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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Aug 21. 2016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 튀니지 - 카르타고Carthage


카르타고(지)Carthage


튀니지는 내게 카르타고였다. 전설처럼 먼 기억 속(나만이 아닌 어쩌면 인류 전체의) 카르타고(지)의 흔적과 디도 여왕, 그리고 한니발 바르카를 만날 수 있기를...  


카르타지Carthage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약 먹은 사람처럼, 얼굴에서는 열이 나고 가슴은 뛰었다. 막연하지만 내게 히어로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아니라 궁극에는 패배한 한니발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내 인격을 형성하는, 숨어있던 하나의 세포처럼 문을 열고 내 머릿속에서 긴 호흡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BC 29년 경, 전쟁이 끝난 지 약 100년쯤 후, 카이사르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는 포에니 전쟁 이후 철저히 유린했던 카르타지를 재건한다. 로마로서는 꿈속에서조차 생각하기 싫은, 진절머리 나는 한니발의 땅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기 때문이다.

이후 2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번영한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가 된다. 하지만 한눈에도 지금의 카르타지는 인적이 드문, 한적하고 꽤 부유해 보이는 주택가일 뿐이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2천년전의 문양이 여전히 아름답다.


역사 위에 역사가 얹어지는 법, 다음의 역사가 남아있다는 것은 예전의 역사까지도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200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만큼의 느낌까지는 아니지만 로마제국의 거대한 도시의 느낌은 어디에도 없다. 택시기사는 산뜻한 공기가 가득한 교외의 아늑한 주택가 옆, 안토니누스 목욕탕Baths of Antoninus 앞에서 내려준다. 지도에는 유적지들이 이곳에서 시작해서 비르사 언덕까지 연결이 되어있다.  


   

안토니누스 목욕탕, 유쾌함과 작은 소란스러움


안토니누스 목욕탕은 관대하고 인자하며 온건한 황제로 피우스(경건한)란 칭호를 받은, 로마 5 현제 중 한 사람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138~161)가 건설한 튀니스에 있는 고대 로마 욕장 유적지이다. 이곳에 와서 안 것이지만, 바다와 닿아있는 대규모 로마 욕장은 이 곳 말고는 아직 보지 못했다. 욕장에 사용하는 물은 60Km나 떨어진 Dorsale 산맥 기슭에 위치한 자그완Zaghouane에서 수로를 이용하여 카르타고 시내의 저수지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폐허
안토니누스 욕장의 평면도


잘생긴 돌들은 다 어디가고 로마 유적지답게 튼튼하고 두꺼운 벽돌 층과 아치, 넓은 바닥 위에 로마의 유적을 알리는 잘린 기둥 서너 개만이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다. 로마시대 배경의 영화나 역사책을 좀 봤던 사람이라면 애써 바다를 바라보며 사우나를 즐겼을 그들의 유쾌함과 작은 소란스러움을 그려봐야 한다.


어젯밤에 내린 비로, 방수가 되는 바닥 때문인지, 목욕탕에 고인 빗물이 바다와 연결되어 보인다. 안토니누스 목욕탕 뒤로 로마 유적지가 넓게 퍼져있다.



로만 빌리지


각 나라의 대사관저들이 모여있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로만 빌리지는 무덤군과 바실리카, 가까이는 극장까지 생활하기에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진 주거지역이다. 창고에는 아직도 먼지가 쌓인 모자이크판들이 가득하다. 내팽겨진 기둥들의 굵기와 초석들, 튀니스의 바르도 박물관에 있는 로만 빌리지의 작품들을 보면 이곳이 얼마나 부유하고 수준이 높았던 주거지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로만 빌라 안에 있는 창고, 먼지가 쌓인 보물같은 모자이크 유물들이 가득하다.


근처에 있는 극장에 앉아있으니 뒤쪽으로 겸손하게 느껴지는 모스크의 미너렛이 보인다. 극장은 원래 좌석의 돌은 얼마나 많이 빼 갔는지 70%이상을 새로 끼어 넣었다. 극장의 입구에는 얼마 전에 있었던 힙합 콘서트의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런 곳은 걸어서 다녀야 제 맛이다. 시간이 많아 천천히 산책하듯이 다니면, 거의 유일한 카르타고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비르사 언덕까지 하루는 걸리겠다.


극장에서, 먼 발치에 모스크의 미너렛이 보인다.
이정표, 카르타지 시내


카르타지의 폐허는 5세기 반달족의 침입으로 파괴된 것도 있지만, 수많은 기둥들과 반듯하게 다듬어진 돌들은 아랍의 점령군이 들어오면서 새 도시인 카이르완과 튀니스에 새로운 궁과 모스크 등을 짓는 곳에 사용되었다.


카르타고(지)의 추억, 비르사(Byrsa) 언덕


비르사언덕에 가까이 오면 격조있어 보이는 집들이 많다. 대문이 살짝 화장실 같기도 하지만, 입구가 전통적인 모자이크로 꾸며진 집

 

비르사언덕 오르는 길
비르사 언덕의 왼쪽에 세인트 루이스 성당이 살풋 보인다.


나지막한 비르사 언덕을 올라가다 보면 앞에 둥근형태의, 한 눈에는 호수 같은 퓨닉 항구가 보인다. 이곳은 많은 배를 정박할 수 있는 구조인 군사항구로, 밖에서 보면 배를 정박해 놓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군사항구의 오른쪽에는 지중해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다녔던 이들을 부유하게 해 준 무역항이 보인다.

카르타지의 대표적인 유적지


항구 가까이에는 바알 Baal-Hammon신의 아내인 타니트Tanit여신에게 바쳐진 토펫Topet이 있다. 토펫은 로마(지금은 유럽)가 카르타고를 이야기할 때 야만의 상징처럼 이야기하는 어린이의 무덤으로, 살아있는 아이, 특히 장자를 산채로 여신에 바쳤다고 주장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화장된 유해를 담은 수천 개의 단지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성경속에서  이삭을 야훼께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이 스치듯 지나간다. 고대 레바논과 시리아 근방에서 장자나, 아이를 바치는 인신공양의 전통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영아사망률이 많았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타니트는 아이들을 산채로 잡아먹는 신이 아니라 다 살지 못하고 일찍 죽은 토펫에 묻힌 아이들을 안아주고 도닥이던 어머니 여신 역할이었을 것이다.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파'


기원전부터 페니키아는 바다를 주름잡던 해상강국이다. 그들은 바다를 이용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그들이 개척한 해로는 다른 나라의 문화를 전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타민족의 문화를 융합하여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명을 만들어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자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기 위해 만들어낸 간결한 페니키아 알파벳은 알파벳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제우스는 페니키아(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지역)의 공주였던 아름다운 에우로파Europa를 보고 소로 변신하여 그녀를 납치하여 등에 태우고 온 땅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성장했던 크레타에 정착한다. 에우로파는 제우스와의 사이에서 미노스와 라다만투스, 사르페돈를 낳고 크레타의 왕 아스테리오스의 아내가 된다. 아버지의 명으로 그녀를 찾아다니던 에우로파의 형제 카드모스와 포이닉스, 킬릭스는 돌아가지 못하고 주변의 다른 땅에서 정착했다고 하니 유럽문화의 모태인 그리스 문명은 동방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과 지중해 문화의 기저에는 페니키아 문명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카르타고의 디도 여왕


기원전 814년 카르타고를 건국한 사람은 디도 여왕이다. 디도 여왕은 성경에 등장하는 바알신을 섬기는 페니키아인의 나라 티레(현재 레바논)에서 이주하여 카르타고Carthage를 건국했다. 엘리사라고도 부르는 디도공주의 오빠인 티레의 왕 피그말리온(조각가 피그말리온이 아님)은 부유한 디도 공주 남편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사제였던 공주의 남편을 죽인다. 디도는 남편의 재산을 정리하여 추종자들을 데리고 도망쳐 키프로스를 거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해안에 도착한다.


베르베르족의 통치자에게 소가죽으로 덮을 만큼의 땅을 약속받은 디도는 소가죽을 가늘게 잘라 최대한 넓게 언덕을 에워쌌다. 디도 공주가 소가죽으로 에워싼 카르타지의 궁이 있었던 언덕을 지금도 소가죽이란 뜻의 비르사Byrsa라고 부른다.


디도는 ‘새로운 도시’라는 뜻의 ‘카르트 하다쉬트’라고 지었는데 바로 카르타고(지)Carthage이다.  

Carthage는 해상무역으로 점차 번영하여 강한 군사력까지 갖추자, 커져가는 로마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처음에는 조약을 맺어 서로 공존하는 듯하더니, 급기야는 시칠리아를 둘러싼 다툼으로 백 년이 넘도록 기나긴 전쟁 포에니 전쟁Poenic War(기원전 264~기원전 146)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264~기원전241)한니발의 아버지인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기원전 270년 경~기원전 228년)가 출정했다. 시칠리아의 내전을 해결해준 카르타지는 로마군의 반격을 받았다. 승리한 로마는 최초의 해외 속주인 시칠리아를 갖게 된다.


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기원전 201년)은 한니발 전쟁이라고도 한다. 다시 커져가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한 로마, 한니발Hannibal Barca(기원전 247~기원전 183 또는 기원전 181)는 4만의 용병을 데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까지 넘어 코끼리 부대를 이용, 로마 북부를 공격하여 15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점령했던 한니발의 전술이 빛이 났던 전쟁이다. 하지만 한니발의 전략을 연구하여 역으로 바다를 건너 본국 카르타고를 침공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자마 전투에서 패한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략가였던 한니발은 기원전 183년, 당시 소아시아 북부 흑해에 있던 비타니아Bithynia에 머물 때 비타니아왕이 한니발을 로마에 넘기기로 한 것을 알고 독약을 먹고 죽는다.


3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149~기원전 146년)은 한니발이 죽고 37년 후, 3년간의 농성 끝에 카르타고는 함락되고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멸망한다.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하는데 최고의 적수였던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그 땅은 대량의 소금을 뿌려 어떤 생명도 자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를 만들었으며 그 땅의 남자들은 씨를 말렸다. 그리고 그 땅의 이름을 아프리카라고 불렀다.    


카르타지의 멸망으로 지중해는 로마의 내해가 되었으며 로마가 일개 도시국가에서 제국으로 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후 카르타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도시를 재건한 후 번영하여 2세기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번영한 북아프리카 최대의 도시가 된다. 439년에는 반달족이 침입하여 카르타지에 반달 왕국을 세웠고 534년에는 비잔틴 제국에 통합되었다.    

 

1차 포에니 전쟁 후, 기원전 218년경의 카르타지 영역


카르타고와 로마의 악연을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기원전 19)는 아이네이드Aeneid에서 여왕 디도와 아이네이아스의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이네이아스Aneas는 트로이 전쟁에 나오는 영웅으로 여신 아프로디테의 아들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패한 Aneas는 어렵게 탈출하여 북아프리카 해안에 다다른다.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와 사랑에 빠진 나머지 그의 대업을 잊어버렸지만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를 통해 이탈리아로 향하도록 부추긴다. 사랑했지만, 일(나라의 건국)을 위해 디도를 뿌리치고 떠나가는 남자 아이네이아스는 또 다른 모습의 오디세우스다. 트로이인들과 함께 떠나는 남자의 마지막 흔들림을 기대했을까, 여왕 디도는 장작더미 위에서 자신의 몸을 찌르고 불태워버린다.

아이네이아스는 7년의 유랑을 끝내고 이탈리아에 상륙하여 그곳의 왕 라티누스의 딸 라비니아와 결혼하여 라비니움Lavinium을 세우고 로마 건국 시조가 되었다.

그의 후손인 로물루스는 카피톨리노 언덕에 로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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