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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 빠진 아득한 옛날의 그날처럼

# 몰타의 중심, 발레타

by 그루

1565년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을 잘 막아낸 이후 1566년부터 건축되기 시작한 발레타는 1789년 성 요한 기사단이 몰타를 떠날 때까지 살던 곳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다. 놀랍게도 유럽의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관통하는 시대의 표현이 작은 한 도시 안에 그대로 구현이 되어 있는 것이다. 통일감이 특징인 발레타 시가지는 잘 짜인 도시구조에 석회암의 일종인, 채도가 낮은 노란색의 라임스톤으로 지어져 있다. 게다가 화려한 겉모습의 건축물도 별로 없어서 목적지에 가려면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목적지 없이 걷는 발레타의 골목길은 그야말로 환상이다. 하루는 박물관을 비롯한 유적지들을 보고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다음에는 발레타의 생각보다 한적한 골목길을 걸어보면 어떨까. 내 앞으로 걸어오는 영화 속 기사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발레타지도 1.jpg 바둑판처럼 잘 짜인 발레타 시가지



국립 고고학 박물관 The National Museum of Archeology


발레타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적지다. 그중에서 자신의 호기심과 취향에 따라 볼거리가 다르지만 고고학 박물관은 평소 박물관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넓지 않아서 가뿐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몰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발레타의 성문을 지나 리퍼블릭 스트리트를 두 블록 지나면 왼쪽으로 내셔널 뮤지엄 The National Museum of Archeology이 나온다. 안내서에는 1571년 프로방스 기사단의 본부였다고 하는데 깊게 파고 들어간 파사드로 인해 바로크 건물 치고는 매우 간결해 보인다. Malta의 신석기시대(기원전 5200~2500)부터 페니키아 Pheonician 시대(기원전 8세기~6세기)까지의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서도 볼 수 없는 몰타만의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은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 비해 넓지 않지만 일목요연하게 몰타의 고대 역사를, 특히 고대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했던 페니키아 문명을 엿볼 수 있다. 유물들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역사시대까지 넘나들며, 몰타의 거석문화는 규모와 웅장함에서는 비교할 수 없지만 기원전 3100년경부터 기원전 1100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영국의 스톤헨지의 거석문화를 앞선다.


v-08.jpg 거석신전을 장식했던 스파이럴 문양


신전을 장식하는 문양으로 다양한 크기의 돌 위에 새겨진 스파이럴 문양은 파도를 상징하는 문양이다. 길게 문양을 반복해서 새기거나 단독으로 새기기도 하는데 바다를 지척에 두고 살던 몰타인들(혹은 페니키아인)에게 스파이럴 문양은 가장 친근하며 두려운 문양이었을 것이다. 제단에 새겨진 대칭형으로 새긴 완벽한 원형의 스파이럴 문양은 너무 아름다웠다. 많은 자녀들을 키워냈을 가슴을 자랑하듯 서 있는 ‘Venus of Malta’와 발레타에서 멀지 않은 파오라 지역에서 출토된 단발머리에 멋들어진 주름치마를 입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10Cm도 안 되는 풍만한 ‘Sleeping Lady’는 잠에 빠진 아득한 옛날의 그날처럼 금방이라도 부스스 깨어날 것만 같다.

venus.jpg 아마도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Sleeping Lady’


2층에는 사람의 모양을 한 관을 닮은 페니키아인이 사용했을 석관이 인상적이다. 이집트와 고대 문명을 같이 나누었던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몰타의 카라바조와 St. John's Co-Cathedral


교회의 정면으로는 원래 입장할 수 없나 보다. 정면 왼쪽의 박물관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교회는 1573년 건립한 바로크식 교회로 외부보다도, 요한 기사단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 바로크 화가였던 마티아 프레티 Mattia Preti에 의해서 완성된 화려한 내부는 다른 어떤 교회와도 비교를 거부한다. 대리석으로 마감된 교회의 바닥에는 약 400여 명의 기사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고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세속의 무게를 부디 가볍게 느끼기를 ....


v-09.jpg 본당, 입구에서



본당을 중심으로 옆에는 각 나라 기사단들의 예배당이 배치되어 있다. 천정은 ‘마티아 프레티’에 의해 어떤 교회의 천정화보다도 아름다운 성 요한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또한 1565년 몰타 공방전에서 죽어간 기사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카라바조 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1571~1610)가 1608년 그린 ‘세례 요한의 참수 The beheading of Saint Baptist’는 이 곳을 꼭 와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의 크기가 실물의 크기에 가까운 대작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서 속의 잔혹한 이야기로 성 요한의 머리를 원하는 춤추는 살로메의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게 많이 그려진 소재이다. 이 그림에는 직 간접적으로 이 사건에 연루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쟁반을 들고 있는 살로메의 시선은 이미 죽어있는 세례 요한의 머리가 잘려 나가기 직전의 모습에 몰두한다. 성 요한의 토해낸 피에는 카라바조의 붉은색 사인이 적혀 있다.

Caravaggio는 그가 태어난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라고 한다. 역사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세상의 흐름을 바꾼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이들처럼 카라바조도 미술사에서 영향력이 지대한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빛을 이용한 극적인 표현과 역동적인 구조가 특징인 바로크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로마에서 활동했던 카라바조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는지 1606년 말다툼 도중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도피를 하는 신세가 된다. 도파 중에도 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계속 그림을 그리며 살았는데 ‘세례 요한의 참수’는 나폴리로 도망쳤다가 다시 몰타로 도피했을 당시 그린 그림이다. 같은 방 안에 그의 또 다른 작품‘성 제롬’도 전시되어 있다.



아름다운 도서관


카테드랄에서 나와 다음 블록에는 멋진 발레타의 도서관 건물이 리퍼블릭 광장을 앞에 두고 햇살에 빛난다. 도서관 광장에 야외 카페라니, 이런저런 영화에서도 가끔 등장하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다. 지금은 아무리 그래도 1월의 아침시간, 야외 카페에 앉아서 차를 마시기에는 좀 춥다.

맞은편 거리 카페 간판에는 1837년이라고 훈장처럼 쓰여 있다.


v-29.jpg 영화 속의 무대로도 가끔 등장하는 몰타 도서관과 카페,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생길 것 같은 곳이다.



기사단장의 궁전 Grandmaster’s Palace and Armoury


도서관을 지나 한 블록을 더 가면 노란색의 다른 건물과는 다른 느낌의 꽤나 큰 흰색 건물이 나타난다. 무기고가 같이 있었던 기사단장의 궁전이라고 해야 하나, 반도의 끝 성 엘모 요새가 가까워서 전쟁 중에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겠다. 지금은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된다고 하는데 궁전이라고 부르니 선뜻 들어가고 싶지 않다. 궁 앞의 성 조지 광장에 앉아서, 벌써 좋아진 몰타 전통 페스추리인 파스티찌Pastizzi를 한 입 베어 물면 삐져나오는 치즈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위병 교대하는 것을 보니 좀 식상하다. 성 요한 기사단 박물관도 겸하고 있어 당시 기사들의 실생활을 느낄 수 있다.


v-28.jpg 기사단장의 궁전



드디어 Manoel Theatre


조지 광장 뒤쪽으로 난 골목으로 들어가면 몰타 국립극장인 마노엘 극장의 현수막이 보인다. 건물들이 거의 비슷해서 극장을 빨리 찾을 수 있도록 안내를 해놓은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장이라고는 위치와 규모가 매우 소박해 보이는 것이, 건물의 모퉁이에 길게 마노엘 극장이라고 새긴 모양까지도 귀엽다.

1732년에 문을 연 아담한 규모의 마노엘 극장은 공연이 없는 시간에는 극장 투어를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오전 시간에 갔을 때는 투어시간이 되지 않았는지 기다리라고 한다. 멀뚱멀뚱 시간 보내기는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들어가서 돌아보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한다.


영화 속에서 봤던 전통 바로크식 극장이 지금도 연극, 오페라, 현대 콘서트, 발레 등의 공연이 계속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조심스럽게 박물관을 지나서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오후에 공연이 있는지 리허설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무대와 가장 가까운 객석에 들어가 보니 섬세한 배우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수 있는 위치다. 공연이 자주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공연 감상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v-04.jpg 극장 내부 , 멋진 객석의 라인이 아름답다.



조지 광장에서 조금 더 걸어가면서 반도의 끝으로 가면 전쟁박물관이 있는 성 엘모 요새가 나온다. 1565년의 공방전에서 투르크 군의 엄청난 포격으로 36일 만에 무너져 성 안의 군사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요새에서 왼쪽으로 가면 슬리에마행 페리를 탈 수 있는 곳이 나오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1574년 세운 당시에 가장 시설이 좋고 현대적인 병원이었다는 성 요한 기사단의 상징인 병원(지금은 지중해 콘퍼런스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건물인 ‘사크라 인페르메리아’가 위치한다.



추모의 종 Siege Bell Memorial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희생된 7000여 명의 군인과 시민들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기념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이 작은 섬나라는 엄청난 시련을 맞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6월 11일부터 1943년 11월 20일까지 벌어진 전쟁으로 몰타는 적군이나 아군에게 모두 중요한 보급로였던 탓으로 이탈리아와 독일의 엄청난 폭격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이 승리한 전투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이 곳이 얼마나 천혜의 군사항구인지를 입증해주고도 남는다. 하지만 이 곳은 영국도 프랑스도 미국 땅도 아닌 몰타의 땅으로, 죽어간 것은 몰타의 시민들과 군인들이었다.


v-11.jpg 추모의 종



몰타는 영국의 식민지였을 당시 영국의 함대 기지였다가 2차 세계대전 때는 연합군의 해군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발레타 근처는 수심이 매우 깊을 뿐만 아니라 배를 대기에 적합한 깊은 만으로 형성이 되어있다. 그래서 대형 선박을 비롯한 잠수함 등도 진입하기에 용이하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 몰타는 이탈리아와 독일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국민들을 잃었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몰타인들에게 돌아갔다. 서방세계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었을까. 몰타는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에 잠시 연합국과 멀어지며 사회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누워있는 사람의 동상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당한 희생자를 상징한다.


v-24.jpg 추모의 종 옆으로 당시 희생자를 상징하는 동상이 누워있다. 로우 바라카 가든에서




Low 바라카 가든은 많이 걸었다면 쉬어갈 수 있는 곳으로 추모의 종을 보며 전쟁에서의 희생자들을 다시 한 번 추모할 수 있게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 1565년 몰타 공방전에서 승리한 ‘비르구(빅토리오사)’가 한 눈에 보인다.


v-19.jpg 왼쪽은 빅토리오사, 오른쪽은 센글레아가 보인다. Upper 바라카 가든에서


Low 바라카 가든에서 Upper 바라카 가든까지 걸어가는 길은 센글레아와 빅토리오사가 보이는 해안 길로 영원히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단단한 보루로 쌓인 진정한 발레타의 풍광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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