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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이데 전주현 Nov 03. 2023

호두까기 레몬

23.11.03 17:23 씀

어느 날 천사가 네게 레몬 하나를 주었어 

소렌토에서 나고 자란 레몬보다도 훨씬 더 큼지막한 것이었지

너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기 전 잠시만요 하고 양해를 구했어

착용하고 있던 스카프를 목에서 풀어내기 시작했지

이렇게 귀한 건 소중히 해야겠죠

너는 리투아니아 리넨으로 레몬을 칭칭 감았어

노랗고 신 열매가 순식간에 다갈색 갑옷차림의 호두가 되었지


천사는 미소를 지었고 요란스러운 작별인사 없이 사라졌어

너는 잠시동안 천사가 떠난 자리를 주시했지

그러다가 리넨 뭉치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걷기 시작했어

천사가 집에 간 것 같으니 너도 집에 갈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야


발걸음이 조심스러웠어 

발뒤꿈치 먼저 발가락은 나중에 하고 주문을 외우는 마사이족처럼

오른쪽 어깨에 맨 가방이 흘러내릴 때마다 고장 난 태엽인형처럼 점프를 했지만 리넨 뭉치 속 물건은 흔들림이 없었지 

안전했어 여전히 노랗고 여전히 소중했어


왼편에 슈퍼마켓이 보이기 시작하자 너는 고개를 돌려 가판대를 살폈어

냉장고가 보관하고 있는 재료보다 냉장고가 보관하고 있지 않은 재료 생각이 먼저 났고 

밥 생각이 절실해졌지

낮에 먹었던 딸기 스무디의 달달한 기운이 팔꿈치에 쩍 달라붙어 목 주변을 싸고돌았었는데도, 땀 기운이 제법 이었는데도, 잠깐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은 그래도 들었던가봐


스르르 열리는 자동문과 어서 오세요 하는 점원들의 인사에 너는 발걸음을 빨리 놀렸지 

두 손이 묶여 있으면 곤란하지 리넨 뭉치를 가방에 잠시 넣어두고선 이것도 저것도 하면서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아댔어 

그런 네가 멈춰 선 곳은 특가 세일 진열대 앞이었어


-- 레몬 세 개에 한 팩 1+1 -- 


레몬 할인은 드문 일인데 너는 까치발을 하고서 상품을 살폈지 레몬이 이스라엘산인지 미국산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그때 가방이 스르르 어깨선 아래로 내려왔고 리넨 뭉치가 밖으로 떨어져 나왔어

뎅 하는 소리를 내며 다갈색 갑옷이 지면과 부딪히고 다갈색 보호막이 바닥을 구르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볼품없이 벗겨져 나갔어  

너는 아차 싶었는지 까치발을 관두고 레몬을 향해 달렸어 그런데

건너편에서 쇼핑 카트를 끌고 오던 아주머니가 레몬을 못 보고서 그 노랗고 신 것을 짓뭉개고 지나갔지

어머 미안해서 어쩌지 하는 아주머니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어

호두까기로 내리친 듯한 노랗고 신 열매의 꼴은 처참했고 슬펐지만 아름다웠거든


너는 장바구니를 내팽개치고 리넨으로 레몬을 다시 감싸기 시작했어

다갈색 천에 노랗지만 하얀 레몬즙이 스며들자 스카프는 병든 호두껍질처럼 얼룩덜룩해졌지

리넨 뭉치 속 물건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어 다만 이전처럼 안전하지도 않았어 

어서 오세요 하던 점원들이 성가시다는 듯 밀대를 가져와 레몬이 굴렀던 바닥을 닦으려 했어

죄송해요 제가 할게요 너는 리넨 뭉치로 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지

하얀 네모 타일과 모서리마다 채워진 실리콘 마감재에 레몬 향이 진하게 파고들었어

여전히 노랗고 여전히 소중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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