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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Oct 02. 2015

신화 속 소꿉장난

 그와의 이야기를 해볼까.

그와 내가 맨몸이 되어 만나는 신화 속 시간에 대해서 말이다.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그가 두려워졌던 예전의 순간이 불현듯 떠올랐다.

우리가 혹은 내가 몸 속 저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검은 힘, 그것의 꿈틀거림을 감지했던 때였다. 나는 활자들이 세상을 구성한다고 믿는 소녀였다. 그래서 겁이 났다. 그의 목소리나 눈 너머로 무엇인가를 읽어내자 낮고 기괴한 소리를 내는 어떤 것의 기지개를 알아챘다. 하나 하나 이름붙여 묶어둔 끈과 사슬들, 오래된 성곽을 지키던 그것들이 힘없이 끊어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나는 그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름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음을 알았다. 아니 그 이름을 알 것도 같았는데 입밖에 소리 내어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웅크리고 있던 그것은 글자가 되어 생명을 부여받아 제 멋대로 날 휘두를 것만 같았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 자리로부터 멀리 도망치기로 했다. 그 목소리로부터 가장 먼곳으로 달아났다. 어쩌면 이별은 그때 일어난 것이었다.

  우리가 허물어진 성벽 너머로 다시 만났을 때,그 틈새로 서로를 알아본 그때. 버려두었던 괴물이 깨어나 울음을 주고 받았다. 끈질겼다.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끈질긴 것이다. 그 긴세월 내가 경험했던 모든 것이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작은 눈빛이나, 흘리는 작은 한 마디 사이 새어나오는 숨소리에 숨구멍이 막힌 것 같았다. 빈사 상태의 쓸쓸한 영혼이 통째로 흔들렸다. 가둬져 있던 영혼이 그의 음성을 들은 이후 내 몸을 빠져나갔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그 중간어디선가 짐승처럼 울어대고 있었다. 나는 너였다. 나는 네 몸 속에 통째로 들어가 네가 되고 싶었다.

 키스는 너와 나를 격렬하게 뒤섞어 칵테일처럼 취하게 했다. 바다처럼 출렁이는 그 물결, 그러나 아무리 입을 맞추어도 뱃속이 채워지지 않았다. 갈망은 뱃속 깊이, 뼛속 깊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날을 기억한다. 우리는 말을 할줄 모르는 아기같았다. 마지막 색깔을 거두어내자 살색의 몸만 보였다. 섹스는 담백한 것이다. 너무 단순해서 하품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피부가 만나는 그 행위 너머 자궁 안에 또다른 문이 열리면서 신화 속장면으로 건너갔다.

너와 나는 신화 속에서 소꿉 장난을 하고 있었다. 가장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서로 엄마가 되어 주고, 아빠가 되어주었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엔 하나였던 것 처럼. 우리는 신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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