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윤 Sep 29. 2015

박氏연대기 9

제 2 부 타향

2. 가출


중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그는 외할머니집으로 내려 갔다. 


그는 외갓집에서 받은 용돈으로, 그동안 참아 왔던 불만을 해소하려는 듯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녔다.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사 먹었다. 개학이 가까워져도 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학교에 가서 그런 수모를 받는 것도 싫었고 복잡한 집도 싫었다.


개학을 며칠 앞두고 는 집으로 간다는 인사를 하고 외갓집을 나섰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그는 역전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날이 더워 돗자리를 들고 나온 사람들 때문에 시끄러웠지만 지낼 만했다.


다음 날, 그는 친구 삼촌이 영사기 기사로 있다는 제천의 영화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 삼촌에게 기술을 배워 영사기 기사가 되고 싶었다. 제천은 초행길이었지만 영화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멋진 영화 광고 간판이 걸린 영화관은 그에게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좋아하는 영화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게 가장 매력적이었다. 부푼 희망을 품고 찾아간 그를 친구의 삼촌은 매몰차게 내쫓았다.


“너 같은 녀석들이 하루에도 서너 명은 찾아온다. 아주 지겨워 죽겠다!”


그는 맥이 빠진 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득 희망을 품고 왔던 거에 비하면 비참한 심정이었다. 어느새 가진 돈도 다 떨어져 버렸다. 겨우 빵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무작정 충주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산을 몇 개 넘었는지도 잊어버렸다. 배가 고프면 근처 밭에 들어가 오이며 가지 등 닥치는 대로 따 먹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걸을 수 없을 때는 도로 곁에 주저앉아 가끔 지나가는 차를 바라다보았다. 손을 들어 태워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는 해가 지고 깜깜한 아스팔트 길을 쉬지 않고 걸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다음 날 저녁에야 그는 듬성듬성 전깃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충주 시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어릴 적 살던 신촌으로 갔다. 지금은 아는 사람 별로 없는 마을이었지만 집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허기를 달래려고 마을 뒷산에 있는 과수원에 들어가 익지도 않은 시퍼런 사과를 따 먹었다. 사과를 너무 많이 먹어 속이 다 쓰렸다. 그는 그렇게 아픈 속을 움켜쥐고 아무 데나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그는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시내를 싸 돌아다녔다. 혹시 외갓집 어른들을 만날까 걱정도 되었지만 어떤 방법이든 찾아야 했다. 그는 소방서 근처를 지나다가 중국 요릿집 유리창에 붙은 종이를 보았다.


- 배달원 구함, 숙식 제공 -


중국집은 보통 고급 요릿집으로 통했다. 음식을 배달하는 건 근래에 생긴 일이었다. 그는 ‘숙식 제공’이라는 말이 가장 반가웠다. 그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중국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여기 배달원을 뽑는다고 해서 왔는데요?”


“학생이 하려고? 배달은 아무나 못 하는데…”


“저 무엇이든 잘할 수 있어요. 시켜 만 주세요.”


“거기 앉아 봐. 지배인님! 이 학생이 배달하겠다는 데 어쩔까요?”


주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지배인을 불러 내었다. 주방에서 지배인이라 불린 흰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왔다.


“너 몇 살이냐? 너무 어려서 힘들겠는데?”


그는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인 여자가 그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너 집 나왔구나? 그래서 갈 곳도 없고…”


그는 무어라 대답을 못 하고 땅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내쫓을 것 같아 걱정도 되었다.


“지배인님, 이 학생 우선 홀에 서빙하는 거 시켜봐요. 하는 거 봐서 배달을 시키던지 하구요.”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그녀가 고마웠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중국집 배달부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홀 서빙이지만 조만간 배달부가 될 터였다. 그에게 맞는 옷이 없어 그는 오버처럼 긴 흰색 가운을 걸치고 홀에서 심부름하기 시작했다. 잠은 주방에서 일하는 형과 같은 방에서 잤다. 그는 그보다 서너 살 많아 보였는데 마치 그를 종처럼 부렸다. 방 청소는 물론이고 빨래까지 떠넘겼다. 그는 별 내색 없이 궂은일을 했다.


그가 중국집에 들어온 지 두어 달이 지날 즈음, 그동안 지배인이 하던 배달 일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는 자전거를 워낙 잘 탔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배달하는 일을 배울 수 있었다. 한 손에는 하얀 철가방을 들고 한 손으로 자전거를 타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지배인은 그를 천상 배달부라고 치켜세우며 좋아했다. 저녁이면 어깨가 다 아팠지만 자전거를 타고 이리저리 다니는 게 재미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그가 15살이 되었을 때, 그는 중국집의 능숙한 배달원이 되어 있었다. 지배인은 웬만해선 배달을 안 나가고 그가 배달을 도맡아 했다. 그를 종처럼 부리던 주방 형은 서울로 간다며 떠났다.

그렇게 생활이 안정되어 가던 어느 날, 아침부터 가게에 많은 사람이 몰려왔다. 주인을 찾아왔다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하고, 애를 업고 와 우는 아주머니도 있었다. 그는 지배인이 그들에게 둘러싸여 당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영문을 알 수 있었다. 중국집 주인 여자가 어젯밤 짐을 싸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었다. 시장통에 있는 야채가게, 미곡상, 사채업자에서부터 동네 이웃집 아주머니에게까지 돈을 빌려서는 갚지 않고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그동안 월급 대신 용돈이라며 받은 몇 푼이 다였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어렵던 시기에 그를 거둬주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게 중국집은 문을 닫았고 그의 배달부 생활도 막을 내렸다.


<계속>


이전 08화 박氏연대기 7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