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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울 땐 잠시 숨어도 됨

공황장애 1


30대 초중반 마케팅 파트장으로 신제품 술의 기획과 마케팅 캠페인을 신나게 하고 있을 때 이틀에 한 번은 회사(강남 역삼동)에서 밤을 새운 것 같다.


새벽에 여성전용 찜질방에서 씻고 1~2시간 쪽잠을 잔 후 다시 회사로 출근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역삼동은 지금도 그렇지만 직업여성이 많아 소규모 여성전용 찜질방이 많았는데, 일반인인 나를 곱지 않게 보아도 어쩔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피곤한 건 그녀들도 나도 똑같았고 집이 있는 분당까지 왕복하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2014 한국광고대회 온라인부문 금상 광고주담당


하루는 근처에서 회사를 다니는 친구가 점심을 같이 먹자며 사무실 앞으로 찾아왔다. 맛있게 차려진 순댓국과 하얀 쌀밥 한 숟가락을 입 안에 넣었는데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조금 당황했지만 겨우 삼키고 다시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는데 이것도 넘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공황장애가 왔다.

그때에는 이게 공황장애인지 몰랐다. 컨디션이 안 좋은가, 피곤한가.. 그렇게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병원 상담 후 나의 상태가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끔 강변북로나 고속도로를 운전하다가 내가 핸들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것 아닌가 하는 패닉에 사고 날 뻔한 적도 있고. 갑자기 식은땀이 미치도록 흐르기도 하고, 말을 하다가 100미터 달리기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숨이 차 미팅을 멈춘 적도 있었다.



한 번은 고속버스를 타고 지방 출장을 가고 있었는데 버스가 이상하다, 운전기사가 이상하다며 버스를 3~4번 세웠던 적이 있다. (이건 기사님과 승객분들에게 너무 죄송한 일)


많이 좋아진 지금도 고속버스는 물론 시내버스를 편하게 타지는 못한다. 장거리 고속버스에서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버스가 조금만 흔들려도 악몽에서 깨어나듯 신경이 곤두선다. 모르는 사람이 운전하는 택시나 친하지 않은 사람이 운전하는 차도 편하게 타지는 못한다. 당연히 비행기는 엄두도 못 내고.  


밤에 자다가 눈을 뜨면 방안 천장이 무너져 나를 덮칠 것 같은 날도 많았고. 퇴근 후 집에 들어갈 때에는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집 밖에서 몇 시간을 서성이다가 차에서 잔 적도 근처 찜질방에서 잔 적도 있다. 그런데 또 집 안에 한번 들어가면 현관문 밖 세상이 무서워 문을 열고 나오지를 못했다.


집 밖에서는 집 안이 두렵고,
집 안에서는 문 밖 세상이 두렵고



나는 이런 증상이 약점이라 생각해서 숨기기 급급했다. 특히 회사에. 숨기면서 증상이 악화되는 것보다 내 약점이 회사에 공개되는 것이 더 싫었다. 이건 워낙 타고난 성향이 예민한 것도 있지만 사회생활하면서 겪은 것들과도 관련 있는 것이라 다음에 글로 써보겠다. 아무튼 이런 증상들은 참으면, 견디면 지나가는 그런 감기 같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절반은 해결


나의 증상은 집과 멀어질수록 심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방과 해외출장이 잦았는데, 한 번은 광주에 2박 3일 출장 갔었다가 매일 밤 집이 있는 분당에 운전해서 올라와서 자고 새벽에 내려가기를 반복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왕복 6시간 거리를 어떻게 그렇게 했나 싶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왕복 6시간 운전보다 집과 떨어져 있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허술하고 웃음만 나올뿐이지만 나만의 갑옷과 쉘터에서 휴식을 취하는 냥이들


너무 두렵거나 힘들면 좀 쉬어도 되는데

좀 허술하면 어떤가, 나만을 위한 갑옷과 쉘터로 숨어들어도 되는데

지금 이렇게 좀 이상한 것도 나다,라고 주위에 말해도 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걸 오픈하고 인정하는 순간 힘겹게 쌓아 올린 무언가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지금까지도 매일 명상과 마음공부를 하고 있다.

그때의 나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고 있는 것 한 가지.


알아차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리는 것

이 생각과 감정을 관찰하는 것, 이 것이 시작이자 끝.


아이러니하게도 순댓국을 먹다가 충격받은 그날이, 나에게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게 해 준 고마운 날이 되었다. 그 알아차림의 시작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고통 속에 몸부림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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