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 마을 이야기
조각가는 해안가에 도착하자마자 미리 생각해 두었다는 양 신발과 양말을 벗기 시작했어. 평소처럼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고 싶단 생각뿐이었대. 궂은 날씨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어. 갈매기와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해변을 걸으면서 악몽의 기운을 어서 떨쳐내고 싶을 뿐이었지.
‘눈을 감아야 더 잘 보이는 게 있기도 하지만.’
조각가는 쓸쓸하게 맨발을 내디뎠어. 폭풍전야의 빗방울이 한창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지. 맨발을 때리는 물의 타격감이 더 잘 느껴졌어. 한층 무거워진 빗방울에, 한층 무거워진 맨발. 폭풍 기운으로 푹 젖어 있던 모래사장이 거칠게 짓눌렸어.
‘눈을 감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도 있구나.’
조각가는 악몽을 꾸었던 날을 다시 떠올려 보았어.
꿈속에서 피투성이 갈매기를 보고 비명을 질렀지. 그렇게 현실로 돌아왔어. 가장 먼저 작업실에 깊게 침투해 있던 폭풍우의 흔적을 보았지. 열어 둔 창문 틈으로 들어온 빗물이 여기저기 튀어 있었어. 갈매기가 몸을 웅크리고 자는 탁자 위에도 물이 흥건했지. 잠결에 맞은 비에 놀랐는지 녀석은 자리를 이탈해 있었어. 꿈은 꿈으로 그쳐야 하는데, 막상 눈앞에 있어야 할 갈매기가 보이질 않자 괜히 성질이 났대. 꿈이 현실에서도 이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었대. 그러자 생전 입에 담지 않던 호칭으로 갈매기를 찾았지.
“이놈의 새가 어디로 간 거야!”
조각가는 침대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작업실 불을 켜러 갔지. 조각가가 그렇게 걷는 건 갈매기를 만난 이후로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었어. 갈매기 마을에선 그저 예의 바른 청년, 외지에서 온 예술가로 통했기 때문이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늘 갈매기가 근처에서 같이 걷고 있었으니, 성큼성큼 거칠게 걸었다간 갈매기를 밟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걸었던 것도 있었고. 그런데 악몽은 사람이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잖아? 그런 사건은 대개 사람을 무모하게 만들지. 그 사람의 조심성을 앗아가고 불안감은 키우지. 조각가라고 예외는 아니었어. 악몽이라는 사건과 그로 인한 습관의 부재는 결국 사고를 낳았지. 갈매기를 찾아 조각가가 작업실 스위치 쪽으로 바삐 걸어가는 도중에 무언가 발에 턱 걸렸어. 하지만 조각가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 무언가를 확인도 하지 않고 밟고 지나갔지. 그때 소리가 들렸어.
“꾸르.”
조각가가 밟은 건 갈매기였어. 갈매기의 왼쪽 날개, 어깻죽지에서 바깥쪽으로 각도가 조금 틀어져 있는 관절 부분, 위용 넘치는 비행 자세를 완성해 주던 딱 그 부분이었지. 조각가는 갈매기를 보고 내질렀던 자신의 감탄사를 밟은 거나 다름이 없었지. 감탄을 부러뜨렸어. 감탄이 부러졌어. 조각가는 두 번째 비명을 질렀어. 악몽에서 깨어날 때가 첫 번째, 그리고 현실에서 깨어날 때가 두 번째. 울부짖었지.
“왜 거기 있었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구석진 바닥에서 자고 있던 갈매기를 꾸짖었어. 그렇게 해서라도 방금 갈매기를 망가뜨린 게 자신이란 걸, 부끄럽게 생각하던 자신의 발이라는 걸 잊고 싶었지. 그런데 갈매기는 말이야, 조각가를 향해 울부짖지도 않았어. 날개가 밟히고 부러져 피가 나기 시작했는데도 평소처럼 조각가의 눈을 보며 자신의 눈을 깜빡이고 차분히 울음소리를 낼 뿐이었지. 조각가가 하는 행동에는 이유가 있겠거니 하면서 조각가를 신뢰하고 있었어. 평소 갈매기가 그런 눈빛을 보내왔더라면 조각가는 자신을 잘 따른다고 흐뭇해했겠지. 하지만 갈매기가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았을 때도 평소처럼 행동하자 심통이 났어.
“녀석아, 너를 다치게 한 사람에게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아 해!”
조각가는 갈매기를 안지도 만지지도 못한 채 한동안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지.
“꾸르.”
갈매기는 그런 조각가의 곁으로 다가왔어. 피 묻은 날갯죽지는 예상치 못한 상처로, 불규칙적으로 움찔거렸지.
조각가는 두 눈을 뜨고 어둠이 깔린 바다를 둘러봤어. 하늘이 성나 있어서 그렇지 물의 움직임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 파도가 육지의 것을 쓸어가고 육지가 바다의 것을 가져오고. 폭풍 영향으로 기브 앤 테이크 같은 그 풍경이 조금 더 극적으로 보였을 뿐이었지. 마을 전체가 숨을 헐떡이는 것 같았어. 그렇게 생각하자 움찔거리던 갈매기의 상처 부위가 떠올랐지. 악몽의 잔향이 바닷물에 스며들어 조각가를 강하게 때렸어. 조각가는 고개를 떨구고 시퍼레진 맨발을 관찰했지.
‘그렇게 울퉁불퉁하고 보기 싫더니. 결국 갈매기를 꾀어내고는 밟아버렸구나.’
마음이 복잡했어. 조각가는 다시 두 눈을 감았어. 그리고 믿거나 말거나 선 채로 정신을 잃었어. 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지. 맨발 차림이 되기 전 모래사장에 뉘어놓았던 장우산 하나가 모래 위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