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제리 - 콩스탕틴 Constantine
제밀라에서 두 시간, 콩스탕틴에 도착했다. 세상의 도시 중에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생긴 도시가 또 있을까, 암석으로 된 고원(해발 640m)에 분명 세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도시가 숨을 쉰다.
오래전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다는 이 도시는, 아랫마을과 윗마을은 터널을 파서 가까워지고, 절벽 위의 다리로 암석 위의 마을들을 연결하여 도시를 만들었다.
협곡에는 고풍스럽거나 세련된, 소박하거나 현대적인 일곱 개의 다리가 협곡을 교차하며 걸려있고 눈으로도 한참은 내려가야만 닿을 수 있는 좁은 협곡 아래에는 루멜강이 세차게 흐른다.
높낮이를 달리하며 설치시기에 따라 아름답게 협곡에 걸려있는 다리들은 이 도시의 백미이다.
1912년 프랑스 기술자 퍼디넌드 아노딘이 설계한 시디엠시드Sidi M'Cid 다리는 제일 눈에 띄는데 도시의 Oued Rhumel 북쪽과 벤 바디스 대학병원Benbadis University Hospital을 이어주고 있다. 175m의 높이로 교각이 없는 사장교(Cable stayed bridge)이며 시디엠시드는 유명한 이슬람 선지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성문의 모습을 본뜬 양쪽 지주 탑의 디자인은 도시를 더욱 고전적인 이미지로 장식해준다.
도시의 절벽은 테라스로 만들어 시민들이 휴식처로 이용한다.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남자들이다. 이슬람 문화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장점이 많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남성들이라는 것인데, 알제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다가 발견한 연인의 모습,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멀리서 망원 카메라로 응시하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는 것만 같다.
누미디아 왕국의 수도 ‘Cirta’
페니키아인들이 로열 시티(Sewa)로 만들었던 도시는 베르베르인들의 왕국인 누미디아(현재 알제리)의 수도로 Cirta라고 불렀다.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을 하는 동안 로마와 동맹을 맺어,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 승리할 수 있도록 중요한 공을 세웠던 누미디아는 결국은 카이사르 Julius Caesar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후 Cirta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자연스럽게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4세기에 파괴되기 시작한 도시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 때 복구되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Constantine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5세기에는 반달족의 침임이 있었으나 다시 복구되었으며, 698년 이곳을 침략한 아랍 세력은 기독교 도시였던 Constantine을 무슬림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중세에는 상업이 발달하여 번영했으며 오스만 투르크의 점령 후에는 총독(bey)이 거주했다.
도시의 중심 Bennacer광장 앞에는 호텔들이 들어서있고 그 주변으로 화려한 우체국 건물과 법원 등의 기관들이 위치한다. 몇 천 년 전에도 이곳은 이 도시의 중심이었다. 묵었던 Hotel ibis Constantine 옆에는 노보텔도 있고 가까이에는 시르타 호텔도 있는데, 호텔 구역에 현지인은 드나들지 않는다. 태생이 경쾌한 모습의 도시는 어쩐지 회색빛이다.
호텔 앞 광장 Bennacer에서 걸어갈 수 있는 Palace of Beys는 콩스탕틴에 거주했던 오스만투르크의 총독이 거주하던 곳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궁은 Hadj Ahmed Bey(1784~1851)가 거주했던 곳으로 그의 이름이 붙어있기도 하다.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많이 떨어져 나갔지만 섬세한 이슬람 양식의 궁은 풍요롭고 화려했던 당시의 분위기가 남아있다. 정원 양식은 모로코의 바타 뮤지엄을 닮았다.
Aux Morts monument
도시에서 북쪽에 위치한 Aux Morts monument은 치열했던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곳으로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아래는 협곡이 더 깊어 보이는데 사람들은 어떤 안전장치도 없는(사실 필요 없지 않나) 곳에서 셀카를 찍는다. 하늘에는 수많은 까마귀 떼들이 일몰의 아름다움을 즐기듯 제각각 비행을 하는 모습이 장관이다.
특별한 도시에서 추억을 만드는 것은 여행자만의 특권인냥, 콩스탕틴의 저녁을 즐기기 위해 아름답지만 어두운, 이 골목 저 골목을 뒤져도 주류를 파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다리가 아파 지나치는 경찰에게 물었더니 내가 묵는 호텔을 알려준다. 그곳에는 니가 원하는 알코올이 있다고.
에미르 압달 콰디르 Abd al-Qadir 모스크
광장 근처에 한 곳이 보일 뿐, 콩스탕틴에서는 유난히 모스크를 많이 볼 수 없었다. 다음날 오전 화창한 날씨와 함께 만난 "에미르 압달 콰디르 Abd al-Qadir 모스크, 외부는 흰색의 가는 기둥들이 섬세한 문양의 파사드를 받치고 있으며 양쪽의 길고 가늘며 높은 아름다운 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스크가 큰 규모임에도 웅장하거나 사람 위에 군림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빛과 스테인드글라스의 향연이 펼쳐지며, 특히 기둥 문양에 비치는 색의 향연은 오묘하기 짝이 없다. 돔의 내부 장식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으로 화려하지는 않으나 독특하며 아름답다.
나오는 길, 뒤통수에 울려 퍼지는 입을 모아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 코란을 낭송하는 소리가 아이들 목소리 같았지만, 이곳은 코란 대학교 Emir Abd al-Qadir University로도 유명한 곳이다.
앙리꼬 마시아스 Enrico Macias의 고향 콩스탕틴
알베르 카뮈와 이브 생 로랑처럼 알제리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유명인으로 살았던 사람으로 프랑스의 뮤지션인 Enrico Macias(1938~)가 있다. 지금도 라디오에서 간혹 들리는, 꽤 어린 시절에 들었던 기타 소리가 좋았던 그의 곡 ‘소렌자라’는 알고 보니 그의 젊은 시절 곡이다.
그는 1938년 12월, 이 곳 콩스탕틴에서 태어났다.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을 시작한 그는 특히 기타를 좋아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유대인이었고 어머니는 프랑스의 남부 프로방스 출신이었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61년,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인은 FNL(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의해 암살되고 누이와 어머니를 잃는다. 안달루시아 유대인과 프랑스인의 피를 이어받은 그가 당시 알제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바람 앞에 촛불이었을 것이다. 알제리가 독립되기 몇 개월 전, 1961년 아내와 함께 알제리를 떠난다.
그가 마르세유로 가는 배 위에서 조국 알제리를 생각하며 작곡했다고 전해지는 ‘안녕, 내 고향 Adieu mom pays’는 1962년 프랑스에서 발표한 데뷔곡이 되었다.
80을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활동 중인 그의 곡들 중에는 고향을 그리는 곡들이 쉽게 눈에 띈다. 하지만 그가 ‘내 조국’이라고 부르는 알제리 그의 고향 콩스탕틴에는, 아직도 돌아가지 못했다.
J'ai quitte mon pays, j'ai quitte ma mai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