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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평범한 날을 축하해

생일이 아닌 날을 위한 케이크

by 춤추는바람




오랜만에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었다. 축하할 일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달걀을 중탕으로 휘핑하면 노란색이던 달걀이 보얗게 바뀌면서 부피가 두 배로 늘어난다. 거기에 체 친 밀가루와 녹인 버터를 넣어 가볍게 섞는다. 그걸 오븐에 넣으면 폭신한 제누와즈(시트)가 탄생한다. 겉면에 호박을 그려 넣고 싶다는 딸아이의 바람을 따라 반죽에 색소를 넣어 오렌지색 제누와즈를 구웠다.


완성된 제누와즈를 1cm 두께로 잘라 세 장으로 준비하고 생크림엔 설탕을 넣어 휘핑해 두었다. 나는 여기까지만 돕고 이후로는 딸아이가 혼자 했다. 여러 번 케이크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 아이는 순서와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시트와 시트 사이엔 휘핑한 생크림과 청포도를 채워 주었고 제누아즈를 3층으로 쌓은 뒤 케이크의 겉면을 하얀 생크림으로 뒤덮었다. 남은 생크림에 주황색과 초록색 색소를 넣어 케이크 윗면엔 호박무늬를 그려 넣었다.


휘핑한 생크림으로 케이크의 겉면을 감싸는 작업을 아이싱이라고 한다. 휘핑한 생크림에서는 무게나 질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데다 적절한 힘을 가해 빠르게 완성해야 해서 아이싱은 노련한 파티시에에게도 까다로운 공정이다. 그걸 알아 아이싱 생각만 해도 긴장하고 마는 나와 달리 아이는 아이싱 앞에서 초연했다. 슥-슥-, 시원하게 손을 움직였다.


처음엔 아이의 거침없는 움직임에 저러다 케이크가 망가지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금세 마음을 바꾸었다. 아이는 실패 따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패라는 걸 생각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과나 다음에 대한 걱정 없이 눈앞의 순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케이크 만들기에서 실패한다는 건 무얼까? 아이싱이 매끄럽게 완성되지 않는 걸 말할까? 생크림에 보기 흉한 자국이 남거나, 호박 그림이 진짜 호박처럼 보이지 않는 걸까? 그런다고 케이크 만들기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던져보니 아무래도 케이크 만들기에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만드는 동안 즐겁고 만든 후에 맛있게 나누어 먹으면 그걸로 케이크 만들기는 성공이다. 과정의 경험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즐기는 사람에게 실패는 없다. 과정에서의 경험과 배움만 존재한다. 내가 알려주거나 걱정할 필요도 없이 아이는 그걸 경험하며 배우고 있다. 아이를 보며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기준을 세우거나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는다면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실패할까 봐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대신 무엇이든 즐겁게 시도하면서 기꺼이 맛보고 싶다.


“엄마, 이제 어떡해?”라는 질문도 없이 대범하게 손을 움직이는 아이의 모습에 많이 컸구나 생각했다. 축하할 대상 없이 만든 케이크였는데 아이의 용기와 성장을 축하하기 위한 케이크였나 보다.




IMG_9134.JPG 아이가 만든 호박무늬 케이크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아이의 방과 후 활동 발표회도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딸아이는 1학년 때부터 주욱 방과 후 활동으로 방송 댄스를 배워 왔고 해마다 이즈음이면 발표회 무대에서 춤을 추었다. 많은 학생들이 모이고 학부모들도 구경하러 오는 행사라 떨릴 만도 할 텐데 아이는 내내 웃는 얼굴로 무대를 즐겼다. 작년이나 재작년에 비해 동작이 커졌고 리듬감도 잘 살렸다.


우리 아이만 성장한 건 아니었다. 방송 댄스반에는 3년 동안 같이 활동해 온 친구들이 있고 발표회를 통해 얼굴을 익힌 고학년 학생들도 있다. 그 아이들의 춤 실력도 몰라보게 늘어 있었다. 5~6학년 언니들의 춤은 방송에서 보는 아이돌의 무대와 흡사했다. 4학년 때부터 보았던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는 그사이 어찌나 춤이 늘었는지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꾸준히 무언가를 해온 아이들, 각자의 자리에서 엄청난 성장을 이룬 아이들을 온 마음으로 축하했다. 그러면서 반복이란 힘이 세구나, 일주일에 한 시간씩 한 해, 두 해 연습한 것이 모이면 엄청난 실력이 되는구나 깨달았다.


케이크를 완성하고 지난날을 돌아보니 축하할 일이 많다는 게 새삼스럽게 보였다. 축하하자고 마음먹자 일상적인 것들이 축하할 일로 다가왔다.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생일이 아닌 날(unbirthday)을 축하하는 티 파티(tea party)처럼.


날이 추워진 때문인지, 한 해가 끝나간다는 걸 실감해서인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무탈하게 또 한 해를 보냈다는 게 감사한 요즘이다. 아침에 눈을 떠 각자의 하루를 보내고 식탁에 마주 앉아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누워 아이의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다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잠드는 일이야말로 다행이고 기쁨이다. 한결같이 곁에 있는 이가 있고 날마다 아이의 밝은 웃음을 볼 수 있는 매일을 축하하고 싶다.


되돌아온 11월을 맞는 기분도 그렇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과 길었던 가을장마를 헤아리면 단풍이 짙어가는 11월이 기적처럼 다가온다. 울긋불긋 색을 바꾸어 가는 11월을 여전히 마주할 수 있음은 얼마나 축하할 일인가. 가을이 없을 거라는 숱한 말에 지지 않고 우리 곁으로 가을이 찾아와 준 일은.


11월은 한 해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이다. 하나가 하나를 만나 나란히 서거나 하나가 하나를 만나 또 다른 하나가 되어 가는 달. 나란함 곁에 포개짐의 가능성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거기다 세상의 나무들이 숨겨 두었던 자기만의 빛을 한껏 풀어내는 달이니 아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급작스레 아침 기온이 떨어졌지만 한낮에는 따사로운 가을볕이 은혜롭게 떨어진다. 그 빛에 나무들은 여름내 힘겹게 빨아들였던 녹색을 지우고 본연의 색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런 나무들 또한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잘난 척 으스대거나 뽐내지도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가을빛이 조명처럼 단풍에 닿아 나무가 지닌 색을 투명하고 환하게 밝힌다.


가을빛을 두 눈에 담뿍 담은 날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 해를 잘 살아낸 우리를 축하하고, 무탈하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축하하자고. 건강하게 곁에 있는 모든 생명을 축하하자. 꿋꿋하게 오늘을 사는 나를, 남들 모르게 정성을 다하는 나를 축하하자. 그런 순간에 빛을 받은 단풍잎처럼 당신의 얼굴도 투명하게 환하겠지. 아무래도 이 가을엔 축하할 일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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