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 금오도에서 힘든 트레킹으로 고단한 몸은 쉬엄쉬엄 힐링할 시간이 필요했다. 금오도 함구미항에서 12시 40분경 출발하는 백야도행 배를 타고 여수로 나왔다. 이틀간 보냈던 금오도의 짙은 녹색의 숲에서 나오니 3월 중순의 여수는 숨 쉬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정도로 미세먼지가 온통 뿌옇다. 여수 근방에서 하루 놀고 내일 서울로 갈 참이었는데, 다시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다. 기억 속에 잠시 넣어놨던 외나로도의 작은 섬, ‘애도’라고 부르는 ‘쑥 섬’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했더니 내일 아침 입도가 가능하다고 한다.
내비는 백야도 쪽에서 시작하는 연도·연륙교로 안내한다. 백야도에서 여수 화양면을 지나 조발도·둔병도·낭도·적금도에서 고흥까지 다리로 연결되어 경험하지 못한 환상적인 드라이브를 제공한다. 오른쪽은 망망대해 푸른 바다요, 왼쪽은 들여다보고 싶은 올망졸망 섬들이 앉아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정신없이 30여분 지나치다 보니 이미 고흥이다. 숙소는 내일 아침 일찍 애도(쑥 섬)를 들어가려면 배를 타기 좋은 여객선 터미널 근처가 좋을 것 같았다. 고흥에서 외나로도에 있는 나로도 연안 여객선 터미널까지 천천히 달려도 약 1시간이 채 안 걸린다.
오후 5시가 좀 넘은 시간, 여객선 터미널 앞에서 방을 찾았다. 꽤 큰 호텔임에도 방이 없다고 하면서 다른 호텔도 쉽지 않은 거라고 하신다. 알고 보니 내일은 근처에 있는 나로우주센터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다행히도 두 번째 찾아간 여객선터미널 앞에 있는 나로 호텔에는 우리를 위한 방이 하나 남아있었다. 4층 방에 올라가니 건너편 지근거리에 있는 쑥 섬에서 해가 떨어진다. 고흥 8경의 하나라던 쑥 섬 낙조 풍경이다.
나로 호텔에서 바라본 쑥 섬 낙조/ 쑥 섬은 나로도 연안 여객선 터미널 앞에서 3분 거리에 있다.
아침 일찍 호텔 부근 열려있는 식당을 기웃거리니 안에서는 구수한 찌개 냄새가 이른 아침부터 식욕을 부추긴다. 서너 명의 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분들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있다. 남들처럼 시킨 백반에는 무를 깔고 위에 작은 조기 6마리가 들어가 있는 끓고 있는 찌개가 나온다. 아침 댓바람부터 웬 생선찌개냐 하겠지만 시원하기가 엄마가 끓여준 조기 탕 맛이다. 마치 아침 백반을 먹기 위해 나로도를 방문한 것처럼, 맛과 투박한 식당의 분위기에 취해 하얀 밥 한 공기를 꿀꺽 삼켰다. 감동은 이런 곳에서 나온다. 남편이 두둑한 배를 어루만지며 본인이 애용하는 홍삼 액 한 포를 드리면서 답례를 했다. 나오면서 ‘대동 식당’이라고 쓰인 시골스런 이름을 확인하니 더 정겹다.
8시 30분 출발하는 애도(쑥섬)행 티켓을 끊으니 주민으로 보이는 한 분이 배를 타기 전에 주의할 점을 포함하여 섬 안내를 한다. 섬은 3분이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다.
12인승 예쁜 나룻배를 타고 쑥 섬 선착장에 닿았다. 주민 30여 명과 고양이들이 공존하는 섬답게 마을로 들어서는 길에 있는 고양이 조형물과 그림들이 사랑스럽다. 갈매기 카페 옆길로 난 길을 따라 섬을 오르다 보면 난대림 식물이 군락을 이루어 잠시 남국에 온 기분마저 든다. 바위와 식물마다 특히 나이가 많은 고목에는 애써 의미를 부여한 것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아끼는 이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선착장에서 정상에 있는 별 정원까지는 약 1Km 거리에 불과하다. 제법 가파른 당 숲길을 지나 2000년경부터 한 부부가 가꾸기 시작했다는 해발 83m 정상에 있는 별 정원에 다다르면 봄을 알리는 수선화와 유채꽃이 가득하다. 두 사람의 선한 마음은 섬 안의 나무 한 그루, 돌멩이 하나에도 닿아있다.
쑥 섬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이곳 정원에 가득한 수국을 배경으로 찍은 풍경이다. 3월의 별 정원은 몽글몽글 풍성한 수국이 있는 그림 같은 풍경은 아니지만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는 굳이 황홀한 꽃밭이 아니어도 족하다. 옆으로 이어지는 언덕에서 보면 왼쪽으로 해식애가 이어져 있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환희의 언덕이라 부른다. 사뭇 오랫동안 앉아 있고 싶은 곳이다.
3월 쑥 섬 환희의 언덕
섬에서는 돌과 나무는 물론 공기마저도 사랑을 듬뿍 받는다. /현대적이면서 이국적인 느낌의 무인등대
가파른 돌길을 따라 등대로 내려가는 길 위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방파제에 세워진 등대가 바다에서 솟아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거문도, 완도 등지를 다니는 배들을 위해 2000년 만들어진 태양광 무인등대이다. 작은 돌섬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수려한 남성미를 뽐낸다. 등대 왼쪽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또 다른 섬의 면모를 볼 수 있다. 돌아 나오는 길에는 마을을 끼고 걷는다. 집의 목덜미까지 감싼 긴 돌담과 애써 몸을 낮춘 지붕은 자연 앞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섬사람들의 애환을 함축해서 보여준다.
섬은 돌아보기에 따라서 1시간에서 1시간 30분이면 넉넉하다. 이 짧은 시간에 얼마나 쑥 섬을 알 수 있을까만 이곳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생태적인 특성을 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돌아 나오는 길, 갈매기 카페에 들어가면 무인 판매기가 맞아준다. 성수기에는 사람이 상주할 수도 있겠다. 차 한 잔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아늑하다. 창밖으로 펼쳐진 뷰가 멋지다. 나갈 참이라면 들어오는 나룻배를 확인할 수 도 있다.
바닷가 마을, 이렇게 지붕이 담장 아래 몸을 낮춘 풍경은 이곳이 갑이다.
"연홍아, 연홍아" 연홍도
11시경 쑥 섬을 나왔으니 두 시간 남짓 섬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무작정 거금도에 있는 신양 선착장으로 향했다.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연홍도를 가기 위해서다. 쑥 섬에서 나오자마자 서로 주고받은 짧은 몇 마디, 광속으로 결정한 목적지였다. 애도(쑥 섬)처럼 전화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홍도는 고흥반도 서쪽 거금도 앞에 떠 있다. 그러므로 외나로도 앞에 있는 쑥 섬과는 거리가 꽤 된다. 낯선 길이어서 1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가까워 오니 좁은 길이 한참 이어지는데 신양 선착장이다.
선착장 옆에는 작은 주차장이 있는데 차들이 많아 어렵게 주차를 했다. 배를 타려고 하는 사람 즉 관광객은 별로 없는데 주차장이 왜 이렇게 번잡할까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연홍도를 나오면서 알게 됐다.
도착해서 잠깐 기다리니 마을버스 한 대가 주민들을 쏟아놓더니, 길쭉한 몸으로 누워있는 형상의 연홍도에서 출발한 배 한 척이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마을버스와 배는 한 몸이다. 쑥 섬에서처럼 예쁜 12시 30분 배를 타고 연홍도로 들어왔다. 해안선 길이가 약 4Km라고 하지만 이곳저곳 들락날락거리면서 살피고 다니면 거리는 훨씬 더 길어진다. 2시 30분 배로 나가야 하니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버스가 도착하여 사람들을 내려놓고 나니 마주 보이는 섬 연홍도에서 배가 들어온다.
마을은 쑥 섬처럼 험준한 산이 아닌 부메랑처럼 생긴 길쭉한 낫 모양의 구릉 형상이다. 마을 입구 안내에는 “300여 년 전 밀양 박 씨가 처음 입도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라고 쓰여 있는데 다른 곳에는 400년 전에 들어왔다고도 되어 있다. 어쨌든 300년, 400년 전이면 17, 18세기 조선시대이다.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 시대 초기에 우리 땅에 있는 작은 섬에는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다. 나라에서 취한 공도 정책 때문이었다. 공도 정책은 큰 섬을 제외하고 국가가 강제로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섬사람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고 섬을 비운 정책이다. 지금은 매우 어리석은 정책으로 생각이 되지만(오랜 섬의 역사를 단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독도 문제도 공도 정책과 관련이 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했던 고려 시대 말부터 조선시대 초기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섬을 보호 관할하기에는 국가는 인구가 많지 않았으며 섬들을 방어하기에 심히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내린 정책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섬들은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육지와 가까운 섬들은 말을 키우던 국영 목장으로 변해갔다. 서남해안의 섬을 다니다 보면 마을에 목장과 관련된 지명과 이야기들이 남아있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다. 성종 이후 안정기에 접어들자 사람들이 조금씩 섬으로 들어갔으며, 임진왜란 이후 세수가 부족한 정부는 섬 개간과 간척을 위해 섬 이주를 독려했다. 인구 증가 폭이 많았던 숙종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섬으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17세기 말과 18세기 조선은 숙종과 영조, 정조의 치세기로 왕권이 강화되었으며 상업이 발전하였고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안정기를 누린 시기다. 세종 시대 이후 다시 찾아온 르네상스였다. 15세기 조선 시대 초기 인구가 약 500만 명이었다가 16세기 중반에 약 100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임진왜란과 정묘와 병자호란을 겪은 후였지만 18세기 중반 조선의 인구는 약 14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한다. 이러한 인구 증가와 자유로운 사회적 변화는 많은 이들이 섬으로 이주한 요인으로 보인다.
3, 400년 전 밀양 박 씨가 이주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 시기와 맞물린다. 하지만 '처음 입도하여' 란 내용은 틀렸다. 우리나라 서남해안의 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역사는 결코 우리나라 육지의 역사보다 짧지 않다.
들어오는 이들의 발열체크를 하는 것부터 전부 주민들이 나선다. 섬의 분위기는 입구부터 진짜 살아있는 미술관이다. 마을의 역사 사진 벽화를 보고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친근한 국민 선수 박지성이 자신의 등 번호 셔츠를 들고 활짝 웃고 있고, 주민들의 얼굴도 있고, 동화 같은 엄마 품 벽화 앞에서는 울컥한 마음이 앞선다.
연홍도 지도/ 섬 안의 안내 표지판
섬은 어느 한쪽이라도 거칠게 튀어나온 부분이 없는 걷기에도 좋은 완연한 구릉이다. 3월인데도 밭에는 제법 많은 작물들이 올라와 있다. 농사짓는 것만 본다면 육지의 여느 농촌과 다름이 없다. 지금은 풍요로워 보이는 농지는 지나간 이들의 피와 땀의 결과이다.
세월의 이끼를 품은 회색 빛 담장 위로 솟아오른 다홍색과 파란색 지붕은 텃밭의 농작물과 함께 생동감이 넘친다. 뒤로 보이는 금당도의 멋진 실루엣은 마을을 돋보이게 해 주는 배경이다.
아르끝 숲길을 걷다가 동백나무 뒤에서 인기척에 놀라 퍼드득 날아가는 장끼를 보았다. 날아간다기보다는 도망간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꿩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허둥대는 모습을 보면 정말 사랑스럽다. 내가 사는 서울 목동 안양천변에서도 눈에 자주 띄는 데 반가웠다.
마을길에는 동심을 자극하거나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래픽과 정크 미술이 주류를 이룬다. 파이프와 깡통, 부목, 로프, 부표로 쓰이던 스티로폼 덩어리까지 생활 속에서 사용하던 모든 것들이 정크 미술의 재료가 되었다. 정크 미술은 사람이 사용한 쓰레기나 폐품 등이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자원을 활용하는 환경보호 차원에서도 권장해야 할 영역이다.
알록달록 섬마을의 지붕들, 잘생긴 섬 금당도가 연홍도를 돋보이게 해준다.
아름다운 뒷모습, 연홍도 골목길에서
마을 뒤쪽에는 2006년 개관한 ‘섬 in섬 연홍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섬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는 곳이다. 원래는 1998년에 폐교된 연홍 분교였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리에 학교가 있었다니, 학교 앞에 있는 오목한 만은 여름날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학생들의 놀이터였겠다. 이곳에서 공부를 했던 아이들은 지금쯤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지금 이곳에는 그 찬란했던 시절의 아이들 대신 커다란 은빛 물고기가 한 마리 산다. 앞바다는 금당도가 지척이다.
마을을 두 시간 가까이 돌고 나가는 길에 배를 놓칠까 봐 바쁜 마음 중에 40, 50대로 보이는 긴 장화를 신은 한 무리의 아저씨들을 보았다. 수거한 바다 쓰레기를 자루에 담고 있었다. “주민들이 깨끗한 마을을 유지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구나” 생각하면서 지나쳤다. 2시 30분 출발하는 배를 타기 위해 점점 급하게 걷고 있는데 쓰레기를 수거하던 아저씨들도 열심히 걷는 내 뒤를 따라온다. 배를 타고 나서야 그들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지만, 다른 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분들이라고 짐작했다. 주기적으로 마을에 들어가 마을 청소를 하고 나오는 거였다. 이들이 좁은 주차장을 빽빽하게 만들었던 주범들이었다. 휘리릭, 각자의 차를 타고 가는 그들의 등 뒤에서 이유 없이 그들이 부러웠다. 학교 앞 호수 같던 바다에서 물장구치며 깔깔거리던 소년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