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깎기
2020년의 마지막 월요일이 밝았다. 24일부터 내리 4일을 푹 쉬고, 출근한 2020년 마지막 월요일. 사실 29일인 화요일부터 31일까지 내리 휴가라 오늘은 2020년 나의 마지막 출근길이자, 업무 날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다시 출근하는 날에는 새로운 해가 밝는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할 일을 대충 정리하고, 2020년의 업무를 되돌아본다. 그리고 2021년을 맞이하는 준비가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 퇴근 전에 연필을 깎기로 했다.
나는 일할 때 주로 연필을 쓰는 편이다. 인터뷰 녹취 파일에 중요한 내용을 정리할 때나, 원고를 정리할 때도 주로 연필을 쓴다. 게다가 나는 소위 문구 덕후이기도 해서 내 연필꽂이에는 각양각색의 연필이 가득하다. 문구 중에서도 나는 연필을 참 좋아하는 연필 덕후인 것이다. 이사할 때 회사의 공용 연필깎이를 내 이삿짐에 싼 것도 그 이유다. 물론 우리 팀은 없어졌지만 팀을 기억하겠다는 목적이기도 하고, 사실 일할 때 연필깎이가 없으면 안 되는 지독한 연필 마니아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어 보니 인터뷰하면서 집에 갔다 놓은 연필 몇 자루를 제외하고도 8개의 연필이 회사 내 자리 연필꽂이에 꽂혀있다. 8자루를 천천히 보니 죄다 뭉뚝한 걸 보니, 연필을 깎지 않은 지 꽤 된 것 같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일을 시작하기 전에 연필 몇 자루를 조용히 손에 쥐고 연필을 깎는 행위는 이미 나에게 정갈한 의식이 됐다. 괜히 그렇게 하면 안 써지던 원고가 잘 풀리는 기분도 들고. 그리하여 나는 2021년을 준비하는 첫 번째 행위로 연필을 깎는다. 형형색색 컬러도 굵기도 길이도 죄다 다른 8자루의 연필. 이 연필들이 불어넣어 줄 2021년 상서로운 여덟 가지의 기운에 의미를 부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