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연애 일기]
요즘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시청 점검을 앞두고 직장일이 바빠져 몸과 마음에 여유가 없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각자 학교생활 적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남편은 퇴사냐 유지냐를 놓고 한참을 고민하다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일하는 상황이다. 나쁜 일은 하나도 없다. 그저 그렇게 각자의 울타리 안에서 별 일 없이 바쁘게 지내는 중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드라마 보는 일이 많아졌다. 그것도 아주 옛날 드라마들만 골라서 말이다. 10 년도 안된 TV가 번쩍 불빛을 일으키더니 남편 품에서 사망했다. 그 뒤로 온 가족이 ‘내 손안에 작은 세상’ 스마트폰 집착이 더 심해진 것 같다. 그날도 야간작업으로 새벽에야 집에 들어왔다. 씻지도 않고 거실 좌식 책상 앞에 벌렁 누웠다. 그리고 나만의 세상에 접속해 옛날 드라마 역주행을 시작했다. 한 때 드라마 몰아보기를 하다 폐인이 될 뻔한 적이 있어서 다시는 그 짓을 안 하겠노라고 다짐했건만, 또 빠져들고 말았다. 나도 어쩔 수 없는 갱년기 호르몬 전쟁을 겪고 있는 건가? 알게 뭐람. 그냥 이 드라마 끝장 다 보고 말 거라며 손에서 놓지를 않는다. 드라마는 ‘내 이름은 김삼순 ’
예쁘지도 않고 뚱뚱하고 나이도 많은 노처녀가 잘 생기고 돈 많고 상처가 많은 연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 그 흔한 스토리에 또 엮이고 말았다. 그런데, 촌스러운 이름의 여주인공 김삼순은 너무도 주체적인 사랑을 한다. 남자가 반할 만큼 매력적이고 강하면서도 부드럽다. 연약하고 제멋대로인 남자는 자신만의 확고한 사랑관과 신념이 있는 여자에게 빠져든다. 여자의 부재는 남자에게 그리움을 낳는다. 남자는 혼란스러워하는 여자에게 회심의 화장실 키스를 날린다. 그냥 그렇게 우리 이야기인 듯 그 장면을 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창밖이 환해졌다. 그놈의 키스신 때문에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아 참나. 이게 뭐라고.
각자 방에서 딸들과 남편이 곯아떨어져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데, 아주 평온한데, 나만 이렇게 혼자서 명작 드라마에 빠져서 울고 있다. 그냥 그 상황이 너무 외로웠다. 다 있는데, 아무도 없는 것 같은 휑한 느낌이 올라왔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더 펑펑 울고 싶어 졌다. 잠든 남편에게 달려갔다. 이 바보 같은 남편은 꺼이꺼이 우는 내 소리에 놀라 깨고서는 나에게 묻는다. 무슨 악몽 꿨냐며 품 안에 나를 넣는다. 차마 드라마 보고 운다는 소리는 못하고, 그냥 남편 품에서 아무 말 없이 새벽잠이 들어버렸다.
아침이다. 다시 시작된 일상. 아이들은 학교 갈 준비로 바쁘다. 남편이 아이들에게 엄마가 울었다며 엄마를 깨우지 말라고 소곤대는 소리가 들린다. 생각해보니, 남편 앞에서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이 없다. 난생처음이다. 남편도 적잖이 놀란 눈치다. 남편 덕에 오랜만에 아침을 챙겨주지 않고 아침잠을 잤다. 엄마라는 위치와 역할을 잠시 내려놓으니, 그냥 그렇게도 하루가 시작되는구나. 아무 일도 없었다. 늦게 일어나 씻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데이트 신청을 했다.
“점심 같이 먹을까?”
평소 같았으면 직원들과 먹는다며 거절했을 남편인데 , 남편이 긴장한 듯 이끌려 나왔다.
“이 집 내가 발굴한 맛집이야. 슬플 때 잔치국수 한번 먹어 봐. 후루룩 후루룩 먹다 보면 눈물 잔치가 벌어지거든. 그래서 잔치 국수야.”
“새벽에 왜 운 거야? 진짜 악몽 꾼 거야? 무슨 악몽인데? 난 악몽 꾸면 소리 지르고 욕하고 한다 그러던데, 자긴 왜 운 거야?”
“그냥 그럴 때가 있어. 나도 모르게 외롭다고 느껴질 때. 그냥 울고 싶어 질 때. 오늘이 그런 날이야. 자기도 그럴 때 있지?”
서로의 비밀스러운 슬픔을 알아차린 날. 의도하지 않게 드라마를 보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사소한 것 하나에도 기쁨을 느끼게도 되는 날. 혼자 울지 않고 남편에게 내 눈물을 알린 날. 이상하게 막 좋지는 않지만 남편과 예측하지 못한 약속 잡아 데이트도 하게 되는 날. 나만 아는 맛집에서 잔치국수와 김치 참치 볶음밥을 함께 먹어서 기분 째진 날. 옛날식 핫도그 한 입씩 베어 물던 날. 각자의 슬픔을 짊어지고 각자 일터를 향해 걸어갔다.
저만큼 걸어가던 남편이 뒤돌아 나를 바라봐주었다. 손을 흔들어 준다. 나도 따라 손을 흔든다. 그날따라 남편이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또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