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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EZ Jul 12. 2023

3. 신과 함께

불교의 신들

 영화 ‘신과 함께’가 개봉한 지 벌써 5년가량 되었다. ‘신과 함께’는 네이버에서 꽤 길게 연재되었던 주호민 작가의 웹툰이 원작이다. 어딘가 빈듯한 그림체와 상반된 꽉 찬 스토리에 감동을 받아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영화화가 확정이 되었다는 기사를 봤을 때 당시의 CG기술로 그 신화적 세계관을 과연 자연스럽게 구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미묘한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개봉 뒤 며칠이 지나지 않아 천만 관객을 넘고 해외까지 수출되는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신과 함께라는 제목에서도 드러나듯이 한국의 신화나 전래동화에 관련된 책을 한 번이라도 읽어보았다면 이름을 기억할 만한 신들이 대거 등장한다. 성주신과 측신을 비롯한 가택신은 물론이고 바리공주와 할락궁이 등등. 그런데 이 신중에 불교에서 유래한 인도 출신 신들이 있다.


 일단 신과 함께의 기본적인 세계관 - 사람이 죽으면 죄를 심판받고 죄의 여부에 따라 환생을 할지, 지옥에 떨어질지- 은 힌두교의 세계관과 비슷하다. 불교의 경우 힌두교의 전신인 바라문교(브라만교)를 부정하면서 나온 종교이므로, 세계관 자체가 유사한 것이 많다. 사자(死者: 죽은 사람)는 본인이 생전에 지은 죄(업, 까르마)에 따라 염라대왕(힌두교 저승의 신 야마)을 포함한 7명의 신에게 심판을 받고 육도 윤회(중생이 태어나서 살다가 죽고 나면 생전의 행보에 따라 지옥도, 아귀도, 축생도, 수라도, 인간도, 천상도로 나뉘는 육도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를 거친다. 심판을 받을 때 업이 없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천국으로 가기도 한다. 이 신들은 바라문교에서 불교로 흡수되어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대웅전에 예배를 하고 신중단에 반야심경을 외며 그 신들이 같이 해탈하길 기원하는데, 이 신들이 바라문교에서 넘어온 신들이다.

 망자를 심판대로 인도하는 저승차사들 말고도 여러 대왕들 앞에서 사자를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등장한다. 이 부분이 대승불교의 특이점이다. 힌두교는 전생에서 이어진 모든 업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카스트 제도가 불리함에도 전생의 업이라 하여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불교는 업이 있는 것을 깨닫고 행동을 바꿈으로써 윤회의 고리를 깨고 해탈로 이르는 게 목표이다. ㅏ개ㅁ인도를 비롯한 상좌불교에서는 윤회의 고리를 깨는 것이 철저히 개인이 수련하여 깨닫는 것에 달려있지만, 대승불교를 받아들인 한국은 지옥의 중생을 구원하는 ‘지장보살’이라는 존재가 있다. 현생에서도 심판대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지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서 사자는 얼마나 변호가 필요할까! 신과 함께에서는 그런 사자를 위한 변호인을 키우는 학교를 지장보살이 운영하고 있다.(원작 웹툰 기준) 불교의 세계관에서 지장보살은 스스로는 이미 깨달아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지옥으로 들어가 마지막 중생까지 구원하겠다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러한 지장보살이 웹툰에서 중생을 위한 변호사를 양성하는 로스쿨을 운영하다니 그의 성정이 매우 잘 녹아있는 설정이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다면 보살은 한국에서 어떤 위치에 있을까?

 한국불교는 선택된 개인만이 수양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상좌부불교(소승불교)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깨달은 자의 모범인 보살의 존재는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보통 사찰에 가면 석가모니불 하나를 모셔놓은 것이 아니라, 양옆에 문수보살, 보현보살 혹은 약사여래와 관세음보살을 같이 모셔놓은 경우가 보통이다. 그리고 한국인이 사랑하는 관세음보살과 미륵보살, 지장보살은 따로 전각을 만들어 모셔놓거나 석가모니보다 그 보살들을 더 중요하게 모시는 사찰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실생활에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을 일컫어 보살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여자신도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도 생활에 깃들어 있다.

 부처와 보살은 신이 아니지만 한국 불자들은 중요한 시기나 통과 의례가 있을 때 가피(불보살의 자비)를 받기 위해 사찰을 간다. 예를 들어 새해 즈음에는 사찰에 가서 새해의 좋은 시작을 위해 향을 피우고, 부처님 오신 날에는 하늘을 빼곡히 메운 색색의 연등아래 가족의 이름을 달아 행복과 안녕을 빈다. 자녀의 수능 100일 전부터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나 관을 쓴 불상에 찾아가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한 기도를 한다. 장례를 할 때에는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에 가길 바라 지장보살에게 영가를 천도하는 기도를 올린다. 뿐만 아니라 어떤 스님에게 새로 태어난 자녀의 작명을 부탁하기도 하고 사주를 보기도 하고 일이 안 풀릴 때엔 향초, 기와등을 사서 공양을 하며 기도한다.

몇 년 전부터 공중파 TV채널 중에 ‘무엇이든 물어보살’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ㅇㅇ보살이라는 점집의 무당처럼 서장훈과 이수근이 선녀와 동자의 옷을 입고 앉아 출연하는 일반인들의 고민을 상담해 주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사회에서 오랜 기간 쓰였던 보살이라는 이름을 희화한 부분이 크지만 반대로 지금처럼 심리상담과 정신 분석이 없던 시기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과 어지러운 정신을 보듬어주는 출구로써 보살의 이름을 사용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이것은 곧 자현스님이 언급했던 신통에 대한 이야기로도 이어진다. 기적은 논리적인 층위가 없이 일어나지만, 신통은 논리적 층위가 분명하지만 범인으로써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논리적 층위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과학일 필요는 없다. 심리학일 수 도 있고 법학, 철학적인 통찰일 수도 있다.


스님을 성직자라고 생각하나요?

 예전에 제주 약천사에서 우연히 스님과의 차담시간에 독대를 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불교에 대해 아주 조금 공부를 해서 간 터라 차담이 재미있었는데, 스님이 내게 던진 거의 유일한 질문이 저것이었다. 내 마음속엔 이미 답이 있는 질문이라 어떻게 하면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소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결국 돌려 돌려 한 대답은, ”부처님을 신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님도 성직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였다. 스님은 살짝 웃으면서 맞다고 대답해 주셨다.

보살에게 기도를 하고 가피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축복을 바라는 것과 같아 보일 수도 있겠다. 혹은 신을 넘어갈 수 있는 세계에서 구원을 위해 중생으로 남아있는 그들에게 신의 환상을 보는 사람들은 단순히 축복을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교는 신을 모시는 종교가 아니다. 윤회의 고리를 끊어 신의 세계도 벗어난 피안으로 가는 불교의 관점에서 보살을 신으로 모시는 것은 그들의 격을 끌어내리는 듯하다.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아직은 스스로 깨달을 때가 안되어 기복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방편이랄까. 보살에게 하는 가피를 위한 기도란 자신이 원하고 구하는 것에 대한 노력과 정진이 올바른 방향이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상담과 자기 성찰의 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 보살은 신이 아닌 삶이라는 항해에서 방향을 확인해 주는 나침반 겸 상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불자들은 기적을 이뤄주는 신을 넘어선 동반자와 마음속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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