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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상엽 Aug 20. 2020

충무공도 직접 곡식과 말의 숫자를 헤아렸다

리더십의 유형과 특징은 경영학과 조직문화의 관점에서 늘 화두가 되는 주제이다. 특히 '성공하는(or 실패하는) 리더십의 x가지 특징'과 제목은 식상한 그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재생산된다. 이런 글에서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바로 '신뢰와 위임의 미학'이다. 리더는 인내에 기반해 조직 구성원을 믿고 기다려줘야 하며, 그들이 스스로 성과를 내도록 권한과 책임을 위임해야 하며, 그렇지 않은 리더십은 건강하지 않으며 성공할 수 없다.. 와 같은 문장이 이런 글에서 클리셰처럼 반복된다.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주장에 공감하지 않는 편에 속하고, 아주 제한적인 조건을 전제로 동의한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중 충무공 이순신의 시각에 기반한 전쟁 기록으로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은 자료이다. 난중일기를 떠올리면 언뜻 대단한 전략과 전공의 비밀이 묘사되어있을 것 같지만 기실 난중일기에 기록된 충무공의 일상은 매일 창고의 곡식과 마필의 숫자를 세고, 병기를 점검하고 이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맡은 바 임무를 방기한 수령과 아전을 곤장으로 다스리거나 목을 베는 방식으로 처벌하는 장면이 절반쯤 된다. (나머지 절반은 격무의 스트레스와 전투에서 얻은 부상으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는 문장들이다.) 충무공의 이런 '일상적인 마이크로 매니징'으로부터 벗어나 유의미한 수준의 권한과 책임을 '위임' 받은 장수는 그의 혹독한 시험과 의심을 통과한 극소수의 몇 명뿐이다. 수만 명의 수군과 수백 척의 전선을 거느리고 풍전등화의 조국을 위기에서 구한 충무공의 일상과 리더십이 '고작' 이러했는데 몇 명의 팀원 혹은 많아야 채 백 명이 되지 않는 직원으로 구성된 스타트업의 리더십이 유독 신뢰와 위임과 인내에 기반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나는 리더십이 올바른 결정과 실행, 이를 통한 결과물로부터 나오며 이는 디테일에 대한 완벽한 이해, 성과에 대한 높은 기준과 집착, 이것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매일매일의 고단함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믿는다. 또한 신뢰, 위임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구성 요소들을 완성하고 확장하기 위한 보조 수단일 뿐이며, 이 또한 아주 엄격한 기준을 통과한 일부에게만 제한적으로 허락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스타트업의 초기 단계에서는 창업자를 제외하고 위에 언급한 기준에 부합하는, 그래서 권한과 책임을 위임할 수 있는 리더란 더욱 희소하며 현실적으로는 획득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 단계의 창업자들은 특히 이런 '고단함'에 익숙해져야 하고 신뢰와 위임에 기반한 '근사하고 멋진 리더'의 유혹에 넘어가는 상황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억하자. 충무공도 직접 곡식과 말의 숫자를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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