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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May 26. 2016

알제리 전투

# 알제리 - 알제Alger

    

사람들이 빠져 나간 알제Alger 공항,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서성인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얼마 되지 사람들은 다 잡혀있다. 환율은 1유로에 120 디나르, 환전을 하고 오니 경호 차량이 올 때까지 기다리란다. 비자가 있는데 언젠가는 보내 주겠지, 넋 놓고 기다리는데, 한나절쯤 지났을까, 시내 호텔까지 호송을 맡은 경찰 두 명이 나타난다. 뜻하지 않은 경험이지만 경찰에 의해 통제되는 국가의 이미지는 반갑지 않다.    


알제 시내로 들어가는 길, 공항에서만 안 잡혀 있었어도, 우당탕거리는 알제의 파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건만, 캄캄한 야밤이 되기 전에 공항을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고마워, 이국적인 노을을 바라보며 알제의 바닷가를 포기했다. 아우성치듯 밀려오는 붉은 구름, 황혼마저도 열정적이다.  


  

공항에서 알제 도심으로 들어가는 길


도시의 빌딩들은 바다와 한 몸처럼 모두 바다를 향해 있다. 낡았지만 발코니가 바다를 향해 있는 낭만적인 호텔은 길만 건너면 해변에 닿을 것 같은 거리이다.


공원 앞에 있는 광장에서는 꿀 축제가 파장이다. 북아프리카의 꿀에는 이 땅의 형형한 기운이 들어있을까. 꿀을 판매하는 알제리의 처녀를 또렷이 쳐다보며 북아프리카의 기운 같은 꿀을 구입했다. 산책하는 길에 들린 슈퍼의 물건들을 보면, 어느 땅의 사람들처럼 이들도 먹고 쓰고 살아간다. 불 밝힌 호텔 옆 공원에는 간간히 청소년들도 보이고, 늦은 밤 노점의 꽃집에서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샀다. 


알제의 바다
알제리 전투에서 봤던 프랑스 구역의 발코니가 있는 호텔

식민제국, 그들의 꿈 


지중해 남쪽에 위치한 알제는, 지도를 보면 프랑스의 마르세유항과 거의 일직선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알제리 땅은 프랑스 본국 영토와는 거의 대칭형을 이루고 있다. 왜 프랑스는 굳이 이 곳을 그 많은 피를 뿌리며, 모로코나 튀니지처럼 보호령이 아닌, 대대손손 프랑스인들이 살 수 있는 프랑스 영토로 만들려고 했을까, 아프리카에서 수단 다음(수단이 남북으로 나뉘었으니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제일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다)으로 큰 영토를 가지고 있으며, 광대한 자연과 자원인 지중해와 사하라(석유가 생산된다)를 품고 있다. 게다가 알제리를  지속적으로 그들의 영토화를 시킨다면 당시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프랑스에게 지중해는 그들의 바다가 되는 것이다. 프랑스는 거대한 식민 제국 건설의 거점으로 알제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알제는 프랑스의 임시수도였었다.   


어둠으로 감춰진 도시건만 바다로 열려있는 도시의 실루엣은 감추지 못한다. 오른쪽 해안 언덕 위에 독립기념탑(충혼탑)의 모습이 이들의 살아있는 의지를 말해 주는 것 같다.


알제리에서 나고 자란 프랑스인 3세인 알베르 카뮈는 그의 에세이에서 달팽이 같은 파리(파리는 방사형 도시이다)와 바다로 모든 것이 열려있는 수평적인 알제를 비교했었다.     


호텔에서 왼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언덕위의 충혼탑
낮에 본 충혼탑, 알제만이 아래로 펼쳐진다.




영화 알제리 전투에 나왔던 1965년의 알제 모습, 지금도 많이 다르지 않다.
알제의 해안도로

아침에 만난 알제 시내는 바다로 난 광장을 중심으로 규모가 큰 건축물이 들어서 있고, 양 옆 도로에는 흰색으로 칠해진 프랑스풍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진정 이 지역이 프랑스 식민 통치 시절의 중심지인 곳이다.


알제리의 해안도시에는 흘러간 역사의 흔적들인 페니키아와 로마, 게르만족의 하나인 반달족, 오스만 투루크 등의 외래문화와 그들의 문화인 베르베르 문화와 다른 하나인 이슬람 문화가 혼재해 있지만 이곳 알제에는 어떤 문화보다도 프랑스 통치 시절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1830년 식민지배의 시작부터 적극적으로 알제리를 프랑스의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했던 프랑스는 원래 이 자리에 살았던 알제인들을 언덕 위쪽으로 몰아내고 프랑스 이주민들이 차지한 해안가와 가까운 언덕의 낮은 저지대를 프랑스 구역으로 만들었다. 132년 동안의 통치기간에 끊임없이 강한 저항을 했던 알제리를 상대로, 그들은 가장 잔혹한 식민통치의 역사를 만들었다.   

 

바르바로사Barbarossa


알제는 기원전부터 페니키아가 세운 도시였으며 옛 이름은 이코시움Icosium이라 했다. 지중해 상업 중심지로 발달했던 알제는, 중세 베르베르 왕조인 알모하드 왕조가 번영을 누렸으며 그 유명한 해적 바르바로사가 통치를 하던 곳이다.


어린 시절, 많은 이들은 서구의 해적에 대한 낭만적인 로망을 경험한다. 그 해적들의 이야기가 잉태되었던 시기는, 해적들의 황금기였던 16세기에서 18세기다.  


바르바로사 형제는 원래 지중해를 오가던 상인으로, 예루살렘의 구호 기사단에 의해 상선을 약탈당하고(십자군 전쟁 때 활약했던 대부분의 기사단들은 전쟁이 없을 때는 무슬림을 상대로 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했으며, 고리대금업, 기부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3년간 노예로 갇혀 살았다. 풀려난 형제는 해적으로 변신하여 지중해를 평정했는데 바르바로사(형)는 알제리의 술탄이 되었다.

 형이 스페인과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형의 권력을 물려받은 동생 Barbarossa(1478~1546)는 알제리를 오스만 투르크에게 바치고 북아프리카는 오스만투르크의 간접 통치를 받는 지역이 되었다. 바르바로사는 오스만 투르크의 제독이 된 후 스페인전과 가톨릭 연합군과의 프레베자 전투(1538)를 승리로 이끌었다.

프레베자Preveza 해전은 1538년 9월 28일 그리스의 북서부에 있는 이오니아 해 프레베자 근해에서 교황 바오로 3세가 조직한 로마 가톨릭 연합군(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몰타 기사단과 교황령)과 오스만 함대 간에 벌어진 전투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한 해전이다.


프랑스는 1830년, 알제리가 오랫동안 해적들의 주 근거지였다는 점을 구실로 삼아 알제리를 점령하였다.

1830년 7월 5일, 알제를 통치하던 터키의 총독은 프랑스군에 항복을 했고, 이후 시작된 프랑스의 점령은 1962년 7월 3일, 독립할 때까지, 132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알제리의 영토를 적극적으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애를 썼던 프랑스와의 마찰은 식민지배의 초기부터 강렬하게 시작이 되었다. 저항이 강한 알제리를 프랑스는 처음부터 초토화시켰으며 1830년 7월 5일 프랑스가 알제리를 점령한 후, 약 300만 명이었던 인구는 40여 년이 지난 1872년에는 약 210만 명으로 감소했다고 하니, 알제리의 민족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가 있다.

    

카스바와 영화,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


케차우 모스크 주변에는 시장을 비롯한 그 유명한 알제의 카스바Casbah가 있다. 얼추 계산해도 삼사백 년은 되어 보이는 카스바는 바르바리 해적들에 의해 건설될 당시에는 총독의 관저와 중요시설이 있는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다운타운이었다. 바다를 향해 있는 카스바에 철옹성 같은 성벽을 둘렀을 것이다. 이후 1830년경, 식민화가 시작될 무렵에도 프랑스 구역에서 집과 땅을 잃고 쫓겨난 알제리인들에 의해 많은 카스바들이 세워졌는데 이슬람 지역인 카스바로 들어온 주민들은 예전과는 달리 무차별적으로 그들의 새로운 주거지를 달아냈다. 프랑스통치 시절부터 이슬람지역으로 불렀던 이 곳에 가난한 알제리인들이 모여들었다.

케차우 모스크는 1612년에 건축되었으나 프랑스의 지배 당시인 1845년에 성당으로 개조되었다가 1962년 알제리가 독립하자 다시 모스크로 환원되었다. 보수 중인 케차우 모스크
영화 속 케차우 모스크 주변에 형성된 시장, 지금과 다르지 않은
굳이 사진을 찍으라는 시장의 유쾌한 알제인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는 식민통치 초기부터 강경한 저항에, 강한 살육과 제재로 맞섰던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벌어진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을 그린 영화이다.


지속기간과 잔혹성에서 인도차이나 독립전쟁(1947~1954)과 비견되는 독립투쟁을 그린 1965년 제작된 영화 알제리전투는 1966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한 영화로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주도로 시작된 독립전쟁을 그렸다.

나는 오래 전, 영화를 구해놓고 영화의 인트로 장면을 보다가 두세 번을 단념하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지레 잔혹하리라, 겁을 먹어 버린 것이다. 나이가 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NL)의 조직원이 젊은 프랑스 군인들에게 고문에 못 이겨 정보를 발설한 후의 장면부터 시작하는 영화는 생각보다는 담담한 시선으로 그린 다큐 형식의 극영화로 고발 영화를 뛰어넘어 흑백영화만의 아름다운 장면도 많다. 카스바에 있는 카페와 시장, 계단 등이 주 무대이며 현재의 카스바와 시장 풍경은 영화의 장면, 그대로다.  


영화의 첫 장면, 나이 많은 민족해방전선의 조직원을 고문하고 난 후 그들의 군복을 입히는 장면이다.
바르바리 제국 시절 만들어졌을 것이다.  영화 속 아름다운 카스바의 계단
프랑스 구역에 있던 한 노인을 발코니의 프랑스인들이 테러범이라고 소리치자, 혼비백산한 할아버지 어쩔 수 없이 도망가니
그 뒤를 프랑스군 전차가 따라온다. 정신없이 도망가는 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전투 중에도 사랑은 진행중, 간편하게 민족해방전선 조직원 앞에서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선언을 하면 결혼식이 끝난다.
영화 알제리 전투에서 나온 카스바, 결혼식을 축복해 주는 장면으로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는, 내가 꼽은 영화 속 명 장면이다.


아프리카 성모교회Basilique Notre-Dame D'Afrique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언덕배기를 오르니 지중해가 보이는 언덕 위에 아프리카성모교회(1858~1872)가 주민들과 함께 앉아있다. 가톨릭 교회가 무슬림 마을과 골목길을 맞대고 있다니, 현재도 예배를 드리는 교회로 이슬람 국가에서 흔치 않은 경우이다. 둥근 돔이 돋보이는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교회 안의 아프리카의 성모의 모습도 의미를 생각하면 한 번쯤 볼만하다.


Basilique Notre-Dame D'Afrique
Basilique Notre-Dame D'Afrique
제단의 아프리카의 성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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