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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Nov 11. 2019

풀란 데비Phoolan Devi

'밴디드 퀸'의 복수

  풀란 데비.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그가 나고 자란 인도에서는 강렬하게 각인된 이름이다. 풀란 데비 생전이었던 1994년에 이미 <밴디트 퀸>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웬만한 플롯으로는 명함 내밀 수 없을 만큼 영화 같고 맹렬한 삶이었다.


  풀란 데비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돈도 없고 카스트도 낮은 집에서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쉽지 않은 삶이었다. 많은 인도 가정에서는 딸이 태어나면 돈 걱정부터 한다. 결혼할 때 남편 집에 지참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참금은 단순한 '결혼 자금' 혹은 '혼수' 정도가 아니다. 액수가 어마어마해 집안 기둥뿌리를 들어먹을 때도 많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가정 폭력의 발상이 되고 있어서 그렇다.


  지참금을 더 끌어내려고 신부 가족을 협박하거나 모욕하거나 신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신랑 이야기는 너무 흔해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신부 가족은 지참금을 최대한 '제대로' 갖추려 애쓰지만, 그 노력이 꼭 미래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불합리한 부부 관계는 이미 구조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노력으로 모든 문제를 불식할 수 없다는 뜻이다. 지참금을 안 할 수도 없고, 결혼을 안 하는 것조차 인도 문화에서는 아직 선택지라고 하기 어렵다. 물론 평범하게 결혼해 잘 사는 집도 많지만, 남편 인성과 재력, 지역, 종교, 이웃들의 성격 등 촘촘한 요건 중 하나만 튿어져도 삶이 정말 괴로워질 수 있다.


  가정 폭력, 조롱, 사소한 트집을 잡아 여성을 버리는 경우, 시달리다 못한 여성이 자살을 시도하는 경우, 혹은 남성이 여성을 죽이는 일 등... “지참금 범죄dowry crime”는 유형도 다양하다. 지참금 문화 때문에 아내를 진심 다해 “배우자”로 여기기보다 “돈 갖고 들어오는 노예”로 여기는 미개한 남성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성차별에는 지참금 말고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신부 지참금이 가족 내에서 여성의 지위를 불합리하게 낮추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일이니 분명 돈이 드는 일이다. 그러나 그 말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돈을 “바치는” 모양새라는 뜻은 아니다. 그건 사람 인식 어딘가에 못된 씨앗을 하나 심는다. 그 씨앗이 꽃 피지 못하고 죽어 무사히 삶을 사는 부부도 있겠지만, 그 씨앗이 욕심을 먹고 못되게 자라 파국을 맞는 부부도 있다.


  물론 종교나 문화에 따라 지참금 없이 결혼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회 일각에서도 지참금의 폐해를 인식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와 지참금 금지법도 생겼고, 그 허점도 느리게나마 메워 가고 있다. 그러나 풀란이 태어난 20세기 중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웠던 시골 마을에서는 요원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일까? 통념과는 반대로 풀란은 지참금을 내어주며 결혼한 게 아니라 오히려 친정에 소 한 마리와 자전거 한 대를 안겨주며 결혼했다.


  의외로 이런 경우가 꽤 많은데, 이를 결혼이라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풀란네 집보다 카스트가 조금 높은 30대 남성이 자기보다 20살가량이나 어린 11살 풀란과 결혼하겠다고 돈을 냈고, 가족들은 그 돈에 풀란을 넘긴 것이다. 지참금이 적다고 살해를 당하는 일도 발생하는 나라에서, 지참금을 받는 대신 오히려 신부네 집에 재산을 내어주었으니 그 남편에게 풀란은 얼마나 낮은 존재였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풀란은 아마 어릴 때부터 강단 있는 성격이었던 것 같다. 얼마 되지 않는 땅을 두고 사촌들과 거칠게 분란을 벌인 적도 있었다. 문제는 남편이 풀란을 학대했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인 동시에 아동학대다. 풀란도 듣고 배운 가닥이 있으니 남편의 폭력을 견디려 애썼지만, 결국 몇 번이고 집밖으로 뛰쳐나갔다.


  남편은 풀란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보수적인 시골 마을에서 이는 엄청나게 수치였다. 풀란과 분란을 벌였던 사촌들은 풀란을 경찰에 신고했다. 혐의는 도둑질이었지만 사실 가문에 먹칠을 한 죗값을 치르게 하자는 생각, 풀란의 기를 꺾어 놓으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풀란은 며칠 유치장 신세를 지고 풀려났지만, 시골 마을의 눈총에서도 풀려날 수는 없었다. 풀란의 부모는 풀란의 시부모에게 연락해 풀란을 다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마땅히 다른 신부를 구할 처지도 못 되었던 시부모는 못 이기는 척 풀란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남편이 변했을 리 없었다. 풀란은 또 도망쳤다. 이번에는 더 이상 박살날 것도 없는 평판과, 그 평판에 묶여야 하는 위치에서도 도망쳤다.


  납치되었다 눌러앉은 것인지 스스로 들어간 것인지는 불확실하지만 아무튼 도적단에 들어갔다. 마음만 먹으면 싸움 같은 건 어린아이 시절부터 해온 풀란이었기에 도적단에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풀란이라는 인간을 소유의 대상으로 비릿하게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기는 왜 이리 힘든지. 도적단 두목이 풀란을 강간하려 한 것이다.


  다행히 이 이야기에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도적단의 2인자였던 비크람 말라는 이참에 두목을 죽이고 두목 자리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풀란을 연인으로 삼기까지 했으니 비크람 말라로서는 이보다 더 자리를 공고히 하는 방법도 없는 셈이었다. 이들은 곧 의기투합했고 도적단은 풀란의 전 남편이 사는 마을을 찾아갔다. 풀란은 전 남편을 직접 찔렀고, "다 늙은 남자들이 어린 여자랑 결혼하려고 들지 말라"는 엄포를 써 붙인 다음 유유히 마을을 떠났다.


  도적단에게 쓸 표현으로는 조금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들은 승승장구를 해 나갔다. 비크람 말라가 죽인 전 두목과 카스트가 같은 이들이 찾아와 도적단을 완전히 헤집어 놓을 때까지는. 전 두목은 비크람 말라보다 카스트가 조금 높았고, 이들은 그 점을 고깝게 여긴 것이다. 어느새 도적단은 카스트 대 카스트의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접전 끝에 비크람 말라는 죽었고 풀란은 납치당했다. 몇 주 간 갇혀있던 풀란은 비크람 말라와 카스트가 같은 몇 명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도망쳤다. 그리고 새로운 도적단을 만들었다.


  이전의 도적단 생활이 전 남편에 대한 복수를 제외하면 풀란의 생계 수단 정도였다면, 이제부터의 도적단 생활은 주변을 착취하던 상위 카스트를 향한 복수전, 강간당한 여성들이 가해자에게 하는 복수전의 성격도 같이 보여주었다.


  1981년 2월 14일, 누군가는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이지만 풀란에게는 복수를 전하는 날이었다. 자신을 강간했던 이들의 마을, 다시 쳐다보기도 싫었을 그 공간으로 돌아갔다. 풀란은 해당 카스트 소속 남자들을 끌어 모아 죽였다. 20여 명을 살해한 건 분명 범죄지만, 이들의 횡포에 지쳐있던 지역 주민들은 이 범죄를 두 손 들어 환영했다. 풀란을 의적으로 높이는 소리도 나왔으니 말 다 했다.


  세간을 두루 들썩거리게 만든 범죄였지만 풀란은 쉽게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도적단 세력이 약화되고 건강도 많이 상하자, 풀란은 놀라운 강수를 둔다. 자수를 한 것이다. 그것도 조건을 내건 자수였다. 자기네 동네 경찰은 못 믿겠으니 옆 동네 경찰서에 자수를 하겠다고 관할서까지 직접 골랐다. 도적단 전원에게 사형 혹은 8년형 이상은 선고하지 말 것, 땅을 줄 것, 자수하러 가는 장면을 자신의 가족이 보게 할 것. 무능한 경찰로 찍히기보다는 거래를 하는 게 나았기에 정부는 이에 응했다. 자수하는 순간까지도 풀란은 “밴디트 퀸”이었다.


  물론 그간의 행적이 워낙 화려해 감옥 생활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 정도 복수극만 해도 이미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데, 출소 2년 후 풀란은 또 한 번 놀라운 변신을 했다.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하층민들의 지지를 워낙 많이 받던 풀란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당선되었다. 풀란이라는 이름은 이제 범죄자가 아니라 정치인, 사회운동가의 이름이 되었다. 무기를 내려놓고 대신 권력을 잡아들었지만, 여전히 풀란은 자기에게 잔인하게 꽂혀 들던 사회적인 칼날과 싸우고 있었다.


  재선에도 성공하고 이제 정말 인생이 안정적인 세계로 들어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01년 어느 날 복면 괴한들의 총에 맞아 피살당했다. 용의자는 풀란 손에 죽은 상위 카스트 계급의 복수를 한 거라고 증언했다. 그럴 가능성도 농후하지만 음모론도 만만찮았다. 소속 당에서 풀란의 지지도가 너무 높아 죽인 거라든지 하는 이야기를 사람들은 계속해서 수군거렸다. 풀란은 마지막까지도 연출보다 더 극적인 모습만을 남기고 떠났다.



  풀란 데비는 분명 범죄자였다. 감옥에서 11년을 보냈고, 기소된 죄가 수십 가지에 달했다. 풀란의 손에 피해를 입은 사람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그러나 풀란이 단순한 범죄자라면 왜 그의 복수극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걸까? 왜 빈궁한 지역민들이 풀란을 ‘의적’으로 높였으며 하층 카스트 주민들의 표심이 풀란을 향한 걸까?


  풀란의 범죄는 결코 풀란의 행위만 놓고 볼 수 없다. 풀란의 가족들이, 전 남편이, 갱단 두목이, 그 상위 카스트 남자들이 풀란에게 저지른 범죄와 유기적으로 묶어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인도 사회 전체적으로 촘촘하게 짜여진 구조가 풀란에게 범죄를 저질렀으며, 죽든지 범죄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을 때까지 풀란을 몰아세웠다는 사실까지 보아야 한다.


  사회 구조 전체가 사람을 짓누르고 있을 때, 그 구조 안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함부로 범죄를 저질러댈 때, 그 역방향으로 저지르는 범죄'만'을 부각시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물론 범죄는 범죄다. 그러나 상대 쪽의 범죄를 보지 않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된다. 온건한 방법으로 의사 표현을 할 수는 없었겠냐는 말은 풀란의 환경에서는 어불성설이다.


   풀란은 자신을 짓누르는 환경과 끝까지 싸웠다. 카스트가 낮은 사람을, 가난한 사람을, 여성을 더 낮은 존재로 여기고 심지어 물건처럼 대하기까지 하는 사고방식과 싸웠다.


  대등해야 할 이들이 대등하지 못한 자리에 사는 세상이다. 비록 제게 날아드는 폭력을 피부로 깨달은 상황은 안타깝지만, 아무튼 풀란은 그 불공평한 구조를 파악했고 거기에 맞섰다.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싸웠고, 다른 방법을 안 후에는 그 방법으로 옮겨 싸움을 계속했다. 이런 풀란의 이름이 우리에게 던지는 바가 없다고 한다면 그는 미련하게 눈을 감고 있는 자이거나, 이 기울어진 구조에서 뭔가를 불의하게 집어먹으려는 심리를 슬쩍 감추려 부러 더 길길이 뛰고 있는 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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