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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13. 2019

김복동

평화로 가는 길이 열렸으니

  2015년 12월 28일. ‘불가역적’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날이다. 아니 들었다기보다 그 말이 도장처럼 쿵 찍혔다. 유독 회색이었고 이상하게 추웠던 그 겨울, 수은주가 낮아진 데는 대뜸 발표된 그 합의문 탓도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읽어봐도 ‘이 돈 줄 테니 소녀상 철거하고, 다시는 말 꺼내지 마라’고 읽히는 이상한 글이었다. 무거운 한숨과 가끔은 눈물까지 나왔다. 솔직히 이제 망했다고 생각했다. 단어 하나로 첨예한 싸움을 하는 외교 판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불가역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앞으로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를 테이블에 올릴 수 있을까.


  당연히 분위기는 험악하고도 참담했다. 뭐라도 하는 꼴을 보여야겠던지, 외교부 차관이라는 자가 당사자들을 만나러 갔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의 모티프가 된 인물이자, 머지 않은 훗날 트럼프 대통령을 와락 끌어안아서 화제가 될 이용수 선생님은 외교부 차관이 입을 떼기도 전에 버럭 소리를 쳤다. 우리가 만만하냐, 우리를 뭘로 보는 거냐.


  그리고 그 뒤에, 가만히 소파에 앉아 있다가 최종 보스처럼 입을 연 사람이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힘 있게 조목조목 말하던 사람.

 

  김복동 선생님이 있었다.


  먼발치서 톺아보며 이 싸움은 다 끝났다고 고개를 젓던 나와 달리, 당사자인 그는 날로 졸렬해지는 싸움 판을 끝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는 1926년, 꽃 피고 잎 피는 춘사월에 태어났단다. 주변에서는 “밤에 태어난 범띠라 활동성이 얼마나 좋겠어” 하고 농을 던지는데, 진실에 가까운 농담이다. 밤중의 호랑이처럼 김복동도 정확하게 보고 조준하고, 놀라울 만큼 활동 반경이 넓다. 피해자이자 생존자에서 증언자로, 증언자에서 인권 운동가로 속속 모습을 바꾸어 왔듯.


  개인사를 구메구메 풀자면 아쉬운 순간이 왜 없을까. 사지로 끌려가 생지옥을 겪다 돌아왔고, 돌아오는 길도 돌아와서도 쉽지 않았다. 늘 열심히 일했고 주변을 돌봤지만 미안하고 쓸쓸한 마음이 고여 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다가 60대, 어리다고는 할 수 없는 나이에 그는 첫 증언을 한다. 심지어 나이 여든에 그때까지의 삶을 척척 접어두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향한다. 그가 멈추지 않고 걸어온 고발의 역사는 어느새 평화로 가는 길이 되어 있다.


  쉬운 길은 아니었다. 그는 제국주의가 가진 가장 잔혹한 민낯을 날마다 보아야 했다. "일본이 해결해주겠냐"고, "해결할 거였으면 진작 했겠지" 말하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일본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을 거라는 걸. 게다가 피해자들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날 것이다. 모든 일이 과거가 되길 바라며 숨 죽이고 기다리는 이들이 있다.


  다 알지만 꿋꿋하게 계속 간다. 이 싸움은 열매를 따 거두는 게 아니라 씨앗을 심는 과정이니까. 그가 나이 여든에 고향을 떠난 이유는, 동생의 말을 빌자면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되어 우리나라 여성들이 그런 피해를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니까.


  <미생>에서 “순류를 유지하는 것이 상대의 입장에선 역류가 된다”는 말을 읽었다. 딱 김복동의 길이다. 그는 상대와 달리 인신공격도, 거짓말도, 조롱도 하지 않는다. 할퀴는 말이 아니라 세우는 말을 한다. 소녀상 제막식에서 일본 대사관을 향해 사죄를 요구하는 그의 말은 “평화로 가는 길이 열렸으니 나와서 사과하라!”였다. 용서를 빌면 받아줄 준비도 되어 있다. 단지 1,000번이 넘는 수요일이 차곡차곡 쌓여도 상대에겐 용서를 빌 마음이 없을 뿐이다. 그래도 김복동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평화상을 하나씩 세우며 평화를 기다린다. 기억하자는 목소리를 촛불처럼 밝힌다.


  김복동은 깊은 물처럼 담담하고 항상 떳떳하다. 거짓말하지 않은 자는 진실의 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반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기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한 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녀상을 두려워하고, 꼴 보기 싫어하는 자들은 전시 여성을 향한 폭력 앞에 떳떳하지 못한 자들이다. 전쟁을 벌인 자들이거나 아니면 여성과 다른 약자들을 향한 폭력을 그만둘 생각이 없는 자들이거나.


  그런 추악한 자들이 여기저기서 툭툭 나타난다. 얼마 전에도 소녀상을 욕보이고, 고소한다니까 그제야 두려워 무릎 꿇은 한심한 인간들도 있었다. 김복동의 긴 생애 내내 그런 이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을까. 그럼에도 그는 쉬이 절망하지도 낙관하지도 않고 꼿꼿하다. 언젠가 오사카 시장이 망언을 했을 때 김복동은 오사카 시청까지 달려가서 시장 나오라고 엄포를 놓았다. 시장은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고, 담당 공무원의 죄송하다는 공염불만 하염없이 들어야 했다. 대쪽 같고 진중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음에도, 돌아서면서 그는 덤덤하게 말한다. 그 시장이 오늘 나왔으면 나한테 호되게 당했을 건데 안 나와서 산 거라고. 담배를 후 불며 말하는 그 장면은 마치 느와르 영화 같았다.


  김복동의 넓은 배포가 엿보이는 대목은 그뿐이 아니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혐한 범죄 표적이 되곤 하는 재일 조선학교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준비하고, 직접 가서 학생들을 격려한다. 아이들을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터지는 이유는, 아마 적진 한가운데서 사는 느낌을 피부로 알기 때문일 것이다. 힘닿는 데까지 도울 테니 부지런히 공부하라며 웃는 얼굴은, 옛 소설 속에 나오는 왕할머니 모습 같다. 가문의 경외를 한 몸에 받는, 성정이 서릿발 같은 한편 어린것들을 고이 품어주시는 그런 왕할머니.


  심지어 저기 멀리, 우리와 마주칠 일도 없을 만큼 멀리 사는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 그는 또 힘을 냈다. 내가 겪어서 아는 그 고통을 겪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단다. 콩고와 우간다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서도, 베트남전의 민간인 피해자들을 위해서도 그는 목소리를 냈고 주머니를 열었고 힘을 보냈다.


  그렇게 사방에 향기처럼 머물다가, 2019년 그는 제비꽃색 옷자락 흩날리며 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가고자 한 평화의 길은 아직 다 닦이지 못한 것 같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먼저 세상을 뜬 다른 할머니의 영정 사진에 대고 명복을 비는 대신 그곳에서도 우리의 싸움을 도와주라는 전령을 남겼던 걸 생각하면, 아직 신발 끈을 단단히 동여맬 필요가 있다. 아직 멀지만, 이 길은 서로를 보듬고 일으키고 다독이고 세우며 함께 가는 길이다. 이 길을 먼저 간 그의 곧은 등을 보며 발걸음을 떼 본다. 그 끝에는 평화가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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