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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12. 2019

알렉산드라 레이즈먼Alexandra Raisman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드라 레이즈먼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본다. 리우 올림픽에서만 메달 세 개를 거머쥔 훌륭한 체조선수지만, 제일 먼저 뜨는 내용만 보아서는 그런 것들을 알기 어렵다. “누드 체조”, “몸매”, “화끈화끈”, “섹시 시스루 드레스” “미녀 체조 선수”, “노출 사진”, “알몸 영상 공개” 등의 단어로 구성된 기사 제목이 제일 먼저 줄줄 뜬다. 한글의 수치다. 모아 놓고 보려니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다. 그나마 “미녀 체조 선수”가 왜 벗었는지 알려주는 제목은 하나뿐이다. “미국 전 체조선수 몸에 ‘생존자’ 쓰고 누드 사진 촬영”(2018년 2월 15일, BBC). 왜 이 선수가 생존자인지 알려주는 기사도 보인다. “美 여자 체조대표팀 상습 성폭행 주치의... ‘징역 175년’”(2018년 1월 25일, MSN).


  성폭력 가해자 래리 나사르는 미국 여자 체조 대표팀 주치의였다. 20여 년간 체조 대표팀 선수 150여 명을 상습 성추행·성폭행한 것으로 드러나, 징역 최장인 175년 선고를 받았다. (거기다가 아동 성 착취 포르노 관련 죄목으로 징역 60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재판은 1년 넘게 이어졌고, 피해자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지위를 악용하여 의료 행위를 가장해 저지른 성범죄. 나사르 본인도 혐의를 인정했으나, 반성하고 있다는 둥 피해자 증언을 들으며 자신도 충격을 받았다는 둥 구구절절 편지를 썼다.


  판사는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가해자에게 단호하게 한 방을 먹였다. 그 편지를 코 푼 휴지처럼 가볍게 던지고, “당신은 모르지만 당신이 여전히 위험한 존재라는 걸 나는 안다”는 말을 남기며 선고를 마쳤다. 이때 재판장에서 피해자들이 증언하면서 남긴 말들은 여러 차례 인용되면서 유명해졌다. 하나하나가 마음을 울린다.


  이들은 우선 스스로가 겪은 일을 정확하게 고발했다.

  “당신의 친절함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성추행하기 위한 계략일 뿐이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증오하는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매티 라슨Mattie Larson)

  “그들은 존경받는 의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14살짜리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케이티 라스무센katie Rasmussen)

  “나는 그가 나를 학대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신고도 했다. 그러나 미시간 주립 대학교는 뻔뻔하게도 내가 성폭력과 의료 조치의 차이점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아만다 토마쇼Amanda Thomashow)

  “엘리트 체조의 문화에는 문제가 있다. 순종,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과 말없이 겪는 고통. 래리 나사르는 이를 능수능란하게 조종해서 피해자들을 학대하고 통제했다. 한 번도 아니고, 피해자들이 스포츠계에 몸 담은 기간 내내 체계적으로 저질렀다.”
(첼시 윌리엄스Chelsea Williams)

  “소녀들이 나서서 성인에게 이야기하면 성인들은 듣지 않는다. 왜 듣지 않는가? 성인들이 듣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뭐하러 어린이들에게 성인에게 말하라고 가르치는가?”
(클라시나 시로비Clasina Syrovy)


  과거에 자신이 했던 순수한 생각, 그 후 범죄의 피해자가 된 것, 또 그로 인해 괴로웠던 마음들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나는 체조계의 내 우상들과 같은 의사를 만나게 되어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했었다.”
(매디 존슨Maddie Johnson)

  “당신이 내 팀 동료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 나는 그들을 내 가족으로 생각했다.”
(첼시 제파스Chelsea Zerfas)

  “나는 이 일이 있기 전까지는 근심 걱정이 없는 철없는 어린 소녀였다. 그 이후에 구름이 나타나 내 인생의 모든 인간관계, 특히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들 속으로 따라다녔다.”
(린지 카Lyndsy Carr)

   “첼시는 고통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2009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월이면 내가 내 아이를 잃은 지 10년이 된다. 첼시는 23세였다. (...) 나는 매일 아이가 그립다. 매일. 그리고 모든 게 나사르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나 마크햄Donna Markham, 첼시 마크햄의 어머니)

  “당신은 우리를 학대해 놓고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역겹다.”
(린지 렘키Lindsey Lemke)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16살이었고, 이 괴물이 다른 소녀들을 해치는 걸 막았어야 했다. 그가 내게 한 일이 잘못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크리스타 웨이크먼Krista Wakeman)

   “내가 이 사실을 밝혔을 때, 내가 당한 성폭력이 나에 대한 무기로 사용되었다.”
(레이첼 덴홀랜더Rachel Denhollander)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스러지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굳게 맞섰다.


  “내 인생을 영영 바꿔 놓은 보이지 않는 상처들이 있다. 오늘 나는 그것을 뒤바꾸려 한다. 당신이 훔쳐간 내 자신감과 자존감을 나는 되찾고 있다. 당신은 내 핵심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며 더 이상 날 지배하지 못한다.”
(제니퍼 헤이스Jennifer Hayes)

  “당신이 너무나 오랫동안 무자비하게 학대했던 여성들이 이제 큰 세력이 되었고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 깨닫고 있을 것이다.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는 이제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드라 레이즈먼Alexandra Raisman)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러 돌아온다.”
(카일 스티븐스Kyle Stephens)

  “당신이 너무나 쉽게 이용했던 어린 여자아이들이 이제 돌아왔다. 당신 인생의 모든 날을 괴롭힐 것이다.”
(제닛 앤톨린Jeanette Antolin)

  “나는 내 통제 밖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더 이상 수치를 느끼지 않는다.”
(메건 긴터Megan Ginter)  

  “나는 역경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당신은 나를 쓰러뜨릴 수 없다.”
(한나 모로우Hannah Morrow)

  “나는 나보다 먼저 나서서 말한 모든 여성, 나 이후에 말할 모든 여성과 함께 하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말만이라도 하고 싶다.”
(제니퍼 루드-베드포드Jennifer Rood-Bedford)


  이들은 눈물을 흘리고 닦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손을 맞잡으며 증언을 마쳤다.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닦아낸 말에는 힘이 있었다. 가해자 래리 나사르는 끝까지 자기의 안위 챙기기에 급급했지만, 온 마음으로 버티고 생존해온 이들에게는 서로를 돌아볼 힘이 있었다. 고통 속에 연대한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강인함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삶의 현장에서 내몰리고 있어도, 그래서 도무지 여유라는 게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 있어도... 고통을 이겨내며 항체를 길러낸 인간만이 풍기는 기운이라는 게 있다. 그 기운은 스스로를 방어할 뿐 아니라 서로를 지킨다. 같은 고통 안에 있던 인간을 끌어안고, 아픔을 함께 느끼는 힘이다. 이들은 법정에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래리 나사르의 피해자는 이들뿐이 아니었다. 2016 리우 올림픽 기계체조 4관왕이었던 시몬 바일스도 스스로가 나사르의 피해자임을 밝혔다. “더 이상 내가 당한 이야기를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말도 함께였다. 폭로는 계속되었다. 서로에게 힘을 더해주는 움직임도 계속되었다.


  “미녀 체조 선수” 알렉산드라 레이즈먼이 “화끈화끈”한 “알몸”의 “환상적 몸매” 따위 소리를 듣게 될 걸 몰랐을까. 알았겠지만 그럼에도 사진을 공개한 것 또한 같은 이유다. 알렉산드라 레이즈먼은 이 일을 두 번째로 공론화한 사람이었고, 방송에 출연하거나 책을 쓸 때에도 꾸준히 이 일을 언급해 왔다. 알렉산드라 레이즈먼은 몸 측면에 글씨를 적은 채 사진을 찍었다. 저서 제목이기도 한 “맹렬한(fierce)”이라는 단어와 함께 “여성이 존중받기 위해 다소곳해질 필요는 없다(Women do not need to be modest to be respected)”는 문장을 길게 적어 내렸다. 이 사진을 SNS에 올리면서 알렉산드라는 본인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표현했다.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판장에서 외친 그의 목소리는 유효하다. 이 일에 영향을 받은 사람이 앞으로 수도 없이 나올 거라던 어떤 선수의 말은 옳았다. 제2, 제3의 래리 나사르가 나오지 않도록 눈에 불을 켜고 지킬 이들이 늘어났으며, 혹여나 그런 자가 나왔다가는 “맹렬한” 생존자들에게 둘러싸여 평생 저주받을 것이다.



  이번 사진 촬영 전에도 알렉산드라 레이즈먼이 우리 나라 인터넷에서 잠시 유명해진 적이 있다. 대회에 나간 딸 모습을 차마 지켜보지도 외면하지도 못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그 사랑스러운 모습이 화제가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감히 도구로 취급했지만, 사실 알렉산드라는 매우 사랑받는 소중한 사람이다. 알렉산드라뿐 아니라 공판장에 온 이들과 오지 못한 이들 모두가 그랬다.


  무엇보다 이들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법을 잊지 않았다. 당당한 알렉산드라의 행보가, 또 그 이후가 더욱 기대된다. 알렉산드라는 자신의 체조 동작만큼이나 그 정신도 유연하고 강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모든 익명성을 뚫고 나와 자신을 외치는 그 강력한 여성을, 그리고 그와 같은 움직임을 보인 파도 같은 여성들을 우리는 용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증언 번역문은 허핑턴포스트에서 일부 인용하였습니다.

참고: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story_kr_19029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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