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튀니지 - 튀니스 Bardo National Museum
튀니지의 와인 마공Magon
튀니스의 뒷골목에서 한 일 년은 살았던 것처럼 시간만 있으면 번잡한 호텔 앞, 발걸음도 가볍게 길을 건너 동네 슈퍼를 들락거렸다. 동네 슈퍼라기에는 퍽 큰 까르푸는 이슬람 국가인 튀니지에서 와인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맥주나 와인을 생산하며 술을 마실 수 있는 Bar가 있다지만, 처음에는 이슬람 국가이니만큼 바를 찾아가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긴 했다. 하지만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마시는 정도는 일반적이더라.
튀니스에 도착하자마자 찾아간 까르푸의 와인 진열장 앞에는 많은 남자들이 서성거리며 진을 치듯 서있다. 외국인일 것 같지만 대부분 현지인들이었다. 와인을 고르다가 레드와인 마공을 집어 들었더니 옆에 서있던 한 남자, 엄지를 척, 치켜든다. 알제리에서는 꿈도 못 꾸던 와인을 튀니지에 오니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와인 종주국인 프랑스 사람들도 좋아한다는 튀니지 와인은 마공Magon 외에도 Ifrikia, Selian 등 생각보다 종류도 많아 보였다.
실제로 튀니지에서 와인을 마시지 않는 것은 튀니지 와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페니키아인들은 지중해 나라들에게 와인의 제조법을 전해준 메신저들이기 때문이다. 페니키아는 노예 매매와 인신공양 등의 악습으로 이미지가 부각되어있지만, 알파벳의 기본 원형인 페니키아 문자를 전파했으며 인류의 음료인 와인 제조법까지 전파시킨 것을 보면 페니키아만큼 인류에 공헌도가 큰 족속도 많지 않다.
와인은....
와인은 역사적으로 오른쪽에는 흑해, 왼쪽에는 카스피해를 끼고 있는 코카서스 지역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발효가 저절로 일어나는 와인의 출현은 포도가 있는 한, 인류의 출현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코카서스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와인은 인근 소아시아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일찍이 해상무역으로 바다를 주름잡던 페니키아(레바논과 시리아 지역)인들에 의해 그리스로 전해졌으며 그리스는 로마에, 제국을 이룬 로마는 속주 변방에 배치된 군인들에게 배당하던 와인(좋지 않은 식수로 인해 일어나는 질병 예방)을 위해 속주에 포도나무를 심어, 와인 생산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즉 튀니지 와인 제조 역사를 말하자면, 튀니지 해안에 기원전 1100년경부터 거점을 확보한 페니키아는, 디도 여왕이 티레(레바논)에서 카르타지에 도착하여 나라를 건국(기원전 814년) 하기 전부터 있어왔던 그들의 음료다.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기원전 2~3세기경 카르타지(고)에 살았던 마공Magon이라는 학자가 와인 제조에 관해 집필한 책은 로마인들의 와인 제조법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마공이란 와인의 이름도 학자의 이름에서 왔다.
이슬람의 지엄한 관습에도 불구하고 와인 생산은 지금도 계속되며 그들은 이 땅에서 생산하는 맛 좋은 와인을 자랑스러워한다.
Bardo National Museum
박물관이 문을 닫는 월요일에는 튀니스 근교에, 바르도 박물관을 가기 위해 기다렸던 화요일이다. 얼마나 교통이 혼잡한지 호텔 앞은 아침부터 서너 겹으로 차선이 엉켜있다. 택시를 잡아타고 어렵게 중심을 빠져나가니 금방이다. 튀니지에서의 시간이 한나절밖에 없는 누군가에게 꼭 봐야 할 것을 추천한다면 바로 바르도 뮤지엄Bardo National Museum이다.
방대한 자료도 놀랍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곳과 다른 것은 북아프리카의 바르도 박물관에만 있는 놀라운 수준의 모자이크들이다. 본국이었던 로마나 바티칸 박물관에도 없으며, 세계 유수의 엄청난 규모의 루브르나 대영박물관이나 페테르부르크 박물관 같은 식민지에서 가져온 제국 박물관과는 다른, 오직 이곳에서 생산하여 볼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시대 부유했던 콜로니아의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박물관은 15세기 베르베르족 왕조인 하프시드Hafsid 왕조(1230~1574) 시절 교외에 위치한 궁전을 개조했다. 3층으로 된 박물관은 최근 리모델링을 해서 외관은 현대적이지만 내부는 15세기 이 지역의 건축미를 엿볼 수 있다.
이곳은 2015년 3월 18일, 3명의 무장괴한에게 21명의 인질들이 살해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살해당한 인질들은 대부분 여행객들이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인지 박물관은 입구부터 삼삼오오 무장경찰들이 보인다. 안에는 당시의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각 방마다 ‘Carthage Room’이나 ‘Virgile Room’처럼 지역 혹은 특별한 사람이나 시대의 이름이 붙어 있는데 방의 이름을 보고 들어가는 것도 유물을 이해하는데 퍽 도움이 된다. 사진도 자유롭게 찍은 수 있으며 다른 박물관처럼 많은 제재는 하지 않는다.
카르타지방에는 도시 전체가 카이르완과 튀니스 등 이슬람 도시를 만드는 데 제공된 탓으로 기둥이나 신전을 장식한 석재들은 거의 없지만 로만 빌리지의 신전을 장식한 우아한 신상이나, 황제의 상 등이 남아서 박물관의 큰 방을 채우고 있다.
풍부한 소재와 표현이 절정에 달한 모자이크 기법은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퇴보를 한다. 주제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우아한 세례반을 보면 생활 속에서 어떤 식으로 모자이크가 파고들었는지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