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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Oct 30. 2024

시간의 약속

상처가 무늬가 되는 시간



해마다 이맘때면 길상사를 찾는다. 가을에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면 어김없이 생각나는 곳. 가을의 정취가 소담하게 담기는 도심의 절은 멀리 가지 않아도 계절 안에서 숨 쉬고 있다는 기쁨을 마주하게 해준다.


외출을 즐기지 않는 딸아이가 싫다고 해서 올해는 길상사 방문을 건너뛰나 했다. 놀이터나 집 근처 공원에서 뛰어노는 것만으로 충분한 아이는 엄마 아빠가 가고 싶은데만 간다고 투덜거렸다. 아이의 의견도 존중해 주고 싶어 억지로 가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번엔 남편이 아이를 꾀었다. 돌아오는 길엔 네가 좋아하는 소품 가게에도 들르겠다고 약속하면서 아이 마음을 돌렸다.


갑자기 추워지는가 싶었는데 다시 서서히 기온이 올라 포근했던 주말. 하늘은 파랗고 가을볕은 은은한 금빛을 사방에 살포시 내려 덮었다. 길상사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고 경내에 들어서는 입구부터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대웅전을 지나 오솔길로 접어드니 커다란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이 소란을 거두는 가림막처럼 내려졌다. 하늘을 향해 곧은 나무, 이쪽저쪽으로 구불거리며 자란 나무, 노란색으로 물들어가는 것, 여전히 푸르른 것, 서로 다른 나무들이 좁다란 계곡 주변으로 사이좋게 솟았다.


커다란 나무들과 시냇물, 군데군데 아담한 꽃밭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언제 가도 기분이 향기로워지는 곳이다. 누군가 날마다 여길 손질하고 정돈할 것이다. 나무들이 시원스레 팔다리를 뻗게 공간을 만들고, 작고 여린 꽃들 철마다 큰 탈 없이 고개 내밀 수 있게 살펴주고, 오솔길엔 쓰레기 하나 없이 정갈하도록 쓸고 닦고 쓰다듬는 이가 있을 것이다. 불심에서 나온 정성일지, 그저 자신의 일에 성실한 마음일지 알 수 없지만, 고요히 자기 일을 하는 누군가의 존재가 다른 이들 마음에 기쁨의 불씨를 옮겨준다. 나의 자리에서 나만의 최선을 다하는 게 결코 작은 일이 아니라는 걸 생각한다.


다리가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아이와 나무 벤치에 앉았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니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는 잎사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독특한 무늬로 뒤덮인 나무 기둥이 보였다. 허물이 벗겨진 후 딱지가 앉고 그러고 또 허물이 벗겨지고 딱지가 앉아 두꺼워진 피부처럼 상처의 흔적으로 견고해진 모습. 나무의 온몸을 뒤덮은 정교한 무늬와 비정형의 방식으로 패턴을 이루는 아우라가 숭고하게 다가왔다. 나무는 말없이 이런 이야기를 건넸다. 시간을 견디는 건 그 자체로 존엄을 입는 일. 우아하게 시간을 견딜 것. 상처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무늬가 된단다.


때가 되면 가보고 싶은 곳이 몇 군데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다. 마음이 저절로 방향을 가리키는 자리가 있다는 건. 그곳에 가면 나만 아는 작은 기쁨이 있고 그걸 떠올리면 어떤 시간은 견뎌지고, 어떤 시간은 기대가 되고, 또 다른 시간은 조금 더 힘을 내어 볼 수 있다. 신혼 때부터 아이가 어릴 적에도, 그리고 지금과 앞으로의 언젠가에 우리는 계속 여길 오겠지. 매번 지난 시절의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 서서히 잦아들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움이라는 빛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 있다는 걸 드물게 발견할 것이다.


시간의 상처가 있다면 시간의 약속이라는 것도 있을 것이다. 함께한 시간이 쌓이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서로에 대한 미움을 키우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 상처는 아물고, 미움은 연민과 애정으로 새 옷을 갈아입는다. 관계의 흉터는 무늬가 되고 패턴을 형성할 것이다. 시간은 상처를 주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접어 책갈피처럼 삶에 꽂는다. 같이 걸었던 길, 보았던 장면, 먹었던 음식, 울고 웃었던 무수한 순간들을 그렇게 또 같이 겪자고 약속을 적는다. 시간의 약속이 인생이라는 나무에 열매처럼 맺혀간다. 함께하는 삶은 약속을 키우는 일인가 보다. 말없이 곁에 있는 것으로 약속을 완성하는 일일까.


끌어안을수록 기쁘기도 슬프기도, 환하기도 어둡기도, 부풀기도 찌그러지기도, 보드랍기도 뾰족하기도 한 내 사랑, 그런데도 사랑하고야 마는 사랑. 길상사 진영각의 좁은 마루 한 귀퉁이, 작년과 같은 자리에서 작년과 아주 조금 다른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기 싫어하는 아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담겼지만, 그래서 자연스럽고 귀엽게 지금의 얼굴이 그려졌을 것이다. 그런 아이에게 나와 남편의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우리의 가장 닮은 마음이 그 순간 사진에 박제되었을까. 집에 돌아와 아이가 찍은 사진을 열어보니, 너무도 닮은 두 사람이 있다. 우리는 각자 미세하게 다른 여러 개의 모서리를 지니고 사랑이라는 곡선 하나를 함께 긋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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