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제리 - 세티프 그리고 제밀라
알제에서 동쪽으로 306Km, 3시간 반을 걸려 고원도시 세티프Setif에 도착했다. 도시로 들어오는 길에 보이는 고대 비잔티움의 성벽과 잔해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 제밀라를 보기 위해 방문하는 도시 세티프는 기원전 225년 경 누미디아 인들이 세웠다. 길가 공원에는 라틴어가 새겨진 돌기둥과 비문들이 즐비하다. 분수에 세워진 누드 조각상의 가슴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청춘을 태우지만 강렬한 눈빛을 가진 거리의 청년들, 이 오래된 도시는 지나온 세월을 오롯이 안고 있는 은밀한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었다.
세티프setif 대학살
이 곳은 1945년 5월 8일, 프랑스군에게 시위를 하던 시민과 학생, 수십만 명이 학살당한 슬픈 역사의 도시다.
알제리인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죽어간 많은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프랑스 식민 정책의 변화를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1945년 5월 8일 세티프Setif의 민중 시위에 일방적인 학살로 이어진 대규모의 진압작전이었다. 수 만에서 수십만 명이 죽어간 세티프 대학살의 첫 희생자는 알제리 국기를 들고 있던 16세의 소년이었다고 한다. 소년이 들고 있던 국기로 인해 그는 프랑스 군의 첫 희생자가 된 것이다. 세티프 대학살은 결국은 독립으로 이어지는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의 기폭제가 된 셈이다.
독립 후, 알제리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프랑스와는 여전히 교역이 활발하지만 프랑스 대통령은 아직까지 프랑스의 알제리 지배에 대해 부당하고 잔인했다고 말했지만, 공식적인 사과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써글넘들!
제밀라 유적Djemila Ruins
세티프에서 동북쪽으로 약 60km, 약 1시간 조금 더 걸렸다. 굽이굽이 나지막한 언덕 사이를 가다 보면 어느 순간 능선들 사이로 보이는 돌기둥과 돌 무더기들이 보이는 것이, 마치 신기루처럼 분지형의 아담한 도시가 나타난다.
바람도 머물다 갈 것 같은, 당시 퀴쿨Cuicul이라고 불렀던 이곳은 96~97년 정도에 로마 군인들의 숙영지였다가 차츰 도시화가 되어, 퇴역 로마 군인들이 현지 여인들과 결혼하여 정착했던 도시로, 로마 시대 농산물을 교역하는 도시로 발달했다. 융성했던 도시답게 구조적으로 잘 설계된 도시의 형태가 대부분 그대로 남아있다.
이슬람인들이 이 곳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이곳을 '제밀라Djemila'라고 불렀다. 아랍어로 '아름다운 곳'이란 의미라고 한다.
작은 박물관 안에 전시된, 로마에서는 볼 수 없는, 로마시대의 모자이크들이 놀랍다. 현대에도 사용하는 패턴들과 이슬람 아라베스크 문양이라고만 여겼던 식물 문양들의 원형이 모자이크 안에 고스란히 보석처럼 박혀있다. 수많은 유물들이 프랑스로 얼마나 많이 유출이 되었겠냐마는, 가져가기에는 어려운 유물들은 이 땅에 이렇게 남아있다.
제밀라의 중앙에는 열주들이 둘러싼 2~3세기에 세워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신전Temple of Severan families 이 있다.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재위 193~211)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황제는 북아프리카 렙티스 마그나(현재의 리비아) 출신의 로마 20번째 황제로,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잔인한 폭군으로 알려진 그의 아들 카라칼라에게 제위를 물려줌으로써 사실상 황제의 세습제를 시작한 황제이다.
지나가는 구름도 한 번씩 들르는 곳, 포석이 아름다운 넓은 Forum은 사통팔달, 모든 길의 중심에 있다. 카라칼라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코린트식의 카라칼라Caracalla 개선문은 제밀라의 중요한 성문 역할을 했다. 과한 그의 욕망만큼이나 제밀라에서는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다.
거리와 시장은 물론 욕탕과 주택의 지하 구조까지 그대로 남아있어 2천 년 전 로마 시대 영화 속 장면이 금방 튀어나올 것 같다. 어떤 로마 유적지에서도 만나지 못한, 아담한 트윈아치Twin Arch는 도시 설계자의 재치가 번뜩이는 디자인으로 형태는 간결하며 모던하지만 볼수록 우아하며 매력적이다.
특히 3000석 정도 작은 규모의 극장은 산 아래의 지형을 이용하여 도심에서는 보이지 않는 아늑한 구조가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알베르 카뮈와 제밀라
알베르 카뮈가 사랑했던 제밀라, 프랑스 이주민 3세로 알제리에서 태어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태어난 알제리를 무대로 한 작품들이다. 묻지 않아도, 고향과 혈통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자랐을 카뮈는, 알제리 민족 해방전선의 독립투쟁에 힘을 보태달라는 요구에 “..... 하나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또 다른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그 후 쏟아진 알제리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나는 정의의 편에 선다. 그러나 만일 정의와 내 어머니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나는 어머니를 택한다.”라고 말했다.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카뮈의 태도는 본국 프랑스에서도, 태어난 고향 알제리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알제리의 독립을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했던 카뮈는 고향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62년 알제리가 독립을 쟁취하기 2년 전인 1960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알제에서 먼 거리에 있는 사멸한 도시, 제밀라를 좋아했던 알베르 카뮈는 그의 에세이 <제밀라의 바람>에서 제밀라의 인상을 이렇게 그렸다.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그저 지나가다가 발길을 멈추거나 거쳐 가는 도시가 아니다. 이 도시는 다른 어느 곳으로 인도해주지 아니하며 어느 고장을 향하여 트여 있지도 않다.
그곳은 다만 갔다가 되돌아오게 마련인 곳이다. 그 사멸한 도시는 길고 꼬불꼬불한 어떤 길의 끝에 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제밀라가 곧 나타날 것만 같은 느낌을 주기에 그 길은 더욱 멀게 여겨진다. 마침내 드높은 산들 사이에 푹 파묻힌 빛바랜 어느 언덕배기에 마치 백골들의 숲과도 같은 누르스름한 그 잔해가 솟아나 보이게 되면 제밀라는 오로지 단 하나 우리를 세계의 고동치는 심장부로 인도해줄 수 있는 저 사랑과 인내의 교훈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을 띤다.
바람 속에서 나는 저 돌기둥이며 저 아치며 만지면 따뜻한 저 포석이며 황량한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빛바랜 산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