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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Aug 14. 2016

폐허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다.

# 튀니지 - 엘젬El Djem


엘젬El Djem  

     

튀니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시골마을에 놀랍도록 아름다운 원형극장이 있다. 이곳은 2,000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글래디에이터’라는 영화를 찍은 곳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생소한 이름의 작은 도시가 가까워지자, 멀리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도심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보이는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원형경기장의 모습이다.

     

기원전 45년경, 페니키아와 베르베르의 작은 마을이었던 곳에, 카이사르는  퇴역군인들을 위한 Thysdrus(지금의 엘젬)라는 거주지를 만들다. 이후 티스드루스Thysdrus는 로마제국 아프리카의 대표적인 도시로, 카르타지Carthage 다음으로 수스(당시에는 Hadrumetum)와 경쟁을 하는 부유한 도시로 발전했다.

     

당시는 오늘날보다 기후가 좋았던 것으로 2세기경 티스드루스는 올리브기름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중심지로 번영했으며 주민들은 매우 부유했다.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3세기 초에 완공된 대규모 원형극장은 로마의 콜로세움에 버금가는 위용으로, 약 30,0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었다.


원형극장의 광장

     

238년에는 티스두르스의 부유한 젊은 지주들이 막시미누스 황제(235~238 재위)가 보낸 세금 징수자 들을 죽이고 당시 아프리카 총독이었던 고르디아누스 1세를 로마의 황제로 옹립했던 사건을 보면 경제적인 부를 바탕으로 정치적인 입김도 강했던 곳이었다.  

244년에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인 고르디아누스 3세가 티스드루스를 로마의 콜로니아(colonia:완전 시민권을 가진 정착지)라고 선포한 것을 보면 이전에는 로마 본국의 곡식창고였을 뿐 자치권이 없던 식민지였다고 볼 수 있다.


 여왕 가히나Kahina,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그녀의 존재조차 알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엘젬은 670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군이 북아프리카를 침공했을 때, 베르베르 군과 아랍군과의 마지막 치열한 방어전이 있었던 곳이다. 최후의 격전지였던 원형경기장의 사령관은 여왕 Kahina였다.


그녀는 7세기 당시 누미디아의 여왕으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반달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세력이 힘을 잃자 비잔틴 세력이 다시 자리를 잡았으니, 이미 수백 년간 로마화가 지속되었던 북아프리카의 주민들과 여왕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여왕은 아랍 세력의 침공을 대비하여 티스두루스 주변의 농장에 있던 대부분의 올리브나무들을 없앴다. 그 땅의 생명나무였던 올리브나무를 없앴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그리고 택한 것은 아랍군과의 최후의 전투였다. 그녀에게 원형극장amphitheater은 든든한 요새였으며 최후의 보루였다.

   

가히나 여왕의 요새였던 원형극장


기독교인이었던 여왕의 이야기는 그렇게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알제리나 튀니지의 깊은 고문서 서고에서나 찾을 수 있을까, 그녀가 마술사나 무당, 혹은 유대인이었을 것이라는 말로 그녀를 왜곡하는 내용이 한 두 줄 있을 뿐, 사람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거나 그녀의 존재조차 알기를 꺼려하는 것처럼, 찾아 헤맸지만 내 능력으로 그녀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대세에 항전했던 용감한 여인,  용감한 전사, 그들의 여왕 이야기는, 이슬람을 믿는 그녀의 후손들에게는 목 안에 깊이 박힌 작은 가시였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여행의 즐거움일까, 난 엘젬의 원형극장에서 7세기, 태양과 올리브의 나라에 살았던, 지혜로웠며, 때론 용감한 전사였던 한 여인을 만났다.  

 

엘젬El Djem의 원형극장 

    

로마와 로마의 속주에 있는 원형경기장의 규모는 대체로 인구를 고려해서 만든다. 하지만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크며, 약 삼만 오천 명까지 수용이 가능하다는 엘젬의 원형경기장은, 그 당시의 인구수에 비해 더욱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부유한 지주들이 살고 있는 시골의 원형경기장을 거대하게 지은 것은 당시 황제도 옹립할 수 있는 마을이었으니, 자신들의 부와 정치적 역량을 널리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타원형의 아레나
가운데는 타원형의 아레나, 하늘색으로 된 부분은 계단이다. 일시에 많은 사람이 빠질 수 있는 구조이다.


입구의 현관과도 같은 반원형의 광장이 경기장과 무척 잘 어울린다. 원형경기장의 한 쪽 부분은 거의 폐허 수준이지만 입구와 3 층높이의 코린트식으로 장식한 전체적인 형태는 대체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3층의 아케이드로 된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직경 654미터인 타원형의 아레나(가운데 운동장 같은)는 더욱 온전하며 첨단 시스템, 예를 들면 통풍시설과 많은 사람들이 일시에 입장하거나 나갈 수 있는 출구, 지하실의 방과 우물, 동물들과 검투사들이 타고 올라오는 엘리베이터 시설까지 완벽하다.

로마의 콜로세움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섬세한 구역까지 온전하다.


세월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진 회랑
지하시설이다. 이처럼 완벽한 시설을 본 적이 없다.

     

원형극장의 폐허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다. 

     

예로부터 통치자가 자신을 알리기 위해 거대한 건축물을 지으면, 다음 통치자나 혹은 다른 정치세력은 자신의 업적을 나타내고자, 전 시대의 건축물을 파괴해서 그 재료를 가지고 빠르고 더 크게 건축물을 만들었다. 게다가 주민들은 한술 더 떠 마음껏 빼어다가 굄돌로도, 맷돌로도 사용하고,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 도구 등으로 사용했다. 실제로 유적지의 파괴는, 전쟁이나 재해보다 당 시대를 살아가던 주민들이 훼손한 경우가 훨씬 많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유적지의 폐허는 역사적으로 피해갈 수 없는 악순환이지만 그것이 삶이고 역사이다. 티스두르스(엘젬)의 원형극장은 적들이 이 땅에 올 때마다 상징적으로 파괴의 대상이 되었으며, 670년 시디 오크바 장군이 이끄는 동쪽의 아랍군이 점령했을 때는 대규모의 훼손이 이루어졌다. 가까운 곳에 그들의 첫 도시, 카이르완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로마식 건물들이 즐비한 카르타지와 수스와 티스두르스 등의 아름다운 건축에서 질 좋은 대리석과 화강암, 화성암 등의 기둥과 반듯한 돌들을 날라다 모스크를 만들고 성벽을 쌓았으며 도심의 기반시설에 투입했다.  

     

19세기 프랑스 식민시절, 잊혀진 한적한 시골마을, 원형극장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작은 마을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이 마을을 엘젬이라고 불렀다.

   

원형극장 한쪽의 폐허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다.

  

엘젬 모자이크 박물관

     

이제는 평온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은 수백 년간 북아프리카를 주름잡던 부유한 콜로니아였던 것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부유한 지주의 저택이었거나 로마총독의 궁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은데, 건물 자체가 작품으로, 건축물의 구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원형극장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데, 튀니스의 바르도 박물관과 견주어도 기가 죽지 않는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온전한 상태의 로마시대 건축물에 수놓았던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원형극장만큼 귀한 것들이 수두룩하다.     

   

엘젬, 모자이크 박물관
북아프리카 주택의 구조를 한 박물관 내부
로마 총독의 궁이었을까, 사각형의 방들이 널찍하다. 바닥의 모자이크는 방까지 연결되어 있다.
무너진 회랑에 남아있는 코린트식 기둥
박물관의 정원


모자이크란?

     

모자이크란 자갈이나 흙벽돌, 대리석, 도자기, 유리, 종이 등의 조각을 촘촘히 붙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인류가 생겨나면서부터 했던 작업이었지만, 최초로 발견된 것은 기원전 25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왕궁 기둥을 장식한 것이다.    

     

이후 그리스인들은 자갈을 이용한 모자이크Pebble Mosaic를 표현했으며 북아프리카의 카르타지Carthage에서는 방수 목적을 위하여 모르타를 이용한 모자이크를 개발했다. 방수를 목적으로 로마에서는 공공시설, 특히 대형 욕장과 분수 등에 많이 사용했으며, 북아프리카에서는 점차 주택의 바닥은 물론 벽을 장식하는 중요한 표현 수단이 되었다.  

   

 한 때는 원형극장을 장식했던 모자이크
2~3세기경의 모자이크들이 박물관에 가득하다. 모자이크는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수출품이었다.


2세기, 올리브 오일과 곡물, 이국적인 동물 등을 수출하였던 북아프리카는 갈수록 와인, 목 조각품, 세라믹 등 부가가치가 높은 상품들을 수출하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수출 품목은 마그레브만의 특별한 양식의 대형 모자이크와 세라믹이었다고 하니,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엄청난 작품들로 가득 찬 박물관이 이해가 된다.


 박물관 대부분의 작품들은 2세기에서 3세기 작품들로 도시가 가장 부유했던 시기의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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