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유난한 거예요

산딸기 피낭시에를 먹으며 나눈 대화

by 춤추는바람




바야흐로 봄.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아이는 새 학년 새 반으로 등교를 시작했다. 아이가 받아온 학사 달력을 보니 3월 넷째 주에는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다. 그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알람으로 다가왔다. 겨우내 정수리 중심으로 생긴 새 둥지 같은 흰 머리카락을 치워야 할 때라고.


“엄마가 참관 수업에 가면 좋겠어?”라는 내 물음에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응, 예쁘게 하고 와!”


예쁘게라니, 멋을 부리는데 흥미를 잃고 유행에서 멀어진 지 오래다. 인위적으로 꾸민 상태보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되 단정하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요구하는 ‘예쁘게’라는 기준에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함이 앞섰다. 잇템으로 꾸민 여자 아이돌에게 한창 빠져 있는 아이의 시선을 고려해 예쁘게 보이려면 일단 꾸며야 할 것 같은데, 갑자기 옷이나 가방, 화장품을 사는 건 내키지 않았다. 한번 입고 말 외출용 옷이라면 사양하고 싶고, 평소와 다른 색조 화장을 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교실 뒤에 서 있는 건 더더욱 싫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의 나도 학교에 찾아오는 엄마가 예쁘게 단장하고 오는 게 좋았다. 상하 짝을 맞춘 투피스를 입고 가슴께엔 반짝이는 브로치를 달고, 풍성하게 컬을 넣어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속눈썹에 마스카라까지 발라 정성껏 화장한 엄마는 특별해 보였다. 날마다 잔소리를 늘어놓던 엄마와는 어딘가 달랐고 그 모습에 은근히 자부심을 느꼈다. 그때 나의 엄마는 학교에서 단체 생활을 하는 어린 딸이 사소한 일로 주눅 들지 않기를 바라 매무새에 공을 들였을 것이다. 그건 엄마 나름대로의 관심과 사랑의 표현이었다.


애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려고 하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고 손끝 발끝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평소 같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어렵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은 노력이고 동사라는 말처럼 사랑은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에 앞서 사랑은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말하고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 우리의 말과 행동은 유난스러울 수밖에 없다. 평소와는 유별하게 티가 나야 하는 법. 어릴 적 우리 엄마의 정성에는 못 미치겠지만 나도 이번엔 관심과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마음과 몸을 움직여 보기로 했다.


우선 염색부터 하려고 동네 미용실을 찾았다. 머리를 하러 자주 들르는 편은 아니지만, 십 년째 단골이라 아저씨와는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는 사이다. 아저씨가 나의 머리카락에 염색약을 바르는 사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우리 사이를 오갔다. 최근 흥행하는 영화에서 시작해 아저씨의 아픈 허리, 두쫀쿠(두바이 쫀득 쿠키)와 마라탕, 그리고 얼마 전 근처에서 일어났던 심각한 교통사고가 연이어 화제에 올랐다. 마지막 대화에는 장례식이 등장했다.


최근 아저씨는 연이어 두 번이나 장례식장을 다녀왔다고 전했다. 한 번은 혈액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친척의 일이고 다른 하나는 친구 아버님의 장례식이었다. 앞선 친척분은 나이가 예순밖에 안 되었는데 혈액암을 진단받고 서너 달 후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셨다고 한다. 구정 즈음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러고는 몇 주 만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친구의 아버님은 연로하여 돌아가셨는데 여든이 넘은 정도라고 했다. 문득 여든을 넘기신 시아버님과 회사 일에 대한 스트레스로 잠을 자다 숨이 잘 안 쉬어질 때가 있다는 남편 얼굴이 떠올랐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고 백세 시대가 도래했다고들 하지만 주변에서 백 세까지 사는 사람을 보는 일은 여전히 드물다. 대체로 죽음은 멀고도 먼일처럼 느껴지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은 날엔 영영 먼 것만도 아니라는 사실을 불시에 깨닫는다. 이미 갑작스레 떠나보낸 이가 내게도 몇 있으니 사람 일은 알 수 없다는 아저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끝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평범한 하루가 시시하기만 하지만 죽음이라는 검고 무거운 장막이 언제든 우리 앞에 떨어져 내릴 수 있음을 기억하면 지금 이 순간이 애틋하고 소중하다. 그러면 눈앞의 현실에 새로운 빛이 돌고 흐릿하던 윤곽이 생생하게 돋아난다.


그래서일까, 어느덧 우리의 대화는 AI로 옮겨 갔지만 부정적이거나 회의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았다. 아이들의 미래에는 AI와 함께하는 생활이 당연해지지 않을까 하는 전망 뒤로 그런 세계를 보지 못할 것 같다며 아저씨는 못내 아쉬워했다. “AI가 뭐든 다 해주는 세상은 어떨까요?”라고 묻는 아저씨의 두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라며 덤덤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으니 단순한 낙관도 아니었다. 날마다 가게를 열고 닫는 아저씨의 성실한 생활을 알기에 그런 사람이 바라보는 인간이란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일을 꿋꿋이 해내고 역경을 헤쳐 나가는 존재임을 헤아릴 수 있다. 아저씨의 관점으로 인간을 믿는다면 AI와 공존하는 미래, 급격히 변화할 미래란 호기심으로 기다려볼 만한 세계가 된다.


언젠가 천문학자 심채경이 오래 살고 싶다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오래 살아서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고 싶다는 말을 들으며 무척 긍정적인 사람이구나, 좋은 쪽으로 바뀔 거라고 믿기에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체로 놀랍거나 즐겁고 신비로운 것,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면을 포함하는 대상을 궁금해하고 기대하는 법이니까. 세상에 비극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심채경 박사의 말을 들었을 때 미래를 궁금해하는 긍정성을 닮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미용실 아저씨의 호기심 앞에서 또 한 번 내 안의 긍정성을 돌아보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 기술이 더 발전하면 AI가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아 버릴 거라는 비관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혔던 건 아닐까? 내게 AI와 함께 사는 미래란 피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늦추고 싶은 미래였으니 말이다. “길거리에 사람과 AI가 같이 걸어 다니는 모습이 어떨지 궁금해요. 구별은 할 수 있을까요? 와아,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아저씨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 경이로움에 살짝 들떠 오르던 목소리를 기억한다. 아저씨가 상상하는 미래에서 AI는 인간의 친구이거나 동료, 도움을 주는 존재였고 인간과 AI가 더불어 사는 사회는 뜻밖의 조화로 즐거울 세상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상상력과 태도는 이런 걸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비관보다 기대와 호기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더 좋은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관심과 노력. 즐거운 상상력으로 긍정적인 미래를 믿어보는 일이다.


희끗희끗하던 머리카락을 말끔하게 물들이고 집으로 돌아왔다. 머리카락에 색을 들였더니 마음도 젊어졌다. 젊다는 건 변화에 유연해지는 일일 테니까. “예쁘게”라는 주문에 난감했는데, 기꺼이 움직여보고 싶었다. 관심을 기울이고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유난을 떨어보고 싶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피낭시에를 구워 티타임을 가졌다. 혼자 고민하길 멈추고 어떤 옷을 입을지, 어떻게 하면 예쁠지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다. 아이의 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청바지 입고 화장을 해(평소 화장을 전혀 안 하는 건 아닌데, 아이가 말하는 화장은 색조 화장을 의미하는 걸 테다)." 자신의 화장품을 빌려주겠다며 아이는 확신하듯(‘엄마, 나만 믿어.’) 두 눈을 크게 떴다.






평소 안 하던 걸 하려니 낯부끄럽고 손발이 오그라들 것 같지만, 사랑을 위해 유별해지는 거라면 뭐 어때. 그러니 어려울 거라고 단정 짓는 대신 묻고 상상하며 마음을 열어 보자. 가능하면 즐겁고 긍정적인 상상으로 변화하는 세대와 미래를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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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를 닫고 쓰는 인생 레시피>는 격주 연재됩니다.

다음 글은 3월 24일에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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