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발견
일주일에 한 번씩 카카오톡으로 만나는 책모임이 있다. 지난주부터 모임에서는 이런 인사말이 오간다.
“많이 걸으세요.”
“가을볕을 만끽하세요.”
“가을을 흠뻑 만나세요.”
매년 돌아오는 가을이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애타게 기다렸다. 하룻 새 하늘이 높아지고 빛이 가을 톤으로 돌아섰을 때 이거야 말로 매직이구나 싶었다. 살아오면서 몇십 번 반복해 마주한 가을이지만 또다시 새롭다. 매일 아침 감탄으로 하루를 연다.
아침의 빛을 흡수하고 싶은 마음이 몸을 움직였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평소라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을 테지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공원으로 향했다. 매시간 빛은 내리지만 지금 이 순간의 빛은 유일하니까. 영원처럼 기억에 세공될 빛의 조각이나 가을의 찬란한 장면을 마주할지 모른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무엇을 하든, 그 짧은 시간이 영원을 품고 있다고.
지난여름 바닷가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날마다 하는 일이란 바다에 나가 반나절을 보내다 오는 것. 어떤 날엔 해변가 돌다리 아래서 물고기와 소라, 소라게와 꽃게를 잡았다. 얼마나 많은 생물이 바다에서 살아가는지. 작은 웅덩이 안에도 얼마나 다채로운 생물이 있는지. 우리는 매번 바다 앞에서 탄성을 자아냈다. 새끼손톱보다 작은 소라를 주웠는데 소라 안에서 달팽이처럼 생긴 생명체가 고개를 내밀었다. 색은 투명에 가까웠다. 그 작은 생물이 소라 껍데기를 지고 채집통 바닥에 붙어 느리게 움직였다.
이토록 작은 존재가 평생에 걸쳐하는 일이란 무얼까. 어떻게 자신의 삶을 소진할까. 더디고 더딘 속도로도 소진되는 무엇이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다 반문했다. 삶이란 소진해야 하는 무엇일까. 산다는 건 삶을 걸고 무언가를 해내야만 하는 일일까. 남들처럼 속도를 내고 성취에 매달려야 하는 일일까... 이처럼 자신만의 집을 이고 고작 1m를 가는 삶도 있는데. 투명하고 고요한 상태로 아무도 모르게 존재하는 삶도 있는데. 살아 있다는 건, 자신만의 크기와 속도로 움직이는 일인지 모른다. 그렇게 누구도 모르게 자기만의 방식을 만드는 일. 어쩌면 방향이나 목적, 계획 없이 움직인다는 운동성 그 자체일 수 있다. 삶이란 살아 있음 그 자체일 것이다.
구멍이 난 소라 껍데기를 주워보니, 그 안에 소라게가 살고 있다. 소라 껍데기에 몸을 숨기고 그 껍질을 보호막 삼아 움직이는 소라게. 소라껍데기 겉면에는 또 다른 따개비가 잔뜩 붙었다. 따개비들은 의도치 않게 소라게를 따라 이곳저곳으로 여행한다. 한 집에 살면서 두 존재 사이 경계는 희미해지고 태생부터 한 몸이었다는 듯 같이 움직인다. 어떤 삶은 우연히 만난 타자를 문전 박대하지 않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중간에 떼어버리지도 않는다. 너와 나라는 경계는 덧대어지고 서로에게 스며든다. 각자의 존재와 형태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끌어안을 수 있다.
한 번은 아이가 꽃게를 잡겠다고 바위 주변을 살폈다. 작은 꽃게 한 마리가 바위에 난 구멍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 아이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꽃게가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느라 한참을 앉아 있었다. 꽃게는 사냥꾼이 노리고 있다는 걸 아는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가도 잽싸게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다가도 용감하게 밖으로 기어 나왔고 재빨리 손을 뻗으면 어찌나 빠르게 도망을 치던지. 일찌감치 꽃게 잡기란 불가능하겠구나 예감했다. 그런데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햇빛이 따갑게 내리쬐는데 영영 잡지 못할 대상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아이의 쪼그린 뒷모습이 삶의 축소판 같았다. 결코 잡을 수 없는 것, 다다를 수 없는 대상을 내내 기다리는 게 우리의 숙명이라고. 꽃게를 지키는 아이를 바라보는 순간이 영원 같았다. 미동도 없이 웅크린 작은 아이의 등, 산다는 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유순한 자태.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바다 내음으로 가슴을 채웠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든, 누가 무엇을 하든, 그 짧은 시간 속에 영원을 품고 있다.”
어떤 순간은 우리 안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아이가 꽃게를 기다리던 순간, 아이의 동그란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금’은 흘러 사라질 테지만 기억 속에 오래 남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짧은 순간이지만 마음 안에서는 한순간으로 끝나지 않는 무한함을 가지고 있다고 다니카와 슌타로(<살아 있다는 것> 다니카와 슌타로 글, 오카모토 요시로 그림, 권남희 옮김, 비룡소)가 썼듯이.
흠뻑 취해 흡수하는 지금에 영원이 있다. 바로 지금, 밖으로 나가 가을빛을 만나야 한다. 짧아서 더 애틋한 계절. 언제나 가을만 같아라, 읊조리는 계절. 가을 한 조각이 문밖에서 당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