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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짱 Mar 19. 2016

[하루 한 편 구비구비 옛이야기]

손병사와 도깨비    

밀양 살던 손씨 집안의 아이가, 부모도 돌아가시고 갈 곳이 없어 돌아다니다 보니 의주 두만강 근처까지 가서는 한 부잣집에서 심부름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그 집에는 좋은 토지가 있어서 농사를 잘 짓고 살았는데, 언젠가부터 도깨비가 와서 농사를 훼방 놓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어 놓고 곡식이 익을 때가 다 되어 가면 도깨비가 와서 농사를 다 망쳐 놓는 것이었다. 주인은 올해 또 도깨비가 와서 농사를 망치면 어쩌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이가 한 열댓 살 먹었을 때였는데, 아이는 주인에게 오늘 저녁엔 자기가 지키고 있어 보겠다고 하였다. 주인이 도깨비가 많이 올 텐데 어린놈이 뭘 어쩐다고 그러느냐며 말렸지만 아이는 고집을 부렸다.

아이는 그날 저녁밥을 일찍 먹고 밭 복판에 가서 누워 있었다. 느지막한 시간이 되자 사방에서 우글우글 시끄러운 소리가 나더니 도깨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몇 도깨비들이 오늘은 안 되겠다며 못 놀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다른 도깨비가 왜 그러느냐고 하니 “하이구, 병사 나리가 여기 와 계신데 놀 수가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 다른 도깨비가 병사 나리를 깨워서 한번 물어나 보자고 하였다. 도깨비들은 아이 곁으로 우 몰려들어서는 “병사 나리, 주무십니까?” 하면서 아이를 깨우더니, “여기는 우리가 노는 장소인데 오늘 저녁엔 왜 병사 나리가 와 계십니까?” 하였다. 아이는, “전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오늘 저녁부터는 여기가 내 장소이니 너희들은 이곳에 다시 근접하지 못한다.” 하고 호통을 쳤다. 도깨비들은 그럼 수수께끼 내기를 해서 누구 자리인지를 정하자고 하였다. 도깨비들이 먼저 문제를 냈다.

“두만강 물이 몇 바가지나 되겠습니까?”

“두만강만 한 바가지가 있으면 한 바가지밖에 안 된다.”

도깨비들은 “아이고, 맞습니다.” 하더니 이번엔 병사 나리가 문제를 내보라고 하였다. 아이는 몸을 벌떡 일으켜 앉더니, “내가 여기 눕겠나, 서겠나?” 하였다. 도깨비들이 생각하니, 누울 것이라 하면 설 것이요, 설 것이라 하면 누울 것이라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 도깨비들은 “아이고, 우리가 졌습니다. 병사 나리가 차지하소.” 하고는 물러갔다.

그날 이후로는 곡식이 잘되었고, 그 아이는 커서 북병사(北兵使)가 되었다. 귀신은 그것도 아는 법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 7-3, 156-157면, 내남면 설화40, 손병사와 도깨비


이거야말로 진퇴양난, 딜레마. 저놈이 저렇게 어정쩡하게 앉아서는, 내가 설 것이냐, 누울 것이냐 물으면 그야말로 확률은 오십 대 오십.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저렇게 할 것이고, 저렇게 말하면 이렇게 할 것이니 실제로 이건 백 퍼센트 지는 게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도깨비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지만, 만약 실제상황에서 누군가 저런 식으로 대답한다면 “지금 장난하냐” 하며 더 부아를 돋울 상황인데 도깨비들은 아이가 한 수 위임을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그가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또한 그 권위에 순응한 것이기도 하지요. 밀양 손병사는 사실 그 엄마가 더 대단한 분이에요. 귀신과도 대적하는 용감함은 모전자전.

‘나는 못난이 병’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는 ‘아하, 저런 방법이 있구나. 날 괴롭히는 못된 사람들한테 나도 저렇게 대적해 보면 되겠구나.’ 하고 용기를 갖게 할까요, 아니면, ‘우와, 저런 생각을 어떻게 하지. 역시 대단한 사람이네. 나 같은 찌질한 머리에서는 절대 못 나오는 거야. 게다가 어린 나이에 용감하기도 하지. 췟,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인걸.’ 하고 더 자괴감을 깊게 할까요. 저처럼 나는 못난이병이 심한 사람들은 두 번째 방식으로 생각하기 쉬워요. ‘나는 저렇게 못하는데... 그러니까 요 모양으로 살지...’ 하는 거지요. 그러면서 회피기제를 발동시켜요. ‘어차피 난 저렇겐 못 하니까, 그래서 요 모양으로 살더라도 할 수 없어. 이게 나야. 걍 생긴 대로 살지 머.’ 이러면서 자존감을 스스로 한껏 고양시키지요. 그래서 타인이 바라보는 ‘나’와 스스로 생각하는 ‘나’의 차이가 커져요. 타인은 이런 사람을 겉으로 봤을 때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보기 쉽지요. 정작 본인은 찌질하고 못난 자신에 대한 자학이 심해서 늘 채찍질하며 살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자기 자신과 차이가 크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그저 품으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혜민스님이나 법륜스님의 일문일답에 삐딱한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많은 이유도 그런 면에서 해석할 수 있어요. 현실을 모르는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받아들이는 거지요. 좋은 이야기, 건강한 서사를 늘 말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끌 것인가가 관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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