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원 건물들 틈으로 들어가면 나흘간 묵었던 숙소가 있다. 위치도, 깨끗한 방도, 아침밥 등 많은 것이 만족한 숙소였다. 게다가 숙소 앞에는 떡 하니 “우붓에 가면 꼭 한 번 가 봐야지”라고 생각했던 카페 스니만Seniman Coffee Studio이 자리 잡고 있다.
도착한 날 저녁, Nomad에서 밥을 먹고 숙소로 들어오는데 보니 깔끔해 보이지 않은 작은 Sri Wedari골목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드나든다. 지도를 확인하니 많은 맛 집들이 포진해 있다. 숙소 앞 어두운 불빛 아래 카페 스니만Seniman 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숙소를 골라도 너무 잘 골랐잖아.”
인도네시아는 지구 상의 어디보다도 다양하고 신선한 커피가 있는 곳이다. 특별히 맛 좋은 카페를 찾아가지 않아도 좋을 만큼 레스토랑이나 게스트 하우스조차도 밥을 먹으면 맛있는 커피는 항상 마실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커피 음용법은 분쇄한 커피가루를 가라앉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마시는 방법이지만 커피의 나라답게 머신에서 뽑은 에스프레소와 프렌치 프레스 커피 등 기호에 따라 다양한 추출 방식의 커피를 어디에서나 마실 수 있다.
커피가 가라앉은 다음 마시는 전통적인 인도네시아 커피, 스푼 대신은 시나몬이다.
에스프레소와 팬 케익
롬복 숙소에서 주인에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내온 프렌치 프레스
호텔 카자네무아에서, 애프터눈 티
운명적으로 스니만 카페 나들이는 시작되었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양쪽으로 스니만 카페가 있다. 숙소 쪽 가게는 커피를 로스팅하고 업체와 거래하는 일을 하는 공장 같았다. 돌아오는 시간에 로스팅 공장을 기웃거렸다. 로스팅 공장 입구에는 인도네시아에서 생산되는 맛도 못 본 많은 종류의 커피가 진열이 되어있다. 포장에는 로스팅 날짜가 찍혀 있는데 오늘 볶아서, 식혀서, 포장을 했다는 뜻을 지닌 오늘 날짜도 찍혀있다. 우와, 가게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는 진공포장에 찍혀있는 날짜만 봐도 안다.
Seniman 카페로스팅 공장, 맞은편에는 카페가 위치한다.
공장 안쪽에서는 로스팅과 포장이 한창이다.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커피는 태생에 따라 맛이 다르다. 커피 공부를 하면서 많은 종류의 커피 맛을 봤지만 인도네시아 대표적인 커피인, 무거운 맛의 수마트라 만델링Mandheling 말고는 슬라웨시 또라자Toraja 커피를 한두 번 맛본 정도이다. 진열된 인도네시아 커피 브랜드의 테이스트 노트와 로스팅 포인트를 보니 하나도 비슷한 맛이 없다. 맛이 천차만별인 여러 종류의 커피가 생산되는 인도네시아 국토의 다양함이 부럽다. “떠나기 전날 사야지,” 하면서 이리보고 저리보고, 몇 번이나 날짜 확인하면서 만지작만지작.
스니만 로스팅카페에서 만난 인도네시아 전역의 싱글 커피들
200g씩 포장이 되어있는 커피의 가격은 조금씩 다르지만 한국의 스페셜티 커피 가격과 맞먹는다. 안쪽에는 로스팅을 하고 있고 바깥쪽에서는 로스팅을 끝낸 커피콩을 식힌 다음 1Kg 단위로 진공포장 작업을 하고 있다. 로스팅 작업에 방해가 될까 봐 나가야 하지만 코끝으로 전해지는 비릿한 커피콩 냄새와 함께 갓 볶아진 커피 향이 꼼짝 못 하게 만든다. 갓 로스팅한 커피 맛을 보고 싶어 침이 꿀꺽 넘어간다. 로스팅을 한 후 바로 마시는 커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다.
몇 년 전, 하던 일을 접고 내게 꿈같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내 의지대로 하고 싶었던 일 중 가장 먼저 한 일은 커피 공부였다. 어쩌다가 로스팅까지 하게 되었는데 커피 프로세스 중 가장 좋아하던 작업이었다. 향을 맡으며 연두색, 황색, 황갈색, 진한 갈색으로 변해가는 커피콩을 바라보면서 문을 여는 순간, 타닥거리던 콩이(비록 로스팅이 잘못되었을 때조차도) 와르르 한꺼번에 쏟아질 때 커피콩들의 자태와 향기는 사람을 매료시킨다. 로스팅을 끝내고 식힌 다음 바로 마셔보는 습관은 로스팅을 공부하면서 들인 습관이다.
로스팅을 마친 커피콩은 그때부터 맛이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입맛이야 사람마다 다르지 않은가, 혹자는 2일에서 3일 숙성된 커피가 맛있다고 하지만 나는 바로 볶은 커피가 가장 맛있다.
안쪽에서 로스팅 작업이 끝나자마자 바깥쪽에서 포장 작업하는 곳으로 슬며시 다가가 물었다. “포장하는 원두의 이름이 뭔가요?” 싱글 커피가 아니고 스니만 카페의 블랜딩 커피라고 한다. “혹시 한 번 맛볼 수 있을까요?”, “Sure”, 바로 볶은 커피를 맛보고 싶다는 욕망에, 순간 이성을 잃어 염치없이 얻어먹겠다는 나도 나지만, 이 사람들 정말 쿨하다.
인도네시아 커피의 역사는 침략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일찍이 향신료 무역으로 유명한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인도네시아를 식민 지배하던 네덜란드는 17세기 말 예멘에서 아라비카종 커피콩을 몰래 가져와 자바 섬에 성공적으로 이식하였다. 커피의 대규모 경작에 성공한 네덜란드가 유럽에 수출하여 돈방석위에 앉은 상품이 커피의 대명사인 Java커피다. 자바커피와 예멘의 모카 항구에서 들여온 모카커피를 블랜딩 한 커피가 모카자바커피이며 최초의 블랜딩 커피인 셈이다.
블랜딩blending 커피의 장점은 서로 다른 종류의 커피가 넘치거나 부족한 맛의 균형을 잡아 주면서 때로는 새로운 맛을 창출하기도 한다. 고소한 수제 비스킷까지 얹어주는데 nutty 한 풍미와 juicy 한 맛이 조화롭다. 날 찾아 내려온 남편까지 한 잔 더 뽑아준다. 친절함이 최고다.
창턱에 걸터앉아 얻어마신 스니만 커피와 비스킷, 공짜는 더 맛있다.
얼마 만에 마셔보는 신선한 커피인가, 숙성된 커피와 갓 볶은 커피를 굳이 비교를 하자면 똑같은 야채로 만든 샐러드인데 갓 볶은 커피로 내린 커피 맛은 밭에서 바로 뜯어온 야채로 만든 샐러드라고나 할까.
싱글 커피들을 종류별로 찜해두고 있었는데 노선을 바꿨다. “지금 포장한 블랜딩 커피 살 수 있어요?”, “No”, 날벼락같은 대답이었다. 지금 포장하는 커피는 특급호텔에 납품하는 커피라면서 개인에게는 한 번도 판매한 적이 없다고 한다. 실망한 내 모습이 슬퍼 보였는지, 호텔에 납품하는 최소 단위가 4Kg인데, 1Kg짜리 4개인 4Kg을 구입하면 가능하다고 한다. “오 마이 갓”, “그렇게 많은 것을, 그럼 2Kg만 파세요.” 결론은 4Kg을 샀으며 흐뭇한 마음으로 양쪽 캐리어에 넣어놓고, 싱글 커피들이 눈에 아른거려 다시 내려가 고민 고민하면서 3개를 더 골라왔다. 22L짜리 두 가방의 반을 미리 차지한 커피로 인해 집에 가지고 갈 선물은 하나도 넣지 못했다.
내가 업어 온 200g 단위의 , Bali Kintamani, Toraja, Aceh Gayo커피
가방의 부피 때문에 싱글 커피 중에서는 Aceh Gayo, Toraja, Bali Kintamani 3 가지만 업어왔다. 생소한 Bali Kintamani 커피는 봉투를 여는 순간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매운맛이 코끝을 스친다.
Batur 화산지대인 낀따마니 지역을 다녀왔던 터라 부드럽게 능선이 올라간 고산지대에서 자란 커피부터 맛보고 싶었는지 먼저 손이 간다. 원두의 색깔은 오랜만에 보는 밝은 갈색이다. 모카포트로 추출했어도 맑은 차처럼 보이는 커피는 가벼운 바디감이 혀를 미끄러지듯 감싸는데 첫맛은 풋복숭아와 오렌지맛이 나며 끝 맛은 청포도의 신맛이다. 약간 식으니 가벼운 탄닌 감도 느껴진다. 달콤하면서도 풍부하지만 산뜻한 신맛이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좋아할 만한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