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기억하려는 당신과 나의 오늘이 만나면
나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세계와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 모르는 사이 영향은 오고 가 누군가의 어제가 오늘의 나를 만들고, 오늘의 내가 당신의 미래를 이끌기도 한다.
최근 루시 작가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루시 작가는 춘천 대룡산 아래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그리고 만든다. 어려서부터 종이 인형을 만들어 놀고 귀여운 것을 모았던 작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단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의자, 그릇, 식물의 형태와 색이 마음을 건드릴 때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한때 자신의 작업이 피상적으로 느껴져 고민했다. 하지만 인생에 정답이 없듯 그림에도 정답이 없다는 명쾌한 답을 내렸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면을 그리고 그것을 두고두고 보는 것을 즐긴다고, 그 마음으로 계속해 나간다는 작가의 답이 깨끗하고 명랑해 좋았다.
전시에서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림에는 연둣빛 시트에 분홍색 크림을 바른 딸기 케이크 한 조각이 그려져 있었다. 하얀 케이크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 그리고 포크 하나가 있는 단순한 구조의 그림인데, 하늘색 바탕에 연보라색 커튼이 드리워진 배경 때문에 명료한 색의 대비가 리듬감을 형성했다. 핑크, 옐로 그린, 스카이 블루, 라이트 바이올렛, 가볍고 따스하고 보드라운 색감의 조합이 자연스레 봄을 연상시켰다. 그림 앞에서 나는 봄에 돋아나는 이파리와 작고 여린 꽃들, 그리고 온도가 올라 들썩이는 봄날의 대기를 상상했다. 동전 티슈가 물속에서 스르륵 풀어지듯이 내 안에 접혀 있던 봄의 기억이 나래를 펼쳤다.
입춘을 지나고도 영하의 날씨가 이어지던 날이었다. 나무들은 빈 가지로 매서운 계절을 건너는 시기, 거리에서 마주하는 건 잿빛 일색이고 아직 봄의 팔레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차례 봄을 겪은 나는 봄이 지닌 색의 향연을 기억할 수 있었다. 몸으로 통과하는 사이 봄에 대한 기억이 내 안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얼고 녹고 얼고 녹길 반복하느라 어설프고 흐릿한 2월이지만, 그 끝에 봄이 있음을 믿었다.
다가올 미래를 ‘기억한다’라고 표현한 문장을 소설책에서 마주한 적이 있다. 미래를 기억한다고 쓰인 문장에서 작은 돌멩이처럼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에 속수무책으로 따르는 대신 적극적으로 시간을 살아내겠다는 의지 같은 것. 잘 살아서 좋은 미래를 만나겠다는 다짐 같은 것. 미래를 기억한다는 말은, 나중을 위해 지금에 정성을 들이겠다는 의미로 읽혔다. 현재에 들인 정성으로 꿈꾸는 미래에 닿겠다는, 그렇게 미래를 먼저 기억하겠다는 선험적인 말로 다가왔다.
며칠 전 지인들과 인사말을 주고받다 "봄을 기억해요!"라고 전했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말과 함께 봄의 기억이 내 안에서 피어올랐다. 봄을 기억하려는 나는 기억의 힘으로 봄을 앞당겨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말은 현재에 있지 않은 가능성을 체험하게 한다고. 우리에 앞서 미래를 만난다고. 어떤 미래는 기억하려는 시도로 적극적으로 마중할 수 있다. 오래전 소설에서 읽었던 '미래를 기억한다'는 문장에 조금 더 다가선 기분이었다.
미래를 적극적으로 마중하는 일이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님을 목련에게서도 확인했다. 호기심이 동해 겨울 숲에서 목련의 꽃눈 하나를 조심스럽게 꺾어 왔던 날(소중한 눈 하나를 내어 주어 고맙다는 인사말은 잊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꽃눈을 반으로 쪼개었더니 단면으로 겹겹이 쌓인 꽃잎이 보였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 만한 공간에 한 송이의 목련이 다소곳이 몸을 모으고 잠들어 있었다.
포개어진 꽃잎으로 작은 방이 빈틈없이 빼곡했다. 털 코트 같은 겉껍질을 떼어내자 또 하나의 껍질이 나왔다. 가장 바깥의 껍질이 털옷이라면 두 번째 외투는 레인코트. 그 안으로 차곡차곡 꽃잎이 겹쳐 있는데 한 장씩 떼어내자 여섯 장이 되었다. 가장 안쪽에는 수술이 촘촘하게 돋아 고아한 향을 은은하게 퍼뜨렸다. 이대로 겉껍질을 탈피하고 꽃잎을 펼치기만 하면 되는 상태, 봄을 위한 준비는 일찌감치 끝나 있었다.
목련은 그 해의 꽃이 진 직후부터 다음 봄을 위한 꽃눈을 준비한다고 한다. 봄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봄을 위한 꽃눈을 만들고, 그걸 품고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다고. 붓처럼 생겼다고 해서 목필이라 불리는 꽃눈은 보드라운 털로 뒤덮인 코트를 입고 봄날에 만개할 연약한 꽃잎을 머금고 있다. 나무는 봄에 피어날 모습을 기억해 한겨울에도 자신 안에 봄꽃을 짓는 게 아닐까. 그처럼 정확하고 섬세한 열렬함으로, 미래를 정성껏 준비하는 목련의 기억으로 봄이 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봄을 기억해 겨울에도 꽃을 감추고 있는 목련처럼 우리도 어느 날을 위해 지금 가능성의 씨앗을 심어 보면 어떨까. 당신을 웃게 할 농담이나 작은 선물, 꽃 한 송이나 음악 한 곡, 그림 한 점, 그도 아니면, 책 한 권이나 기록을 위한 노트 한 권, 나를 위한 사소한 시작을 골라 마음에 품어 봐도 좋겠다. 그로 인해 다가올 미래가 조금쯤 달라질 테니, 이 또한 미래를 적극적으로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핑크, 옐로 그린, 스카이 블루, 라이트 바이올렛. 봄의 팔레트를 앞서 선사해 준 루시 작가의 전시회장을 나서며 연두 빛과 연한 핑크색으로 물든 산딸기 케이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림 덕분에 내 마음은 봄의 색으로 충만해졌고, 그 기억으로 심술궂은 겨울 끝자락의 추위를 통과할 여유까지 챙겼으니까. ‘봄이 온다, 봄은 이런 거지!’ 하는 기억으로 설렜으니 우리 집에도 봄의 물감 한 두 방울을 떨어뜨려 보고 싶었다.
며칠 뒤 녹차 가루를 넣어 시트를 굽고 산딸기 퓌레를 풀어 은은한 분홍빛의 크림을 준비해 케이크를 만들었다. 유리로 된 케이크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을 올리고 테이블 위, 서랍장 위에 놓고 한참을 바라보며 봄을 기억했다. 케이크를 먹자 봄의 맛까지 덤으로 따라왔다.
루시 작가가 케이크 한 조각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렸던 어제가 오늘 내게 케이크를 굽게 했다. 이 글을 읽고 당신은 내일 케이크 한 조각을 사거나 꽃봉오리가 달린 목련 앞에서 걸음을 멈출지도 모르겠다. 평소 들어가지 않던 갤러리 앞에서 머뭇거리다 문을 열 용기를 낼지도. 나의 미래란 내게만 달려 있지 않다. 적극적으로 미래를 기억하려는 당신의 오늘과 나의 오늘이 만나 어디선가 펼쳐진다. 미래라는 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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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닫고 쓰는 인생 레시피>는 격주 연재됩니다.
다음 글은 2월 24일에 발행됩니다.
읽어주시는 작가님들, 독자님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