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마음
아파트 단지 옆 샛길은 근처 공원으로 이어진다. 아는 사람만 다니는 좁고 호젓한 길이라 길고양이들이 은신처 삼기 좋은 곳. 거기서 흰설탕을 만난 게 언제였더라. 까맣거나 회갈색, 황갈색 고양이들이 오가던 길에 새하얀 고양이가 나타났으니 단번에 눈에 띄었다. 도도함보다 경계의 몸짓이 역력한 작은 고양이는 덤불 사이로 몸을 내밀었다가도 금세 사라졌다. 고양이 좋아하는 딸아이는 흰설탕만 보면 눈을 반짝였고 우리만의 이름을 붙여 주었듯 간식을 주고 싶어 했다.
고양이 사료와 간식을 편의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소팩의 간식을 사 도서관 근처 길고양이에게 나눠 준 적도 많다. 그런데도 집 앞 오솔길, 날마다 마주치는 고양이에게 간식을 주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로 다가왔다. 고양이를 길들이게 될 것 같아서였다.
여리고 안쓰럽고, 버려진 대상을 보면 단번에 마음이 쓰인다. 그런 대상을 향해 몸을 움직이는 건 마음만큼 자동적이지 않다. 젖어버리고 마는 나약한 마음 때문이다. 슬픔의 씨앗을 보고 마음은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다. 그러면 슬픔을 감싼 꿋꿋한 껍질이나 거기서 틔어 오를 즐거움의 싹까지 상상하지 못한다. 생각이 많은 것도 문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끝에 다다른다.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바엔 시작도 하지 말자. 서로에게 상처가 될 거야.
초등학교 2학년 즈음. 엄마가 일을 해서 집안일을 도울 이모할머니 한 분이 오셨다. 엄마는 먼 친척분이라 일러주셨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관계는 아니었던 듯싶다. 할머니와 나 사이 있었던 에피소드는 딱히 생각나지 않는데 일본에 사는 할머니의 아들이 찾아왔던 일은 잊히지 않았다. 그에게서 났던 나프탈렌 향. 그것만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다.
가족들은 일본에서 지내는데 사정이 있어 당분간 할머니만 우리와 지내게 되었다고 들었다. 가족들과 떨어져 살고 있는 할머니, 엄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들. 그는 스물이 넘은 청년이었지만 엄마 없이 산다는 사실로 어린 내 시선에 애잔함이 덮였다. 더군다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삐쩍 마른 몸에 핏기 없는 하얀 얼굴을 하고 도수가 높은 안경을 써 누가 봐도 안쓰러워 보이는 외모였다. 그에게선 나프탈렌 냄새가 났다. 서랍 깊숙이 잘 입지 않는 옷에 밴 나프탈렌 냄새.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 쌓이는 낯선 향. 병원 냄새 같기도 했다.
그의 한국말은 어눌했고 행동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첫날 부모님이 “편하게 지내라”라고 말을 전했지만 할머니가 지내는 작은 방에 멀뚱히 혼자 앉아 있는 게 전부였다. 크지 않은 집에 식구가 많기도 했고. 동생들은 너무 어리고, 언니와 나는 사춘기를 향해가는 여자애들이었으니 딱히 어울릴 만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지만 살갑게 대하기도 뭣해 거리를 두었다. 할머니가 다정하게 우리를 대한 기억이 없듯, 그에게 애정을 표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그즈음 학교에서 돌아오면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누비는 게 일이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뛰어노는 걸 좋아했던 나는 자전거를 달리며 바람을 맞는 걸 좋아했다. 자전거 타기에 흠뻑 빠졌던 때엔 롤러스케이트 타기도 즐겼고. 부모님도 별일 없이 방에 틀어박혀 있는 그가 안 되어 보였는지 하루는 그를 데리고 집 근처 공원에 다녀오라고 했다. 주말 늦은 오후 동생들과 함께 그를 데리고 나갔다.
좋아하는 걸 하는 동안엔 평소보다 용감해진다. 어쩌다 롤러스케이트장에 갔는지, 입장료는 누가 내고 신발은 어떻게 신었는지, 구체적인 장면들은 다 지워졌는데 스냅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은 한 장의 기억. 그와 내가 손을 잡고 롤러스케이트장을 돌며 웃는다. 내가 그를 잡아끌고 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을 것이다. 그 순간의 기분도 기억난다. 바람을 스치며 달리는 동안엔 측은해 어려워지던 마음은 깨끗이 잊힌다. 짧은 대화를 나누며 우리는 서로를 보며 즐거워한다.
다음 날인가, 그다음 날인가 그는 떠났다. 할머니도 우리 집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 다정하게 대한 건 롤러스케이트장에서 뿐이고 집에 돌아온 순간부터 언제 그랬냐는 듯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밖에서는 서스름 없이 손을 잡고 맹랑한 꼬마 숙녀처럼 굴었는데 집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상처를 준 것 같아 어린 마음에 괴로웠다. 그와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 가까이 다가서면 안 되는 선이 있다고 느꼈다.
보이지 않는 선, 넘을 수 없는 선은 그 뒤로도 내 삶에 자주 등장했다. 돕고 싶고 다가가고 싶어 손을 내밀었다가 그만두었던 일. 결국 넘지 못한 선. 나아갔다 후퇴하거나 넘어섰다 되돌아오고 말았던. 그러느라 부끄러움이 내 안에 쌓였다.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다는, 선을 지우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돌아서고 말았다는, 누군가를 남겨 두고 떠나왔다는 자책.
백수린의 소설 <여름의 빌라>에는 레오니라는 아이가 등장한다. 부모를 따라 서구에서 온 레오니는 바닥에 집을 그리고 놀다 캄보디아 소년을 만난다. 자기 앞에 선 낯선 아이를 보고 레오니는 집의 경계선을 지우고 그 아이를 포함할 수 있도록 더 크게 다시 선을 그린다. 그 이야기 앞에서 내 마음은 크게 동요했다. 완전히 지우는 대신 움직여 보려는 시도만으로 눈부시구나 생각했다. 끝은 상관없었다. 편견 없이 즐거운 시간을 나누는 것도 괜찮았다. 선은 한 뼘 나아갔다 다시 좁혀질 수 있다. 완전히 없애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또다시 전진하고 후퇴할 것이다. 그런 시도로 서서히 커지는 세계도 있을 것이다.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나로 존재할 수 있을까. 나로 온전할 수 있을까. 타인 없이 내가 존재할 수 없듯, 나의 존재 없이 타인도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안전하게 나일 때 타인도 그로서 안전할 수 있다. 선은 완전히 지워야 하는 경계가 아니라 서로 지켜줘야 하는 보호막일지 모른다. 해변에 다다라 부서지더라도 물결의 선만은 남기는 파도와 그걸 보존해 주는 모래처럼. 커튼을 열어 빛과 공기, 소음을 들이고도 다시 커튼이 닫히면 고요히 자신으로 돌아가는 작은 방처럼. 사라지지 않지만 열릴 수 있고, 열리더라도 다시 닫을 수 있는 선. 물결처럼 스며들어 서서히 확장하는 세계, 열리고 닫히며 만들어지는 가능성의 틈새.
그러고 보니 이제야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이면서 어른스러운 척했던 나. 그러느라 다양한 면모가 있는 한 사람을 동정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았던 게 아닐까. 입체적인 한 사람을 기억 속에서 납작하게 만들었다. 후- 후-, 힘차게 바람을 불어넣자 그가 씩씩하게 일어선다. 먼 타국에서 엄마를 만나러 온 용감한 청년이 된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에서 그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이름이 뭐예요?, 취미는 뭐예요?, 어떤 음식을 좋아해요?, 서울에서 해보고 싶은 건 없어요?, 엄마를 만나서, 기분이 어때요? 궁금한 것들이 뒤늦게 떠오른다.
끝을 생각하면 무엇도 할 수 없다. 끝까지 가려하면 너무 멀거나 높아 보인다. 끝이란 무언가가 쌓여 드높아지는 상태만 의미하지 않는다. 끝이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태이기도 하다. 이미 다해서 남지 않은 상태. 가지고 있는 것을 쏟아 비워 낸 상태. 지금 이 순간 내게 가득한 진심을 쓰는 것으로도 괜찮을 것이다. 그런 가뿐함으로 무언갈 시작해도 된다. 하지 않아 후회와 미련을 남기지 말고 빛나는 진심을 제때 흘려보내자.
고양이 츄르를 주문했고 오솔길로 고양이를 만나러 간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기 전 흰설탕은 기다렸다는 듯 그 나무 아래 편안히 엎드려 있다. 처음 나와 딸아이가 다가갈 때 흠칫 놀라며 백 미터 간격을 유지하던 고양이가 이젠 칠십 미터까지 우리를 참아준다. 서로의 경계가 겹치는 지점에서 우리는 조심스럽다. 밥을 주지 않는 한낮에 우연히 마주치면 고양이 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하듯 “야옹~ 야옹~” 말을 건다. 흰설탕이 자신의 경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우리가 흰설탕을 길들일까 두려웠는데 흰설탕에게 길들고 있는 기분이다. 철이 바뀌어 해 지는 시간이 앞당겨지자 시계를 보고 헐레벌떡 오솔길로 나아간다. 다른 일로 나가지 못한 날엔 즐거운 일을 놓친 듯 허탈하다. 시간이 지나면 다른 마음이 찾아올 테지만, 쓸쓸해질지 모르지만, 지금의 마음을 충실히 쓴다. 심각해지는 대신 즐거움을 좇자. 삶의 핵심은 무거움이 아니라 가벼움에 있다는 한 철학자의 말을 떠올린다.
ps. 고양이를 기르는 지인에게 물어보니 츄르는 MSG가 많이 들어 간식으로 주더라도 많이 주는 건 좋지 않다고 한다. 차라리 사료를 주는 게 고양이에게 좋을 것 같다고. 츄르를 준다면 날마다 주지 말고 띄엄띄엄 주라는 조언을 받았다. 사료를 주문해 볼 계획이다. 물어보고 배우고 주의하면서 고양이라는 세계로 다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