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의 발리 - 길리 트라왕안
윤 식당, 그 섬 Gili Trawangan
이 작은 섬에서는 숙소에 빨리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방법은 일단 뭔가를 먹는 일이다. 눈부신 해안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선착장 근처 반얀트리 레스토랑에서 일단 자리 잡고 밥부터 시켰다.
대충 시킨 토푸 라이스와 나시고랭을 한 입 먹으니 “읍, 짜다. 하지만 여긴 길리 T, 모든 것이 용서가 되는 곳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그럭저럭 맛있다. 주스를 마시고 아이스커피를 마셔주니 그제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된다.
발리 빠당바이에서 스피드보트를 타고 와서 지쳐 있는 사람들, 롬복에서 가볍게 강 건너듯 넘어온 사람들, 발리나 롬복으로 나가기 위해 치모도(마차)에서 내려 부두로 내려가는 사람들, 표정을 보면 제일 힘든 일은 포장도로가 없는 트라왕안에서 무거운 캐리어나 배낭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그나마 배낭은 좀 나아 보인다.
선착장 오른쪽으로 나오면 치모도(마차) 택시 주차장이다. 비성수기에는 모르겠으나 성수기인 현재 8월, 섬 전체의 숙소로 향하는 치모도 택시 요금은 정가제이다. 주차장에서는 오는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끊어준다. 물놀이에 필요한 짐만 가볍게 들고 온 우리는 택시를 타지 않아도 되지만 치모도를 한 번은 타봐야 할 것 같았다. 바야흐로 가장 바쁜 시간대인지 내 앞으로 30대 정도는 지나가야 한다. 빨리 체크인할 이유가 없지만 끊임없이 들어오는 치모도는 잠시만 기다리면 우리를 너무나 빨리 숙소로 데려다줄 것이다.
마을 안쪽은 잠깐 마차를 타고 들어가는 중에도 화산재처럼 풀풀 날리는 먼지가 장난 아니다. 숙소 예약이 실패했다는 것을 순간 실감했다. 숙소는 북쪽 해안에서 5분에서 10분 정도 안쪽에 위치한다. 가격도 가장 비싼 시기였지만 밀물처럼 섬을 찾는 사람들은 좋은 방은 가만 두지 않는다. 7월 중순 서울에서, 너무 비싸서 내일 예약해야지 하고 멈칫거렸던 방이 그다음 날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나가버렸다. 다행히 서쪽 해안과 북쪽 해안이 가까워 차선책으로 예약한 곳이었다.
넓은 정원이 있는 트라왕안 오아시스에 도착, 주인이 반갑게 맞아주니 우려했던 걱정이 사라진다. “이 섬은 걸어서 두 시간, 자전거로는 한 시간이야” “자전거는 하루에 40,000루피아야” 인도네시아 여주인의 활기찬 환영인사도 그렇지만 단 번에 나를 사로잡은 것은 흐드러진 부겐베리아와 캄보자, 그리고 야자나무가 무성하게 펼쳐진 열대 정원이었다. 안내받은 방은 깨끗하고 넓다. 이틀 지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이곳은 놀러 왔지 묵으러 온 것은 아니니까. 하얀 벽에는 날렵한 도마뱀 한 마리가 재빠르게 움직이며 환영인사를 한다.
선착장에서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오른쪽에 거북이 부화장Turtle Hatchery과 거북이 보호소 Turtle Conservation가 나온다. 관리인 아저씨가 밥을 주는데 이슬만 먹을 것 같은 깜찍한 아기 거북이들이 생물고기를 밥으로 먹는다. 깜짝 놀랐지만 어려도 거북이는 거북이다.
스노클링 장비를 빌려주는 가판대는 해안선을 따라 즐비한데 어디에서나 스노클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만 더 올라가면 한적한 느낌의 북서쪽 해안선이 나타난다. 북서쪽 해안은 작은 파도가 찰랑대는 어촌마을 같은 느낌이다. 멀리 롬복 본 섬의 린자니 화산이 머리에 화관처럼 구름을 두르고 나타난다. 너무 반가웠다. 마음속 깊이 그리고 있던 연인을 만난 기분이랄까, 롬복에서는 볼 수 없었던 린자니 화산의 멋진 풍채가 트라왕안에서는 보인다.
모퉁이를 돌아가면 한국 사람들이 길리 T에 오는 이유 중의 하나인 ‘윤 식당’이 나온다. 낯익은 간판은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 앉힌다. 손님을 기다리던 토끼 인형도, 메뉴판도 똑같은데 사람들만 다르다. 윤 식당 마니아가 아님에도, 꿈을 꾸었거나, 시간 이동을 한 느낌, 가슴에는 휑한 바람이 불고 지나간다. 다른 사람보다도 첫 출근한 날 입구에서 서성이던 신구 선생님이 생각난다.
윤 식당 앞은 오전 시간에는 물고기가 많아 스노클링이나 물놀이를 즐기기에 적당한 곳이다. 맥주나 음료 하나 시키면 선 베드 하나 자리 잡고 놀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물이 쑥 빠져나가 바닥에 넓은 돌밭이 나타난다. 돌밭에서 놀 수 없어 밥을 시켰더니 정말 티브이 속 윤 식당 메뉴 하고 같은 메뉴를 판다. 영화 속 장소를 찾아가 체험하는 기분 같아 묘하다.
불고기 덮밥과 불고기 누들을 시켰다. 내 입맛에는 좀 짜지만 한식은 한식이다.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모여든다. 점심시간이니 사람들이 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방에서 정겨운 한국말들이 들려온다. 물놀이를 하고 때가 되어 모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장비는 한국에서 가져온 스노클링 장비들이다. 남이 쓰던 장비를 빌려서 써야 하는 처지에서 깨끗해 보이는 장비를 보니 부럽다. 7월 말부터 롬복까지 직항이 생겼다고 들었는데, 롬복과 트라왕안까지 오는 패키지 상품이 생겼다고 한다. 대부분 아이들과 같이 온 가족들이다.
하! 인도양 롬복 앞 작은 섬의 북쪽 해안 한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귀에 익은 한국말이 일상처럼 오고 간다. 아이들과 같이 온 한국 사람들과 한국말을 뒤로하고 이제 가야겠다. 안녕, 윤 식당!
아직도 앞바다에 떠 있는 배에서는 사람들이 퐁당퐁당 바닷속으로 잘도 떨어진다.
사람들은 오후가 되면 서쪽으로 향한다. 본능처럼 우리도 오후에는 섬의 서쪽을 향해 달렸다.
오고 가는 길에 들린 코코넛 주스 가게, 이틀 동안이지만 들락날락 그 앞을 지나면서 물 대신 코코넛 주스를 들이켰다. 장사하는 엄마 치맛단을 잡고 자란 딸아이에게 귀엽다고 웃어주니 대견스럽게 고마움을 표한다.
독립기념일인 8월 17일, 서쪽 해변이 들썩들썩하다. 해변의 함성소리와 북소리를 따라가니 ‘삐낭나무타기’ 경기를 한다. 삐낭나무 타기는 인도네시아 전통 놀이로 특히 독립기념일에 즐기는 경기라고 한다. 8월 17일 현재 인도네시아 전국방방곡곡에서는 북소리와 함께 나무타기가 한창일 것이다.
나무 꼭대기에는 인도네시아 국기가 펄럭이고 주위에는 선물 보따리가 주렁주렁하다. 나무를 타고 올라가서 국기인 메라 푸티를 잡는 사람이 매달린 선물의 주인이다. 나무는 껍질을 벗기고 기름을 발라 세워놓아 올라가기가 수월치가 않을 텐데 눈앞에서 잘도 올라간다. 올라간 남자가 메라 푸티를 낚아채자 함성은 커지고 북소리와 함께 공연이 이어진다.
트라왕안의 서쪽에서 사람들은 비치의 그네 위에서, 빈백에 몸을 누이고, 맥주 한 잔 시켜놓고 황홀한 일몰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