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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Oct 02. 2024

소리

기쁨의 발견


문을 열자 들이치던 소리의 빛, 아침을 여는 참새 울음 같았다.


며칠 전 머리를 새로 했다. 여름내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더 이상 참아줄 수 없었다. 메말라 거칠어진 데다 부스스 부풀어 오르는 머리카락을 찰랑한 생머리로 바꾸기로 했다. 펌 시술을 받고 마지막 처리를 위해 머리에 약을 바르고 샴푸실에 누워 있었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웠는지 미용실 아저씨는 뒷정리를 시작하신 눈치였다. 닫아 두었던 문을 밖으로 열어 젖히셨다.


고요하던 실내로 문밖의 다채로운 소리가 밀려들어왔다. 가벼운 술렁거림과 낮은 웅성거림이 햇살처럼 들이쳐 침묵에 잠긴 공간을 깨웠다. 둑에서 흘러넘친 작은 도랑처럼 경쾌하게 흘렀다. 그 사이로 익숙한 노랫가락이 실려 왔다. “Can’t take my eyes off you~”  


초가을 저녁의 공기는 선선하고 바스락거렸다. 문 하나를 열어 바깥의 공기를 들였을 뿐인데 가게 분위기가 단숨에 바뀌었다. 로맨틱 영화의 주제곡으로 쓰였던 팝송이 낭만의 기운을 불어넣었고 아무런 약속이 없는데도 괜스레 설렘이 떠올랐다. 맑고 서늘한 공기 덕분일 테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문이 열리기 전과 후의 나는 아주 조금 달랐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한다는 미용실 아저씨는 요즘 집에 가는 길이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다. 가게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고 대학로까지 나가 한 바퀴 돌며 사람 구경하는 게 삶에서 가장 큰 재미란다. 날씨가 좋아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기분이 짜릿하다고.


문 밖에서 불어 드는 공기의 기운을 보아 오늘이야말로 자전거 타기 최상의 날씨일 것 같았다. 내 머리 손질만 끝나면 아저씨는 퇴근하실 거다.


“퇴근이 기다려지시겠어요!”

“네, 해가 일찍 지는 것도 좋고요.”


아저씨는 해가 길어 8시에도 훤하던 여름에는 퇴근할 때마다 자신만 일찍 퇴근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고 말씀하셨다. 퇴근할 즈음 이미 거리가 어둑해지는 가을이 되었고, 눈치 안 보고 퇴근할 수 있어 가뿐하다고. 그 말씀에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하신 분이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남들 쉬는 주말에도 문을 열어야 하는 미용실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네모난 상자 같은 작은 미용실에서 매일을 보내는 생활은 지루하고 힘들 것 같았는데, 아저씨를 버티게 한 건 자전거 타기구나. 출퇴근을 기다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누군가의 말에 내 마음까지 시원해졌다.


자전거 쌩쌩 달리며 바람맞을 일을 상상하면 출근하기 싫은 아침에도 꿋꿋하게 집을 나설 수 있었겠지. 오늘은 적당히 일하고 가게 문을 닫고 싶은 날에도, 저녁이 되어야만 만날 수 있는 후련한 바람 때문에 자리를 지킬 수 있었겠지. 후련함이란 오늘도 무사히 일을 마쳤다는 안도가 불러일으키는 바람일 테니까.


아저씨의 소박한 삶, 성실하게 일하며 작지만 크기도 한 기쁨을 꼬박꼬박 챙기는 생활이 근사해 보였다. 작지만 확실한 기쁨 하나. 그걸 챙기면 날마다 반복되는 지루한 일, 더 이상 못할 것 같다 싶은 답답한 일도 견딜 힘이 생긴다. 일과 생활의 어려움, 몸과 마음의 커디션은 오르락내리락 예측 불가하지만, 자전거 타기의 기쁨만은 변함없이 선명할 것이다.


지루한 나의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것도 ‘작지만 확실한 기쁨 하나’다. 매일 아침의 커피 한 잔, 저녁 식탁의 맥주 한 잔, 잠자리에서 아이와 같이 읽는 그림책 한 권. 마감이 끝나면 맘 놓고 읽는 책 한 권과 주에 한번 가는 발레 수업, 달에 한 번 만나는 소중한 이와의 약속. 그것들 챙기며 매일의 성실을 지킨다.


나의 성실이란 내 몫의 삶을 살고 사랑하는 일 정도일 뿐이다. 틈틈이 누군가의 기쁨을 엿보고 세계가 있는 그대로 조화롭게 아름다운 순간을 포착하고, 존재만으로 빛나는 장면 앞에 고스란하면서. 누군가의 슬픔을 모르는 척 지나치지 않고 개인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임을 기억하면서. 그걸 모아 글로 적고 서랍 속에 넣어두는 일. 그런 성실조차 흔들리는 날이 있어, 기쁨을 알약처럼 복용한다.


문을 열면 들이치는 소리의 빛, 누군가가 좋아하는 걸 말하는 목소리. 그날 내가 삼킨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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