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수업을 들었다. 인생 그래프라고 세로는 0점을 기준으로 +,-100점의 선이고 가로는 나이를 표시한다. 어느 때에 어떤 상황에 내 점수를 표시하고 연결하여 인생 그래프를 그리는 것이다. 가로선을 ‘수면’으로 보면 될까.
처음 해 본건 아니고 전에도 다른 도서관에서 해봤었는데 비슷한 듯 달랐다. 내가 겪은 상황을 시간이 더 지나자 다르게 해석했다. 다 겪어내면 시간이 주는 ‘약’이란 것을 받는 걸까.
수면에서 위로 점프하듯 올라간 시기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때였다. 당시에는 아르바이트 하랴 교육원 다니며 과제하랴 몰랐는데 지나고 나니 힘들어도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운 시간은 참 좋았다.
수면 아래로 떨어질 때는 이별의 시간이었다. 헤어짐이 힘든 것도 있었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인정해야 했을 때. 의미가 없고 지치고 어려웠다. 언제까지 지속될까도 힘들게 한 이유 중 하나였는데 끝이 있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지나고 나니 뿌듯함이 있다. 터널 저 끝 한 줄기 빛을 보고 통과해 냈구나 하는. 그 빛이 내게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었다.
약 10년 가까이 수면 위로 위로 천천히 올라와 다시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때쯤의 고점까지 올라왔다. 지금은 이게 내 일이 맞나 흔들리고 있다. 수면 위에서 찰랑거리는 물결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한다. 이런 시간의 반복이 삶인가 하며 하루하루 충실하자고 마음먹는다.
사람마다 또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수면 아래로 떨어져 수업 시간에 받은 인생 그래프의 종이에 적힌 글처럼 아픔, 고통, 슬픔 일 때, 어떻게 살지? 어떻게 극복하지? 구시렁거리며 욕도 했지만 좀 더 명확해지는 것도 있었다. 소중한 관계가 단순해졌고, 에너지는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수면 아래에서 올라오며 보냈던 시간은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결과를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뿌듯한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건 늘 현재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경향도 있지만 작고 소중한 시도를 한 내게 고맙기 때문인 것 같다. 앞으로는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서 자연 가까이에 있고 싶다. 아래로 아래로 위로 위로 어릴 적 꿈 중 하나가 해녀였는데 위로 올라올 때 소라 전복 하나씩 따서 올라온 건 아닐까 싶다.
도전
매일이 도전 같다. 게으른 나를 일으켜 세워 작업방으로 출근하고, 망치고 망치고 다음날 또 한다. 최근의 도전으로는 도서관의 작은 전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지만 작업물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초등학생이 보는 책에 일러스트 작업한 그림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어가고 싶었다. 어떤 날은 이게 무슨 의미가 있고, 내 삶에 변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책의 주인공 뿔비크를 떠올린다. 길 위를 나서야 만나고, 배우고, 느낄 수 있다.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작은 도전이 쌓이면 언젠가는 초청을 받아 전시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더라도 해볼걸 하는 후회는 없을 테니까. 그림책 <오늘의 개, 새>에 나오는 '파지 두장, 그걸 만들려고, 만나려고, 찾으려고' 오늘도 책상에 앉았다.
금방 망친 그림에서 가치를 발견하자면 발전 가능성이 큰 실력이라는 점. 다시 그려보자.
(2023.3.13)
웃음
아침에 일어나서 지금까지(오전 11시 45분) 한 번도 웃지 않았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난다. 가짜라도 웃어야 뇌가 착각을 해서 건강한 호르몬을 보낼 것 같은데. 아침 식사로 먹은 치킨, 야채수프가 맛있어서 미소 정도는 지었다. 오늘 뿐만 아니라 평일 책상에 앉아 있는 내 표정이 세상 재미없는 얼굴이라 부러 입 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주말은 조금 다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처음 가 본 동네에서 외국 여행 온 것 같다며 “까르르” 웃었다. 젊은이들은 여기서 노는구나~ 신난다 하며 만보 넘게 걷고, 먹고 이야기를 했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혼자 보내는 주말은 도심 속 자연을 찾아 나선다. 바닷가를 걸으며 파도 소리를 친구 삼아 걷는다. 그땐 속으로 웃는다. 하하하, 호호호.
웃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다. 그래서 저녁이면 예능을 틀어 놓고 같이 웃고 있는데 헛헛할 때도 있다. 내게 웃음은 자연 가까이!
(2023.3)
용기 대신 자용연스러움
처음
이십 대 후반 버스 안에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간절히 바라고 원했던 일이 성사되던 순간. 매일 보는 해는 유독 따뜻한 햇살을 쏘아 주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한 결 같은 바람은 달콤하게 시원했다. 바람은 할 결 일수 없었고, 내게만 따뜻함을 주는 해님도 아니다. 다만 점점 미화되면서 단단해지는 기억이다.
처음 일이 시작된 날이다. 그 뒤로도 일은 있었다 없었다 했고, 꿈이란 게 있어서 미울 때도 있었다. 꿈 때문이 아니라 꿈 덕분에로 생각을 고쳐가며 지금도 진행형이다. 철봉에 매달린 어린 조카의 사진을 보며 너처럼 나도 웃으며 매달릴 거야 한다.
(202303)
그림책 <우리가 보이나요?>
보이지 않는 '점'이 다시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 건 한 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어려운 상황 속, 길 위에서 친구도 만나고, 빨간 옷을 입은 그녀를 만나면 서다. 내 역할은 고정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코코가 레옹이 될 수도 있고, 길에서 만난 버려진 개가 될 수도, 빨간 옷을 입은 그녀가 될 수도 있다. 모르는 거다. 너는 멀리 있지 않다.
그리움을 꺼내보며 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구나 느끼면서 있을 때 잘하자 생각한다. 멀리가 아니고 가까이 있는 것을 소중히 대하자. 마음먹는다. (2023.7.13)
(예술로 풀어가는 마음치유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4주 차 때 선생님께서 읽어 주신 책 중 한 권이다. '너, 너의 소리'가 주제였지. 그림책 파티 '공감'이 마지막 시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