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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타와 성 요한 기사단

# 발레타 가는 길

by 그루

1월의 겨울 기온 치고는 섭씨 5도에서 20도를 넘나들고, 밤새 내리는 겨울비는 적절한 습도까지 유지시켜주고 아침이면 밝혀주는 쨍한 햇살까지, 이만하면 정말로 황홀한 날씨가 아닌가. 유럽에서 느끼는 적당한 무관심은 지극히 개인적인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데다가 발달된 도시의 편안함까지 있는, 중세의 봉건시대를 관통했던 기사단들의 면모를, 그중에서도 몰타에 둥지를 틀었던 '성 요한 기사단'에 대한 호기심을 풀고 가면 될 뿐, 이 매력적인 작은 섬나라를 오면서, 지도를 보면서 열심히 발품을 팔아서 돌아다니는 나의 여행 패턴은 튀니지에 모두 내려놓고 온 터였다.



발레타 Valletta


슬리에마에서 발레타행 버스를 타면 임시다 Imsida를 지나 타슈비에스Ta’xbiex, 그리고 그지라 Gzira 등을 지나 잠시,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작은 섬나라의 수도로 가는 길이 참 심플하다. 슬리에마부터 마노엘 섬을 지나 발레타까지 이어지는 해안에는 전 세계의 요트가 모여 있는지 크고 작은 정박된 요트들이 정말 많기도 하다. 실제로 요트의 등록절차와 비용이 저렴해서 전 세계 요트의 절반 이상이 몰타에 등록이 되어 있다고도 한다. 해안선의 요트들에 정신없이 눈을 빼앗기다 보면 넵튠 동상이 있는 발레타 입구 발레타 터미널에 도착한다.


슬리에마에서 발레타로 가는 길목 임시다에서



깊은 해자가 있는 발레타의 성채 입구로 들어서면 밝은 노란빛의 라임스톤의 탄탄한 성벽으로 이루어진 성채가 과연 압도할만한 위압감을 준다. 기사단은 발레타를 계획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소수의 인원으로도 공성전을 치를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였을 것이다.



발레타입구의 해자


발레타는 반듯반듯한 바둑판처럼 만들어진 계획도시로 넓은 중심대로에서 고개를 돌려 골목길을 바라보면 골목 끝에는 항상 바다가 보인다. 적의 침략을 염두에 두고 바다를 항상 보고 있어야만 했던 도시 구조이다. 대부분 좁고 휘어진 길이 특징인 몰타의 골목길은 발레타에서만은 예외이다. 어딘지 모르게 오스만 투르크를 이겨낸 자신감이 450년이 지난 지금도 밝고 반듯한 발레타의 거리에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1월의 발레타, 어디에서든 골목의 끝에는 바다가 보인다.


성 요한 기사단은 오스만 투르크와의 몰타 공방전(1565년)에서 승리한 후 이 곳 발레타로 수도를 옮긴다. 발레타는 성 요한 기사단장의 이름인 장 파리소 드 라 발레트 Jean Parisot de la Valette (1557-1568)의 이름에서 나온 이름이다. 발레트는 몰타 공방전에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막아내 로도스 공방전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술레이만 대제에게 패한 후 떠돌이 생활을 했던 성 요한 기사단을 유럽 제후들의 뇌리에 다시 각인시켰으며, 이후 유럽의 부호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재원과 기부를 바탕으로 성 요한 기사단을 몰타기사단으로 거듭나게 한 인물이다.


발레타 거리의 레스토랑 입구에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의 갑주, 옆의 고양이들이 사랑스럽다.



그는 몰타와 성 요한 기사단을 끊을 수 없는 인연으로 만들어준 인물이며 몰타인들은 수도 발레타에 그의 이름을 붙여 지금도 그의 이름을 기린다.



성 요한 기사단 Order of Saint John


시오노 나나미의 ‘로도스 공방전’을 참고하여 성 요한 기사단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예루살렘이 이슬람 세력 안에 있을 무렵, 1023년 이탈리아 아말피의 상인인 마우로가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 병원과 숙박시설을 만든 것이 성 요한 기사단의 시작이라고 한다.

성 요한을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제라르’라는 프랑스인에 의해 운영되었던 이 병원은 1096년~1099년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의 성과를 거두어 교황에 의해 성 요한 병원 기사단이란 이름을 하사 받았으며 1130년에는 교황 인토켄티우스 2세에게 기사단의 군사적 성격을 말해주는, 백 십자가가 있는 붉은색 군기를 하사 받는다.


기사단원들은 자신의 집안에서 영지와 재산과 권력을 물려받는 장남에 밀려 군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자수성가할 수밖에 없었던 중세 봉건 귀족의 젊은 자제들이었으며 수도사들이었던 성요한 기사단의 기사들은 중세 봉건제도와 봉건제도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십자군 전쟁의 산물이다.


팔레스티나의 예루살렘 라틴 왕국 시절

지금의 팔레스티나지역인 당시 예루살렘 라틴 왕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기사단은 신전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이다. 기사단들은 기부를 받아 막대해진 재산을 바탕으로 당시에는 사방이 이슬람 지역인 팔레스티나의 기독교도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세력이었다. 1291년에 시리아의 예루살렘 왕국을 이슬람 세력에게 빼앗길 때까지 약 200년 동안은 사실상 성 요한 기사단의 황금시기였다. 지금도 남아 당시 성채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보여주는 시리아의 ‘기사의 성’이라는 뜻의 크라크 드 슈발리에 Krak Des Chevaliers는 난공불락의 성 요한 기사단의 성채로 유명하다.


키프로스와 로도스 시절

기사단은 팔레스티나의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후 키프로스를 본거지로 삼는다. 앞에서는 병원을 운영하며 뒤에서는 지중해의 해적 업에 종사하면서 1309년 비잔틴 제국의 영토였던 로도스 Rhodos 섬을 무력으로 침탈하여 정복, 이로서 1310년부터 기사단은 로도스 기사단으로 활동한다.


해적 업과 고리대금업, 기부 등으로 이루어진 풍부한 재원을 바탕으로 로도스 섬에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보다 더 튼튼한 성벽을 바다를 향해 쌓는다. 어쨌든 유럽의 막강한 가문의 자녀들로 이루어진 청빈과 복종을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수도사들이었으니 실질적으로 후손들이 없는 그들에게 막대한 기부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로도스는 자세히 봐야 ‘섬’으로 보일만큼 지금의 터키 땅과 가까이 위치한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으며 1517년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영역까지 투르크의 영역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렇다면 로도스는 지중해라는 오스만 투르크의 내해에 있는 작은 점에 불과하다. 육지에서의 전투력에 비해 해군의 전력이 약했던 오스만 투르크의 바다를 제 집의 바다인양 이교도를 대상으로 한 해적질로 돈을 벌어들인다.

무슬림을 대상으로 하는 물 만난 해적질은 오스만 투르크의 콧수염을 건드리는 격이어서 1522년 8월 1일, 10만 대군을 이끈 투르크의 술레이만 대제의 공격으로 로도스 섬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자고로 견고한 성을 방어하는 데는 소수의 병력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지만 로도스를 지키는 사람들은 600명이 안 되는 기사들과 천오백 명 남짓의 용병들 그리고 참전이 가능한 로도스 주민 3000여 명이 전부였다고 하니 오스만투르크의 10만 대군으로 보일만한 병력은 술레이만 대제의 강한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그리고 몰타 시절

152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레이만 대제에게 로도스 공방전에 패한 뒤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1516년 스페인의 왕이 되었으며 1619년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포함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 유럽의 제 1 강자인 카를로스에게 돌로 이루어진 작은 몰타 섬을 양도받는다. 카를로스는 아마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을 견제하는 목적으로 기꺼이 군사적 능력이 뛰어난 성 요한 기사단에게 양도했을 것이다.


몰타공방전의 승리

1565년, 투르크군의 무스타파 파샤는 대 함대를 이끌고 몰타에 상륙한다. 만이 발달한 몰타에서 공성전이 시작된 지 4달 째, 몰타 코앞에 있는 시칠리아(당시 시칠리아는 스페인 펠리페2세의 영토였다)의 스페인 8천명의 원군이 몰려오자 투르크군은 슬그머니 포위를 풀고 물러난다. 수성을 이끌던 노 기사단장 라 발레트의 승리였다. 공방전 당시 공성전이 치열했던 비르구Birgu는 승리를 뜻하는 빅토리오사로 지칭되며 발레타는 몰타의 수도로 거듭나게 된다.


1798년 나폴레옹에게 쫓겨나 지금은 로마 콘도티 거리의 한 빌딩에 국적을 두고 있는 성 요한 기사단은 지금도 몰타에서는 골목마다 거리마다 그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살아 움직이고 있다.


빅토리오사 골목에서 만난 성 요한 십자가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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