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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아빠, 현실파 엄마의 둘째 딸

예술, 거부할 수 없는 욕망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예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라는 회장님의 질문에 내가 한 대답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가난한 편에 드는 것 같다. 주인집 옆에 딸린 작은 방 하나가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네 식구가 살기에도 벅찬 그 작은 단칸 방은 큰 전축과 스피커, 엘피판, 기타 같은 악기들까지 차지하고 있어 더 좁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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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아빠, 현실적 엄마


지금은 많이 변하셨지만, 내 어린 시절의 두 분은 이런 모습이었다.


젊은 시절 아빠는 사람 좋아하는 몽상가, 예술가..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택시운전을 하셨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렇게 근면하게 일하셨던 것 같지는 않다. 열심히 일하는 기억보다는 기타를 치고 음악을 듣고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고.. 그런 기억들이 더 많은 걸 보면.


가난과 그에 걸맞지 않은 악기들 때문에 아빠는 엄마와 싸우는 날도 많았지만, 나에게는 다정하게 '은하철도999'의 마틸다를 그려 주곤 했다.


어린 20대 초 엄마는 생계형 슈퍼우먼이었다. 나이가 들고 생각해보면 원래부터라기 보다는 네 식구를 책임져야 하니 현실파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엄마는 나를 엎고, 언니를 앞장 세우며 재래시장에서 비닐장수를 했다. 비닐 묶음을 들고 좁다란 시장 골목을 누비며 "비닐 사이소, 비닐 사이소" 했던 기억도. 20대 꽃다운 참 용감하고 씩씩한 여자다.


어린 나에게 아빠는 '경제력 없는 신나는 예술가', 엄마는 '그를 대신해 고생하는 슈퍼우먼'으로 보였고 그것이 내 무의식에 뿌리를 깊게 내렸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예술은 쓸데없는 것, 무책임한 것 그래서 가족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전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라고 담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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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쌓아도 거부할 수는 없는 것, 예술

누구보다 이성적이라고 스스로 생각해 이과를 선택하고 공학을 공부했다. 독일 TFH에서도 공학을 공부했고. 그런데 내 머리는 이러한데, 내 몸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점점 예술적인 분야에서 더 크게 발휘되었다.


형편상 야간대 공대를 다녔는데, 학비를 벌기 위해 선택한 것은 웹디자인이었다. 독일 TFH Berlin 에서 산업공학을 공부하면서도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3D디자이너로 랩실에서 근무했다.(참고로 독일 국립대는 학비가 무료이기에 생활비만 해결하면 된다) 20대 취업 후 취미는 살사와 탱고 였고, 비올라 연주 듣기였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아무리 주위에서 '감각있는 것 같은데'는 말을 들어도 단순 흥미로 치부했다.


물속에서 오래 숨을 참으면 물 밖으로 나올 때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건 당연하다. 서른 즈음부터 뭐 어떤 특별한 계기도 없었는데 그렇게나 아빠때문에 싫어하던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배우거나 이론을 공부한 건 아니고 그냥 누가 연주하는 걸 듣고 따라 쳤다.


그다음은 그림. 그림도 시작은 비슷했다. 어떤 특이점 없이 2018년 1월 어느 날 갑자기, 마치 어제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오늘도 그리는 것 처럼,, 그렇게 그리기 시작했다.


나이 들수록 짙어지는 아빠 DNA
3. 완성. 자세히 보면 고양이 넷과 나도 있다. 작품명 '낮잠자는 우리집 풍경'


오랫동안 거부한 만큼 미친 듯 그린 것 같다. 한번 시작하면 밥 먹고 잠만 자며 그림만 그렸다. '그래 졌다. 내가 졌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라고 물속에서 참아왔던 숨을, 거부하던 장막을 확 걷어 낸 순간 미친 듯 그렸고, 그리고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나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고뇌와 갈등. 타고난 예술적 재능과 욕구는 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 했던 현실.


오랫동안 심리상담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타고난 기질로는 사회생활하기 정말 힘든 성향인데, 이정도로 하는 건 기적처럼 보이네요. 후천적으로 키워진 거에요. 어머니를 통해"


Thanks To

아빠, 여러 재능을 물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엄마, 현실을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술공장 여자 팀장인 나는, 또 하나의 자아이자 캐릭터로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 예술과 현실이라는 극단의 스펙트럼에서 정신적이든 심리적이든 육체적이든 그 균형점을 찾기 위해 위태로운 시간을 보냈다. 여러 일을 경험하고 깨닫고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타협점을 찾은 것 같다.


오늘 하루도 축구장 22배의 공장을 뛰어다니느라 2만 보는 족히 걸었지만, 곧 있을 개인전을 위해 퇴근 후에는 또 붓을 든다. 비올라 연주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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