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하는 글쓰기
칼칼한 고추장찌개를 먹고 싶다. 요즘 한창인 애호박을 넣어 고추장찌개를 끓여볼까. 매운 걸 잘 먹지 못하는 아이를 위해 동시에 미역국도 준비한다. 찌개 하나, 국 하나. 생각할 때는 간단할 것 같았는데 막상 하려면 분주하다. 새 반찬 하나만 만들어도 저녁 준비가 바쁘다.
냄비에 참기름 넉넉히 두르고 다진 마늘과 소고기를 넣고 볶는다. 거실에서 숙제를 하던 아이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말한다.
“맛있는 냄새가 나!”
미역까지 넣어 달달 볶다 물을 붓고 간장, 소금 간 해 뚜껑 덮고 푹 끓이기. 그 옆의 또 다른 냄비에서는 된장 고추장 풀어 넣은 애호박 찌개가 끓고 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통에 인덕션 위로 붉은 국물이 튀었다. 빨대로 물감을 불어 흩트려 뜨린 듯 자유분방하게 번졌다.
“배고파. 언제 다 돼?”
재차 묻는 아이의 목소리와 더불어 끓어오르는 냄비. 저녁 밥상이 차려지길 기다리느라 분주한 주방. 어릴 적 엄마가 밥 짓느라 소란하던 그 주방이 떠오른다.
머릿속은 영화관처럼 ‘그 주방’을 나만의 커다란 스크린 위에 플레이한다. 그런데 창문의 위치가 명확하지 않다. 부엌 입구를 기준으로 정면이었던가, 오른편이었던가. 스크린 위로 두 개의 주방이 두 개의 씬처럼 왔다 갔다 한다. 빛이 들이치는 주방과 조금 어둑한 부엌 하나. 유년 시절 첫 번째 집의 것과 두 번째 집의 것. 오가던 두 개의 씬이 서서히 오버랩되고 만다. 선명하지 않은 두 장의 이미지가 하나로 뒤엉킨다.
정면으로 창이 나고 창 밖으로 3층짜리 연립주택이 보이던 바닥에 붉은색 리놀륨이 깔린 곳이 첫 번째야. 내 안의 목소리가 말한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꽃 모양의 전등갓, 옥색의 싱크대. 식탁은 둥글었던가, 네모였던가. 자세히 들여다보려 할수록 어둠이 가장자리에서부터 침범해 들어온다. 기억하려 할수록 무너져 내리는 장면들. 모서리에서 빠르게 스며들며 이미지를 지우는 망각의 물방울.
“먹기 싫으면 먹지 말아라.”
곰탕을 제일 싫어했는데 어느 날 저녁 식탁에 곰탕이 올라왔다. 먹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면 무언가 다른 걸 줄 거라 기대했는데 아빠가 단호하게 말했다. 설마 했는데 쫄딱 굶고 말았던 그날 이후 반찬 투정을 부린 적이 한 번도 없다. 뾰로통하게 입이 나와 앉아 있던 그 식탁은 첫 번째 집의 것이다.
그 부엌에서 언니와 뽑기를 만들다가 스테인리스 국자를 새까맣게 태워버렸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던 국자를 수납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는데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말끔하게 씻긴 채 싱크대 위에 누워 있어 깜짝 놀랐던 일도 있다. 그 수납장은 어디 있었더라, 부엌이었던가 거실이었던가. 부엌 싱크대 맞은편이었던 것 같은데, 공간이 그렇게 넓었던가. 내가 작아서 그 시절의 공간은 실제보다 크게 보인다.
엄마가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던 주방은 두 번째 집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엄마는 뒷모습으로 등장한다.
“아직 계란이 덜 익었어. 잠깐만.”
다진 야채를 넣어 두툼하게 구웠던 엄마만의 계란구이는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반찬. 엄마 뒤에 있는 식탁 위로는 도시락 통 네 개가 줄지어 있다.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을 엄마 얼굴이 다시 보고 싶다. “엄마!”하고 입 속으로 불러 보아도 기억 속 엄마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 시절 밥 먹을 때 말고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부엌이다. 언젠가 거기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엄마는 거기서 어떤 외로움의 시간을 보냈을까. 그때는 알아챌 수 없었던 걸 이제야 궁금해한다. 엄마도 부엌 창 앞에서 울음을 삼킨 날이 있었을까.
"설거지는 놔두고, 가서 공부나 해라."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딸들을 부엌에서 밀어 냈다. 딸들이 부엌일 같은 건 영영 모르길 바랐을 것이다. 부엌에서 멀어지는 삶을. 당신의 딸들은 부엌 창 앞에서 울지 않기를 바라 그곳에서 온종일 홀로 싸웠는지 모른다.
저는 우리가 읽었던 모든 글, 그리고 봤던 영화, 그림들까지도 예술적 가치와 상관없이 그것을 기억하려는 시도를 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자신의 역사 속에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해요. (...) 우리를 구성하는 내면의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모아야 해요.
아니 에르노, <진정한 장소> 신유진 옮김, 1984books
모서리로 스며들던 물방울이 홍수처럼 밀려 내려온다. 기억의 세부 사항이 거듭 물에 잠겨버린다.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건져 올리고 싶다. 뭐라도 적어 본다. 그러면 잃어버린 장면까지 복원하게 되지 않을까. 아니 에르노는 기억을 구원하기 위해 썼다고 했는데. 무언가에 대해 쓰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꿈에서라도 한 번만 그 부엌으로 돌아가보고 싶은 나는, 침수되는 부엌을 건져 올리기 위해 쓴다. 쓰다 보면 복원될지 모르는 기억을. 엄마와 아빠의 젊은 시절과 나의 유년기. 누군가의 세월.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존재들. 창밖으로 보았던 연립주택과 버드나무, 흙바닥과 좁은 골목과 사람들, 그리고 어떤 이야기를.
우리 집 부엌과 연립주택 사이엔 공터가 있었고 아이의 시선에 그 간격이 까마득히 멀게 보였다. 거기 선 버드나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였고 길다란 머리카락 같은 줄기를 하염없이 흔들었다. 건너편 연립주택에서는 이곳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질 것만 같았다.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상태로 창 앞에 까치발로 서 있던 소녀. 거기서 세계의 분리가 시작되었다. 나와 내 밖의 세계, 다른 삶. 타인의 삶에 대한 인식이 자랐다. 내 안에서 떠오른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의 시초.
‘기억의 원형’이라는 게 있다면 그 장면이 해당할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하도록 이끄는 원형적 기억. 지금도 길을 걷다 '버드나무'와 ‘연립주택’을 만나면 걸음이 멎는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나를 세운다. 그리움인 듯 아릿한 감각.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오래된 아파트 상가 앞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하나 있다. 3층짜리 상가 건물의 흰색 타일은 오래되어 검은 땟자국이 길게 그어졌다. 바람 불어 버드나무가 하염없이 흔들리는 날이면 그 앞에 가만히 선다. 무언가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듣고 싶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게 이미 우리 안에 있다고 에르노는 말했는데. 어디까지 기억해 낼 수 있을까. 어디까지 구원해 낼 수 있을까. 침수되는 기억을 글로 되살려낼 수 있을까.
서서히 지워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섰다. 더듬더듬떠올릴 수 있는 건 창 하나와 창밖의 버드나무와 연립주택. 뒤늦게 헤아리는 엄마가 울음을 삼켰을 날들. 애호박 고추장찌개를 끓이다 멀리까지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