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춤추는바람 Oct 16. 2024

앓던 이

상처의 발견



우리 집에는 이 빠진 컵과 그릇, 접시가 많다. 아끼느라 모셔 두는 것보다 잘 쓰는 게 낫다고 생각한 뒤로 값나가는 그릇도 평상시 식사에 사용한다. 가격을 모르는 남편 손을 따라 여린 도자기들이 거친 식기 세척기로 들어가 구르고 나오길 몇 번. 하나둘 이가 나가고 접시굽이 깨졌다. 새로운 상처를 발견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깨지고 금이 간대로 요리조리 쓰며 생활의 역사를 그릇에 새긴다. 그러면서 긴츠키를 배워 저마다의 모양에 맞게 색을 입혀 줄 날을 기다린다. 상처인 자리가 언젠가 고유한 무늬로 빛날 것이다.     


사랑니를 뽑았다. 아니, 예정대로라면 뽑아야 했는데 뿌리만 남았다. 매복된 사랑니였는데 절개해 보니 혀와 신경, 턱관절과 인접해 있었다. 무리해서 제거하는 건 위험하겠다고 의사는 판단했다. 이는 가능한 한 갈아 없애고 뿌리는 남긴 채 봉합했다고 의사는 전했다.     


사기당한 기분이었다. 엄청난 마취를 했고 그 과정에서 앞에 있던 어금니까지 뽑았는데(워낙 문제가 있던 이라 뽑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사랑니를 뽑는다고 의사가 서너 차례 힘을 주어 흔들었는데. 그 고생을 견뎠지만 정작 빼야 할 이는 뽑지 못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치과를 나왔다.      


오래 앓던 이다. 학창 시절 한 차례 발치를 시도했다 출혈이 심해 덮었던 이. 그때 봉합한 부분이 당겨 한동안 불편을 겪었다. 이가 신경 바로 위를 누르고 있어 두통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잠을 자도 찌뿌둥하고 정신이 개운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만 아는 답답함을 오래 품었다.    

 

사랑니를 뽑는 일이 무서웠지만 뽑고 난 뒤의 후련함을 기대했다. 그랬는데 이번에도 실패하다니. 언젠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데. 다시 뽑아야 할지 모르는데. 마취가 풀리면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거기에 심리적 불안이 가세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전하니 위험한 경우 뿌리 부분은 남기기도 한다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개운하지 않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몸에 남아 있는 기분이랄까. 그게 내 처지인 듯 느껴져 더 그랬다. 나아질 듯하면 문제가 생기고 괜찮다가도 불쑥 불안과 괴로움이 자라는 내 삶의 비유 같았다.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도 내다보지 않고 누워 있었다. 지혈을 위해 압박 솜을 물고 있어 말하는 것도 힘들고 성가셨다. 평소와 다른 나의 반응에 아이도 주눅이 들었는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마음은 상하고 턱 주변은 통증과 마취 기운으로 얼얼하고. 입을 꽉 다문 조개처럼 어둠 속에 혼자 웅크려 있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온전히 위로받고 싶기도 했다. 차라리 해프닝처럼 한바탕 웃어넘기는 게 나을지 몰랐다. 이미 벌어진 일, 훌훌 털어버리고 남은 상처를 잘 아물게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아이 앞으로 가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오늘 무슨 일 있었는지 알아?”

“응? 이는 잘 뺐어?”

“아니, 흑흑(과장되게 우는 시늉을 하며), 못 뺐어. 그런데 그 앞의 이를 빼버렸어.”

“(동그랗게 두 눈을 크게 뜨며) 뭐라고?”     


한참 아이 앞에서 사연을 쏟아 놓았다. 한껏 투덜거리고 징징거렸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이없고 이해할 수 없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전적으로 공감해 준 아이 덕분이다. 쏟아내니 속상함이 줄었다. 흘려보내야 하는 감정이었다. 밤엔 퇴근한 남편에게 한 번 더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앓던 이가 빠진 듯’이라는 표현이 있다. 긴 시간 속을 썩였던 일이 해결되었을 때 쓰는 말. 일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끝난 뒤의 후련함까지 담긴 표현. 힘든 일도 언젠간 끝나기 마련이라는 세상살이의 이치가 숨어 있다. 그런데도 모든 이가, 모든 문제가 거기에 해당하는 건 아닌가 보다. ‘앓던 이’라도 영영 빠지지 않을 수 있다. 평생 지니고 견뎌야 하는 일도 있다.     


두 번이나 열었다 덮은 사랑니. 내겐 오래 ‘앓던 이’ 같은 존재. 나만 아는 불편과 답답함 때문에 내 처지를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한 대상.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거나 마침표를 찍는 힘이 부족한 나. 해결을 보는 대신 붙들고 끙끙 앓는 답답한 성향. 비효율적인데도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는 어리석음과 고지식함도. 그런 나라서 바뀌지 않는 삶의 패턴이 있고 불만과 고민이 반복된다. 그 원인에 ‘앓던 이’가 있다고 생각했나. 나의 못난 부분을 이번 기회에 확 떼어낼 수 있다고 기대했나.      


다음 날 소독을 하러 병원에 들렀다. 출혈도 심하지 않고 상처가 잘 아물고 있다고 했다. 문제가 될 부분은 깨끗하게 제거했고 남은 부분은 주변으로 뼈가 차오르면서 자연스레 뼈 일부가 될 거란다. 시술 전에 필요했던 설명을 뒤늦게나마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 하소연하고 물어도 보면서 내게 닥친 상황을 수용한 상태라 상처가 잘 아문다는 말에 안도했다.     


앓던 이는 남았다. 별수 없는 일은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흘러가야 한다. 나의 답답한 성향과 부족과 불만도 하루아침에 바뀌거나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앓던 이 빼듯 단숨에 없어지지 않겠지. 오히려 이번 사랑니 시술과 비슷할 것이다. 당장 문제가 되는 부분을 잘라내면서 급한 걸 채우며 살아가겠지.      


그러다 보면 문제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고 때론 잊히고, 별일 아니지, 싶어 웃는 날이 이어질 것이다. 어떤 날은 별거 아닌 일에 또다시 투덜대고 칭얼거릴 테지만. 또다시 그럴 수 있지, 하며 웃음으로 털어낼 것이다. 일상이 흐르는 한 삶의 패턴은 반복될 것이다. 제자리걸음인 듯 어딘가로 나아가기도 할 것이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겹을 이루다 단단해질 것이다.      


문제가 없는 삶도 사람도 없다. 모두에게 앓는 이 하나쯤은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함도 덜어진다. 부족한 내가 내일을 기대하는 이유가 된다. 배우고 노력할 기회가 있으니 조금 더 나아질 나를 계속 꿈꾼다. 단숨에 바뀌거나 도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날마다 나를 다듬고 생활을 살핀다.      


가장 아픈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이 된다. 오직 나만 알고 내게만 있어 특별한 것. 내 안에는 자랑 같은 슬픔과 아픔이 몇 있고. 희미한 그 빛이 나를 어딘가로 이끌고 나답게 만든다. 그것들 없다면 내가 나일 수 있을까. 밉고 싫고 원망스럽고 부끄럽고 고통스러울지라도, 가장 나다운 것이자 마지막까지 잃고 싶지 않은 상처들. 뿌리만 남은 사랑니도 그런 아픔이 되려나.      


버리고 싶은 나는 많지만, 여러 모양의 내가 모여 삶을 다층적으로 일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도하고 망치고 회복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매듭이 연결된다. 삶은 지우고 싶은 상처에서 강하고 질긴 끈을 뿜어낸다. 깨어진 마음들 이어 거미줄처럼 촘촘한 마음의 집을 짓고 있을까. 우리 집 이 빠진 그릇들의 언젠가만큼 뿌리만 남은 사랑니의 미래가 궁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