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처럼 걸려있는 하얀 로프

# 한국의 섬 - 신시도

by 그루

어쩌다 보니 고군산군도를 향한 발길이 벌써 세 번째다. 고군산군도가 주는 매력만으로 이곳을 찾는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이미 무자비하게 잘리고 파헤쳐진 땅의 속살 위에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지나다니는, 아직도 진행형인 개발의 상처는 충격이었고 마음이 아팠다. 애잔한 마음이 이곳을 다시 찾도록 만들었을까, 다시 방문할 때마다 새록새록 조금씩 알아가는 이 땅의 이야기와 섬만이 안겨주는 옹골찬 기운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냥 이 땅이 보여주는 대로 차근차근 바라보고 싶었다. 고군산군도에서 가장 큰 섬이며 선유 8경으로 이름난 월영봉과 대각산이 있으며, 지금은 새만금 방조제의 갑문이 있는 곳으로 알려진 신시도를 찾았다. 신시도는 2005년 섬의 태생까지 찾을 수 없게 변해버린 비응도(군산의 비응항), 가까이 위치한 야미도와 함께 새만금 방조제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시원하게 뻗은 새만금 방조제길, 군산에서 부안까지 이어진다.


섬은 바다 위로 솟아있는 땅이다. 특히 대한민국의 섬들은 몇 개의 섬을 제외하면 뾰족한 산의 형상을 하고 물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그래서 섬의 높은 곳에 오르면 자연스럽게 그 섬의 모습이 파악된다. 섬에서는 섬 산행을 먼저 해야 하는 이유다. 해안선을 돌아보는 것은 그다음이다.



넓은 신시도 주차장(새만금휴게소)에 내리면 섬의 동쪽에 있는 월영봉(198m)으로 오르는 안내지도가 맞이한다. 가끔은 틀린 안내도도 발견하지만 지도는 늘 반갑다. 친절한 들머리를 조금만 올라가도 신시도와 무녀도, 선유도, 장자도 등 고군산군도가 아스라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섬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것도, 한 점 없이 확 트인 시야를 느끼며 멍 때리는 순간까지 육지의 산에서 맛보기 힘든 섬 산행의 백미다. 월영봉을 오르는 길에 수직절리가 촘촘히 나 있는 밝은 색의 암릉은 얼마 전에 다녀온 관리도의 지질과 같다. 어쩌면 이것을 확인하고 싶어 신시도를 찾았다고 하는 편이 옳다.


월영봉의 단풍은 선유 8경에 들어갈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낙엽이 떨어진 녹색이 사라진 초겨울의 월영봉의 산기슭에는 알록달록한 단풍 대신 망개나무 열매들이 햇살을 받아 붉은 구슬처럼 영롱하다. 얼마나 많은지 이곳은 망개나무 군락지임에 틀림없다. 20여분을 오르니 신시도는 물론 멀리 고군산군도가 고스란히 다 보인다. 10분을 더 가면 월영봉 정상이다. 산 아래를 내려다보면 신시도는 그만그만한 봉우리들이 모여 섬을 이루었다. 횡경도, 방축도 등이 길게 둑처럼 신시도 앞을 막아준다. 그래서 ‘깊다, 또는 아늑하다’라는 뜻을 가진 지풍금 지명이 남아있다. 봉우리 사이에는 간석지를 개발한 귀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월영봉에서 대각산까지 가는 길, 봉우리 사이에는 여지없이 농경지가 있었다. 저수지 두 곳을 만났다.


뒤를 돌아 북동쪽을 바라보니 방조제에 걸려있는 깃발처럼 야미도가 펄럭인다. 고군산도를 향하는 첫 번째 길목에 불과했던 야미도는 영어의 ‘yammy’가 생각나 고개를 갸우뚱했을 뿐 안중에도 없었는데 불현듯 야미도가 궁금하고 눈에 밟혔다. ‘yammy’는 영어로 맛있는, 매력적인, 아름다운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야미夜味도의 뜻 또한 ‘맛있다’라는 뜻이 들어있다.

대각산 방향으로 내려가는 암릉 구간에 빗으로 긁은 자국이 난 커다란 핵석 하나가 길목에 서 있다. 선 방향으로 풍화되어 절리가 생길 것을 알려주는 자국이다. 아이들에게는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지질학 수업은 이런 곳에서 해야 한다. 녹색 이파리들이 사라진 겨울 산에서는 포르르 날아가는 작은 새들의 날개 짓까지 쉽게 눈에 들어온다. 이것뿐이랴, 낮은 산들의 능선 위 나뭇가지들 사이로 반짝이며 새어 나오는 역광은 서늘한 기운과 더불어 이 계절만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신시도의 동과 서를 가르는 차도 위로 대각산 쪽으로 향한 고가가 연결되어 있다. 고가를 넘어 낮은 능선 하나를 넘으면 예쁜 몽돌해수욕장이 나온다.


월영봉에서 바라본 신시도와 고군산군도
월영봉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핵석, 풍화의 초기 단계의 모습이다.


데크 뒤쪽 해수욕장 왼편으로 난 봉우리를 넘으면 삼각산 모양의 대각산 암릉이 기다리고 있다. 전망대가 있는 산의 정상까지 파도의 물결처럼 걸려있는 하얀 로프가 긴장감을 일으킨다.


섬 산행으로 이름난 곳은 육지에 있는 산에 비해 대체로 거리는 짧지만 쉬운 곳은 많지 않으며, 오히려 악산에 가깝다. 정상 가까이 이어져 있는, 잡으면 가루가 하얗게 묻어나는 로프를 잡고 거의 기어서 올랐다. 조심성이 지나친 나는 영원히 등린이다. 반대편에서 내려오던 두 명의 남자들도 조심조심 엉금엉금 기어가듯 내려간다.

대각산 정상에 서니 신시도 마을의 지붕 위로 늦은 오후 햇살이 부서져 내린다. 예전에는 남동쪽인 방조제 쪽에서 북서쪽에 있는 마을을 가려면 오늘처럼 산을 넘거나, 배를 타고 가야만 했다고 한다. 깊은 만에 자리 잡은 마을 앞에는 방축도, 횡경도 등이 파도를 막아주어 편안하고 아늑해 보인다.

새만금 방조제가 있는 남동쪽에서 대각산이 있는 북서쪽까지 갔다가 새만금 주차장까지 원점회귀를 하는 시간까지 4시간을 계획했다. 그러나 오전 11시경 시작했던 산행은 계획에 없던 두 개의 산을 더 넘다 보니 산행시간이 훌쩍 길어져 버렸다.

신시도는 작은 산이라도 바위 투성이인 산등성이와 섬세한 주상절리가 풍화되어 발달한 너덜길 투성이다. 하루 종일 뾰족한 너덜길에서 열일하여, 이미 묵직해진 등산화 안에서 내 긴 발가락들은 이미 정신줄을 놓기 직전이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어둠이 내린 신시도 해안선 도로까지 섭렵할 줄이야.


대각산 암릉
곧 풍화를 마치고 너덜길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암릉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변할 것이다. 몽돌 바닷가에서
다음 날 신시도 앞바다 모습/ 신시도 숙소에서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