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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 명희 Jan 06. 2023

우리는 동료여야 할까?

소셜섹터에서 일하는 연대강박 개인주의자의 고민

     12월이다. 회계년도가 끝나는 때에 맞춰 각종 사업은 마무리가 한창이다. 2022년의 성과로 밀어 넣어 놓아야하는 일이 산적하다. 그에 따라, 나의 요즘 주 돈벌이인 보고서 공장도 달력이 2023년을 찍기 전에, 2022년의 일로 도장 박아둬야 할 일들로 쉼 없이 돌아간다. 현실은 집 한켠에 있는 컴퓨터 앞에서 혼자 종일 종종이지만, 가상세계에서는 여럿이 분주하다. 같은 회사, 한 공간에 앉아있지 않더라도, 보고서 작업은 팀작업이다. 나 혼자 시작해서 완결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누군가의 지식과, 누군가가 발로 뛴 자료와 누군가의 경험이 혼합되어 하나로 완성된다. 또, 보고서를 쓰는 일에는 보고서 본문을 만드는 일 외에도, 보고서를 쓰는 사람들의 인건비를 챙기고 공식문서로 요건을 갖추기 위한 조율과 작업 또한 보고서 만드는 일에 들어간다. 그렇게 일하다 보면 서로 얼굴을 마주 하고 있지 않아도, 같이 MT 한 번  안갔어도, 명함에 박힌 로고가 달라도 동료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의 동료 정의는 그 보다 넓다. 동료(同僚)는 한자사전에서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보는 사람, 임무가 같은 사람이다. 나는 요즘시대에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보는 사람만 동료라고 할 수는 없으니, 좀 더 넒은 의미로 임무, 즉 미션이 같은 사람을 동료로 생각해 왔다.  또, 무릇 소셜섹터안팎에서 나와 연결지점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은 다 모두 동료 범주에 넣었다. 세상이 더 좋아지는데 보탬이 되려고 일하는 사람은 다 동료이지!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동료로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연대의 시작이 되었을까?


     나는 동료가 궁금했다. 동료를 좀 더 이해하고 싶고, 연결되고도 싶고, 그러려면 나도 보여야 겠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분주 했다. 그런 뒤에는 종종 느끼지 않아도 될 고마움과 서운함과 같은 감정을 동료에게 느꼈다. 나는 이 연결과 연대에 충실하기 위해서 분주한데, 이 관계에 여유로운 것 같은 상대를 보면서 나는 서운했다. 굳이 안봐도 되지만, 나는 굳이 왜 동료입네하면서 동료를 궁금해 하며 들춰보고, 감정의 일렁임을 만들까? 연대가 모두 사랑의 작대기를 1:1로 맞춰봐야 하는 동료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나는 내 곁에 연결된 사람들이 막연히 좀 더 많아 지길 바랐던 것 같다. 그러고는 연결은 곧 연대니까, “연대는 다다익선이지!”라고 뭉뚱그려 놓고, ‘연결’되었으면 동료, ‘동료’는 곧 나와 엄청 가까운 사람으로 그럴듯하지만 다른 뜻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일하다가 진짜 어려울 때 “이거 너무 하지 않아?” 또는 “나 힘들어.” 라고 이야기 꺼내거나, “나 이거 잘했지 않아요?” 자랑은 아닌데 칭찬받고 싶을 때 솔직히 이야기 할 수 있고, “앞으로 무얼하면 좋을까?” 고민을 털어 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몇 안된다. 그 몇 안되는 사람들 덕분에 나는 매년 별 탈없이 맡을 일들을 매듭짓고, 다시 이어가며 ‘잘’ 해오고 있다. 그 사람들에게서 세세하고 사려깊은 인정을 받고, 솔직한 의견을 들어가며 내가 어디쯤 왔는지, 잘못된 것은 없는지 방향을 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소중한 관계가 오래 지속되는 걸 보면, 나도 그 사람들에게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거면 되었다. 그런데도 내가 매번 좀 더 많은 사람과 동료처럼 연결되고 자 에너지를 썼던 것은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기 보다,  동료라는 “관계”에 욕심부렸던 것 같다. 


     왜인지 가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감각은 나의 두려움과 닿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사람을 이롭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한다는 분야-소셜섹터에서 일하면서 은연 중 사람과 상황의 맥락을 자르고, 이해가 없는 것을 무식함 또는 무지함이라 학습했다. 그리고, 누구를 알고 그사람의 무엇을 세세히 기억하며, 잘 대하려 애쓰고, “마리는 좋은 사람이야”  라는 말을 듣는 것이 달았다(so sweet!).  소셜섹터에서 일해서 그런 강박이 생겼다면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럼 뭐란 말인가. 곰곰 생각해 보니, 이미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다는 자기 긍정이 더 필요했던 것 아닌 가 싶다. 내가 상황이해에 어둡고, 다른사람의 감정을 헤아리지 못한다는 평을 들을까 두려웠다. 연대라는 이름으로 부렸던 관계에 대한 욕심을 놓는다. 


충분하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가까운 동료는 필요하다. 아직 나의 가까운 동료가 없다면 그를 먼저 만들겠다는 마음을 숨기지 말고, 노력하면 좋겠다. 그 보다 먼저, 나 자신이 동료할 만한 사람인 지 진단해 보자.


#가까운 동료 사이 ≠ 셀렙-팬 사이

SNS에서 누군가의 행복한 생일이, 아기의 첫걸음마가, 반려견의 사망소식이 한 순간 마음을 끌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서로 오고감 없이, 내가 계속 상대 개인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 입장이라면 피곤하다. 그런데도 마음을 다잡아, 몇 번은 읽고, 그걸 기억하려고 한다. 솔직히 나에게는 맛집정보, 읽으면 좋을 책, 영화 소개가 더 소중한데 상대의 글에 일일이 반응한 건, 상대방에 대한 나의 노력이다. 그리고 내 욕심도 맞다.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그러다,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반응하려 노력했던 사람이, 나에 대한 상황이해가 없거나 내가 어떤 사람인 지 모를때,  그 활동이 피로해져 조용히 안녕을 고하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인 경우도 생긴다. 나에 대한 생각과 친절이 넘치는데, 정작 내가 그 친절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도 어김없이 안녕하게 된다.  SNS로 빗대었으나 현실 세계에도 대입이 될 이야기이다. 동료사이의 디테일한 감정을 챙기고 상황을 헤아리는 노력은 기브앤테이크(give & take) 쌍방향이다. 이 '동료주파수'가 맞는 것은 운명인 것 같다. 가까운 동료로 삼고 싶은 사람을 잘해주려는 노력보다, 동료주파수가 맞는 지 살피고, 안맞는다면 상대를 탓하거나 자책하지 말고, 다른 동료를 찾아 떠나자. 동료주파수가 안맞는 사람도 다른 인연으로는 좋은 사람일 수 있다. 신기한 건, 살면서 내 컨디션에 따라 내가 동료와 맞추는 허용 주파수대라 넓어지기도, 좁아지기도 한다는 것.

어떤 존재든 자기 자신을 위해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자신을 챙기는 일, 창피한 일이 아니다.


#로열티(loyalty)

서로 함께 일이나 활동을 하기로 했을때, 약속한 에너지(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만큼은 꼬박 그 일에 들이는 사람과 동료하고 싶다. 나는 능력 이전에, 나의 희소재인 시간을 그만큼 들여 보고서를 쓰고, 그 일에 집중해서 돈을 번다. 나 보다 더 짧게 일하고도 더 탁월한  보고서를 쓰는 작성자들도 있다. 그들은 그에 따라 돈도 명예도 더 많이 받기도 한다.  일의 종류는 여러자가지이기에 동료의 일은 꼭 눈에 보이는 것 만이 아니다. 그러니, N분의 1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동료가 되어 일을 함께 일하기로 했다면 나의 시장 값어치는 잊자. 누구에게든 시간, 돈, 노력은 희소재다. 내가 상대와 함께 약속한 에너지(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을 넣었느냐를 묻자.돈을 버는 프로젝트든 안 버는 프로젝트든 상관없이,  동료로 함께하기로 한 일을 약속대로 하냐가 중요하다. 사정이 생긴다면 그에 상응하는 진심의 보상을 하는게 맞다. 동료가 일에 진짜 에너지를 넣는지 안 넣는지, 자신의 책임을 나에게 미루는 지 우리는 다 안다. 마음에 없는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로 퉁치는거 식스센스처럼 다 느껴진다. 불공정한 압력없이 함께하기로 정하고 책임을 나눈 일에서, 서로 합의한 일에 대해 성의와 노력을 다하는 것은 결과에 상관없이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 로열티이다.


#말 보다 행동

고맙고 미안한 일이 있으면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동료는 나를 신나게 한다. 팀으로 일한다고 하더라도 팀 차원이 아닌 개인인 ‘A에게’ 고맙고, 미안한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그 마음을 우리, 팀으로 뭉뚱그리지 말고, ‘A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진심 A를 위한 행동 또는 물질로 보답해줬으면 좋겠다. 꼭 A에게 직접 혜택이 가지 않아도, A가 관심있고, 사랑하는 대상이나 주제에 시간과 에너지를 써준다면 고맙겠다. 모르는 타인이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행동과 말에도 가까운 동료가 내게 하는 말과 행동에 더 예민하고, 더 서운하기도 하다. 동료는 동등한 존재다. 상황이 안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내가 더 퍼주고도 모자라지 않았나 걱정하지만, 동료에게는 동료급의 감사(appreciation)를 바란다.


#신뢰의 세월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처음에 같이 힘을 모으기로 일에 대해 건조하나마 자기가 할 일을 챙기는 사람, 약속한 기한을 맞추고, 안되면 미리 이야기하고, 답해야 할 물음에는 답을 주고, 부탁할 것은 정중히, 그리고 염치있게 요구하는 사람이 한 프로젝트를 너머 그 다음 프로젝트도, 그 다음 프로젝트도 하게 된다. 거기에 동등한 존재에게 갖춰야 할 태도와 감사가 더해져 세월이 쌓이면 한 곳에서 일하지 않아도 가까운 동료가 된다. 서로 가까워 지기 전에 동료로의 충실함을 보이는 것이 먼저다. 동료는 함께 일이나 생활의 활동을 같이 해봐야 얻게 되고, 동료관계는 어쩔수 없이 세월이 든다.


가까운 동료는 서로의 소중함을 서로가 알고, 관계의 멀고 가까움에 조바심이 없다.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그런 동료인가? 지금 자신의 가까운 동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 사람에게 어떤 마음이 드는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한 줌의 사람들만 있어도, 길을 잃지 않는다고 어딘가에서 읽었다. 한 직장, 프로젝트에서 일한대도 모두 내 동료일 필요는 없고, 내가 나에게 연결된 모든이의 동료가 되어주어야 한다는 오지랖부리지 말자. 그건 누군가의 동료가 못되는 자신의 외로움이다.

 

너, 내 동료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뉴스나 논픽션을 보며 울고 웃는다. 어떤 사람에게 닥친 끔찍함이, 함께 힘을 모아 헤쳐나가는 집단이, 지구적 재난이 보일 때 울컥하고, 나도 뭐라도 해야지 생각하게 된다. 서로의 해야할 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진지하고 신중하게 고민하고 함께가는 가까운 동료의 존재도 소중하지만, “너, 그 생각을 행동으로 바꾸지 그래? 또는 “너 이런생각은 안해봤지?”라는 듯이 어떤 장면으로, 어떤 이야기로 희노애락을 느끼게 하고 마음을 움직이며, 존경심을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마음의 움직임을 주는 존재는 순식간에 나의 결심과 행동을 뽐뿌질 하기도 한다. 너, 내동료가 아니어도 좋다.


얼마 전 영화 아바타2를 봤다. 주인공 가족은 은신처를 찾아 정글을 떠나 물의부족 마을로 왔다고 물의 부족 족장에게 솔직히 사정을 이야기 하며, 바다로 자신들의 이주를 허락해달라 요청한다. 물의부족 족장은 생판 남이고, 불편한 변화와 불길한 징조도 예상되는 지 잠시 고민한다. 그리곤 이내 주인공 가족을 받아준다. 아니 왜?! 그 결과는 어느정도 예상되는 바와 같다. 결론적으로는 물의 부족에게도 닥칠 일이었고, 해피엔딩이었으나, 그 과정에서  주인공 가족뿐 만 아니라, 물의 부족의 아픔과 희생이 있었다. 그렇다. 내가 원튼 원하지 않튼, 그렇게 지금 여기, 나와 한 시공간에 존재하며 각자의 위치에 있는 존재들은 내 노력과 상관 없이 이미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물의 부족 족장의 고심 끝 환대처럼, 그 모든 존재는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we)로 언제 소환될지 모른다. 우리 중 누군가에에 위기가 닥친다면 존재 간의 거리, 동료 여부에 상관없이 피할 수 없는 한 운명일 거다. 그러니 동료고 어쩌고 나눠 봤자 소용 없고, 묵묵히 할 일하면 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나는 어째서 동료에 대해서 이리 예민하고 쪼잔하게 짚고있는 앉았는가? 연대강박 개인주의자의 고민과 생각은 이리도 잉여롭다. 세상 의미없다. 그러나 그 잉여로움이 이렇게 글로 쓰이는 과정에서 나를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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