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기부로 시작한 나의 두 번째 자리

전업주부에서 에세이 쓰기 강사로, 첫날의 기록

by 에스텔라





유턴할까, 그냥 가볼까


재능기부 첫 수업 날, 나는 은행나무가 줄 지어선 도로를 운전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누군가는 가을을 즐기려 여행을 떠나는 계절에 나는 집과 카페를 오가며 수업 준비에만 몰두했다. 은행나무길로 유명한 나의 동네가 관광객들로 떠들썩할 때도 나의 시선은 오직 노트북과 책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해 가을, 내가 마주한 유일한 풍경은 수업을 하러 가는 길에 스쳐 지나간 은행나무뿐이었다.


집에서 평생학습관까지는 차로 약 20분 거리. 나는 차 안에서 자기소개를 중얼거리며 연습했다.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내가 오늘은 90분 동안 말을 해야 한다. 순간 '내가 왜 한다고 했지?'란 두려움에 숨이 막혔다.

'자기소개도 잘 못하면서 무슨 수업을...'

스스로를 몰아붙이자 내 마음은 어느새 유턴을 꿈꾸고 있었다.

‘그냥 집에 돌아갈까?’

그러나 그 순간 또 다른 내가 말했다.

‘도전하겠다고, 해보겠다고 다짐했잖아. 이대로 유턴하면 너는 앞으로 집에서만 살게 될지도 몰라.’

나는 그 마음을 붙들고 핸들을 돌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10년 전, 그 복도에서


강의 장소는 낯설지 않았다. 10년 전, 신혼이던 내가 '초등 독서논술 지도자 자격증'을 공부했던 곳이었다. 수강생 스무 명 중에서 나만 신혼에 아이가 없어서 눈에 띄었고, 나는 엄마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조금은 붕 뜬 채로 공부를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고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재능기부 강사로 다시 이곳에 돌아왔다. 그것도 엄마로 살아가던 그들의 시간을 모조리 겪은 채 말이다. 그 시절 원피스와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던 그 복도를 출산 후 끝내 빠지지 않은 살과 코로나로 불어난 체중으로 다소 어색하게 걸었다. 그제야 10년 전 그 엄마들의 시선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긴장과 식은땀이 동시에 솟았다.


강의실의 첫 공기


담당자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교실을 안내받았다. 담당자는 내가 앞으로 5주 동안 수업을 할 교실을 안내했다. PPT 연결하는 법과 수업이 끝난 후 교실을 정리하는 법까지 알려준 뒤 강의실을 나갔다. 나는 우선 교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11월이지만 나는 이미 식은땀을 흘렸기 때문에 몸이 후끈거렸다. 짧은 환기 후 컴퓨터에 USB를 꽂고 그동안 공들인 PPT를 화면에 띄웠다. PPT에는 며칠 동안 밤새워 다듬은 나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고개를 화면 쪽으로 돌려 내용을 끝까지 확인하고 오늘 수강생들에게 보여줄 영상이 잘 나오는지도 확인했다.

‘나,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낯선 세계를 처음 마주한 것처럼 뿌듯했다. 그리고 혹시나 말이 막힐까 봐 프린트해 온 원고도 꺼냈다. 일주일 전부터 녹음기를 켜고 연습한 원고였다. 평소 말이 적은 내가 많은 말을 하려니 호흡이 가빠졌다. 그래서 어느 부분에서 멈춰야 할지, 어떤 반응을 살펴야 할지 펜으로 표시해 가며 고치고 또 고쳤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빈 강의실에서 나는 자기소개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었다. 그때 강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한 수강생이 수줍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 앉았다.




찰스 커트니 커란_꼭대기에서






말수가 적은 강사가 말을 많이 하면 벌어지는 일


수강생이 하나둘 문을 열고 들어와 각자 거리를 두고 앉았다. 고개를 숙여 무언가를 적거나, 주변을 둘러보며 다른 수강생들을 살피거나, 핸드폰을 보는 등 수업이 시작되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차 안에서 수없이 연습했던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앞으로 5주 동안 에세이 쓰는 법을 알려드릴 000 강사입니다. 이곳에 오신 분들은 모두 에세이라는 장르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모이셨을 것 같은데요. 짧은 시간이지만 문장과 내용이 좋은 에세이를 함께 읽고 글도 써보는 시간을 가져보려 합니다. 저는 결혼 전 서울에서 라디오작가로 일을 했었고요. 결혼 후 이곳으로 내려와 아이를 키우면서 8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금 여유가 생겨서 이렇게 재능기부 강사에 도전하게 됐는데요.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글쓰기에 도움이 될만한 에세이를 소개해 드리고 일기가 아닌 에세이를 쓰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이 낳고 처음으로 일을 하는 거라 많이 떨리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러분도 소중한 시간 내신만큼 90분 동안 수업에 집중해 주시길 바랄게요."


얼마나 연습을 했던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운 내용을 그대로 말할 수 있었다. 수강생들은 ‘8년 간 전업주부’, ‘라디오 작가’라는 부분에서 놀라는 듯했고, 그 순간 약간의 경계심이 누그러지며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계획한 대로 PPT를 열어 그날의 수업 목차와 내용을 차분히 설명했다. 대부분은 원고를 보며 말했지만, 수강생들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 미리 표시해 둔 부분에서는 잠시 멈추고 눈을 마주쳤다. 작가의 프로필은 외워두었던 터라 그 구간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에세이의 유래,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 최신 에세이 트렌드까지 이야기를 이어가다 보니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제가 평소에 말을 안 하고 살다가 갑자기 말을 많이 하려니까 숨이 차네요. 잠깐 쉬어갈게요.'


나는 고개를 돌려 마스크를 벗고 심호흡을 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헛헛한 웃음이 났다. 그 모습을 본 수강생들도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라며 오히려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들의 조용한 응원 덕분에 다시 마스크를 쓰고 다음 내용을 이어 나갔다.


실패해도 되는 문을 열다.


수업이 끝나고 수강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빈 강의실에 홀로 남겨졌다. 적막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등에 살짝 땀이 차올라 창문을 열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문득 떡볶이가 먹고 싶어졌다. 담당자에게 출석부를 건네고 평생학습관을 빠져나왔다. 나는 집 근처 분식집에 들어가 순대와 떡볶이를 시켜 말없이 빠르게 먹기 시작했다. 평소엔 매워서 손이 잘 가지 않던 그 집 떡볶이가 오늘은 유난히 맛있게 느껴졌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자 아침부터 계속 느껴지던 몸의 진동이 그제야 멎는 듯했다. 티슈로 이마와 인중의 땀을 닦으며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첫 수업 잘 마쳤어. 실수도 많이 하고 그랬는데... 어쨌든 끝까지 했어.'

'잘했네. 처음부터 잘하면 그게 이상한 거지. 수고했어, 멋지다.'


남편의 담담한 칭찬에 피식 웃음이 났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묵직한 응원이 담겨 있었다. 유턴을 하지 않고 방향만 살짝 틀었을 뿐인데 전혀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5주의 시간이 내게 두 번째 직업을 선물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집에서 혼자 일기를 쓰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 일기를 공적인 글로 꺼내, 누군가와 함께 읽고 또 함께 써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실패를 피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망설임 대신 실패의 문을 과감히 열었고 그 순간부터, 나의 두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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