오가던 곳이라 춘향전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문화교류의 결과인 듯하다.
특히 문학관 주변은 사무라이들이 거주했던 집들이라 높은 담이 쳐진 것이라 한다. 그럼 그렇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이전 담은 이보다 더 높았다고 하니 귀족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담들은 크고 작은 돌들의 조금의 틈새도 허락하지 않은 장인의 손길로 한담한담 쌓아졌으리라.
그 돌담 속 많은 집들 중 하나인 작가의 생가는 묵은 갈색과 노란빛을 띈 목재가 윤이난다. 멋스럽다.
그의 가정은 의사집안으로 대대로 대마도 태수를 섬겼다.
작가가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서도 산 적이 있었다고 하니 그가 춘향전을 번역한 한 건 우연이 아닌 듯 싶다.
우린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 다시 골목길을 나섰다. 작은 주차장을 중심으로 세 개의 골목이 흩어져 있다.
주차장에 주차한 차들도 어찌나 작고 앙증맞는지..담위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핀 꽃들. 꼭꼭 담힌 현관문들 안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현관문이 열려 있어도 안을 들여다 보면 안됩니다."
가이드는 다시 주의를 준다. 현지인들이 자꾸 안을 들여다 보는 관광객들 때문에 불편을 겪는다고 한다.
우리가 가는 길에는 문을 열어둔 집이 한 채도 없었다. 사람사는 골목이 맞나 싶을 만큼 사람들의 발길이 없었다. 이 곳도 젊은이들은 전부 대도시로 나가고 고령 인구가 60프로 이상이라고 한다. 대도시를 제외하고 어느 나라를 가든 소도시에서 어린아이와 젊은이들을 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