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나라 바닷바람

# 한국의 섬 - 진도 - 동석산, 남도진성

by 그루


슬픔을 걷어내고


왜 그랬을까, 의식 속에서 진도 아리랑의 고향 진도는 내게 거제도나 통영, 남해, 고흥, 해남은 물론 부산이나 여러 번 다녀온 제주도보다도 훨씬 더 멀리 자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하여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항(팽목항)에서 30km 떨어진 진도의 남서쪽 바다 ‘맹골수도’에서 침몰하여 죽거나 실종된 약 300여 영혼들이 의탁한 땅이 되었다. 물살이 맹수처럼 사납다고 해서 붙여진 ‘맹골수도’는 우리나라에서 '울돌목(명량해협)' 다음으로 유속이 빠른 곳이며 그동안 해난 사고도 잦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서 유속이 가장 빠른 바다 두 곳이 진도에 속한다. 이후로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아린 슬픔의 땅은 나를 더욱 다가서기 어렵게 만들었다. 살아있음으로 인해 그들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오전 9시 30분경 서울에서 진도로 향했다. 긴 운행에 부담을 덜기 위해 중간쯤 되는 군산 시내로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지나 해남 우수영에서 1984년 개통한 진도대교를 건너 진도로 넘어왔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도와 거제도 다음으로 큰 섬이 진도이다. 첫걸음인 만큼 지나치는 풍경들이 예사롭지 않다. 크고 수려한 돌산이 많은 해남의 기운이 진도에서도 여전히 이어지는 것처럼 곳곳에 나지막한 돌산들이 평지에서 불쑥불쑥 튀어 올라와 있다. 넓은 섬이어서 섬을 가로질러 남서쪽에 있는 진도항(예전 팽목항)까지 가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겨울철이지만 남쪽 나라 바닷바람 때문인가, 진도항은 오후, 네 시가 가까워져도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일몰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쨍한 햇살에 눈이 부시다. 낚싯배에서는 낚시꾼 아저씨들이 상자를 내리고 있다. 어깨가 축 처진 것이 오늘 조과가 안 좋은 거다. 헐렁한 주차장을 가로질러 빨간 등대가 보이는 방파제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빛바랜 노란 리본들이 초라하게 묶여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리본들은 여전히 발랄하다. 펄럭이는 소리에 그날의 아우성이 지나간다. 이들의 흔적을 느끼기라도 하려는 듯이 방문객들의 발걸음은 숙연하고 더디다. 어쩔 수 없이 썰렁한 공간이지만, 온기가 있는 흔적들이 느껴지며 여전히 이곳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도리어 위로받았다.

잊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


진도항에서 20여 분 서쪽으로 가면 낙조로 유명한 세방낙조가 나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낙조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인데, 뿌려지듯 떠 있는 섬들의 실루엣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세방낙조


동석산


서울에서 2박 3일 진도 여행을 준비할 때는 세월호를 추모할 수 있는 진도항(팽목항)운림산방 외에 숙소에서 가까운 접도 트레킹이나 첨찰산(485m) 산행 정도를 계획에 두었다. 그러나 막상 당일에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동석산 앞에 섰다. 전날 진도항에서 세방낙조를 보기 위해 지나는 길에 돌산 하나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었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눈을 떨 수 없는,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바위산에 서려 있다고나 해야 할까, 검색해 보니 산악회에서는 꽤 알려진 산이다.


동석산(217.7m)은 진도의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평지에서 갑자기 불쑥 솟아오른 경사가 급한 잔구형의 바위산이다. 다만 다른 산들과 다른 점은 산 자체가 한 개의 바위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바위의 지질이 다른 부분조차도 자세히 보면 연결되어 있다. 날씨 탓인가, 바위의 볼륨감은 밝은 색으로 인해 더욱 팽창해 보인다.


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바위산


인근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는 교회 건물이 두 개인데 한 곳은 사택 같아 보였다. 왼쪽에 있는 종성교회를 바라보며 데크 계단으로 올라가는 곳이 동석산의 들머리이다. 들머리에 들어서면서부터 로프를 잡거나, 다리를 찢어야 진행할 수밖에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위험하지만 곳곳에 안전장치를 신경 써서 해 놓았다. 하지만 초입에서 얼마 못 가 한참을 망설였다. 90도 각도의 암릉의 폭에 맞는 대여섯 칸 정도의 90도에 가까운 짧은 사다리가 놓여있었다. 겁이 많은 내게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느낌의 사다리, 동화 ‘해님과 달님’에서 오뉘가 타고 올라가는 하늘 사다리였다. 나보다 아주 조금 용감한 남편은 어느새 사다리를 넘어가 저만치 서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그의 불안한 눈초리는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내가 넘어가지 않으면 남편은 하늘 사다리를 다시 넘어와야 한다. 세 번쯤 사다리 오르기를 시도했다가 포기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는 길이 더 걱정스러웠다. 그때 건너편 천종사 절 쪽에서 올라오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 사다리를 넘어가서 남자가 올라온 절 방향으로 가면 편하게 하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덕분에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사다리를 올라가니 불안해하던 남편은 이내 입이 함박만 해진다.


동석산은 217.7m에 불과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구간이 없다고 할 만큼 험하다. 그렇지만 훌륭한 안전장치는 일반인도 산행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정상을 향해서 가다 보니 졸깃졸깃한 바위산 오르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시야는 어느 방향에서도 트여 있어 시원한 해방감은 산행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준다. 원점회귀 코스라면 2시간에서 3시간 충분히 만족할 만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남자가 올라왔던 천종사(절) 부근의 들머리는 내려올 때 보니 등산로를 폐쇄했다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하산길에서 뒤 돌아본 동석산. 오른쪽 중앙에 작게 보이는 건물은 천종사


진도읍에 있는 운림산방을 가기 위해서 지나다녔던 의신면 삼거리 한 편에 ‘왕 온’의 묘가 보인다. 두 번이나 내릴까, 하다가 운전하는 남편에게 의사 표현을 못 하고 지나쳐버렸다. 진도에서 뜻하지 않은 인물을 만났다. 이제야 “다음에 가면 꼭 들려야지” 생각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왕 온과 삼별초의 난


별초別抄는 고려 시대 정규군 외에 정부나 지방에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군사 조직이다. 초기에는 무신정권의 사병조직이었다가 자연스럽게 정규군으로 편입되었다. 야별초에서 갈라진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신의군을 삼별초로 불렀다. 무신정권의 권력을 등에 업은 그들의 힘은 수십 년 동안 무신 권력을 지탱시켜 주는 힘이 되었다.

삼별초의 난은 기울어지는 무신정권과 100년간의 무신 집권기를 청산하고 권력을 되찾으려는 왕권과의 힘겨루기에서 시작되었다. 단지 고려의 왕은 몽골에 굴복하고 그들의 힘을 빌렸으므로 삼별초가 내건 기치는 ‘개경 환도 반대’와 ‘몽골항쟁’이 되었을 뿐이다.


1170년 이의방에 의해 시작된 무신정권은 1196년 이의민 세력을 꺾은 최충헌에 의해 최씨 무신정권으로 이어졌다. 1231년 몽골 침입으로 최충헌의 뒤를 이은 최우는 강화도로 천도한다. 최항, 최의로 이어진 최씨 무신정권은 김준에 의해 끝이 났지만 임연과 임유무로 이어진 무신정권은 계속되었다. 1270년 몽골의 압력에 의해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고 하자 당시 무신정권 수장이던 임유무의 저항에 부딪혔으나 그가 암살당하면서 1170년 시작된 100년간의 무신정권은 막을 내린다. 자연스럽게 그동안 무신정권의 권력 기반이었던 삼별초가 해체된다. 위기를 느낀 이들은 1270년 왕족인 승화후 ‘왕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난을 일으켰다. 삼별초의 난이다.

‘왕 온’의 운명은 이때 정해졌다. 강요에 의해서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삼별초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삼별초의 권력이 만들어낸 찰나의 운명을 그는 직감했을까. 현종의 먼 후손이었던 그는 수많은 왕족과 마찬가지로 이름 없이 장수를 누리고 살 평범한 운명이었다. 그러나 불운한 시대가 그의 이름을 역사로 불러내었다.


삼별초는 세가 불리해지자 강화도의 재산과 사람들을 데리고 당시 군량미까지 자급자족이 가능한 군사 요충지로, 세곡선이 다니는 진도로 이주하였다. 항전에 전략적으로 유리한 진도를 점령한 그들은 용장성을 쌓고 궁궐도 지었으며 초기에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제주도까지 세력을 확장한다.

하지만 1271년 음력 5월에 조직된 고려와 몽골의 연합군에 삼별초 군이 패하면서 승화후 온은 아들 ‘환’, 배중손과 함께 살해되었다.


삼별초의 남은 세력은 제주도로 피신하여 항파두리성을 중심으로 항쟁을 계속하다가 1273년 음력 4월 연합군에 무너지면서 3년에 걸친 그들의 항쟁은 막을 내렸다. 그들의 말대로 과연 몽골에 항쟁하기 위해서였는지, 수십 년간 누려온 영달의 시간이 끝나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는지 그들의 일터였던 도읍지 강화도를 불태우고 모든 재산을 긁어모아 민간인들과 노비까지 데리고 진도로 도피한 삼별초에 관한 판단은 제각각이다.

남도진성

남도진성


진도에서 삼별초가 마지막으로 싸운 곳으로 알려진 남도진성은 여몽 연합군에게 밀려 왕궁이었던 용장성에서부터 퇴각하면서 치열하게 싸운 10일간의 전투에서 삼별초의 지도자 배중손이 최후를 맞은 곳이라고 한다. 배중손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 왕 온은 아마도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을 확률이 높다. 지금의 남도진성 앞바다는 작은 섬들이 둥실둥실 떠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나머지 세력은 이곳에서 제주도로 피신하였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남도진성은 국토의 남과 서쪽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왜구의 노략질이 극에 달했던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610m에 달하는 돌로 쌓인 성벽을 들어서면 무너진 성벽 돌 더미를 옆에 두고 관청이나 혹은 객사로 사용했을 ‘一’ 자형 한옥 건축물이 처연할 만큼 고요하게 앉아있다. 남아있는 온돌과 굴뚝을 보니 집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듯하다.


아름다운 처마의 서까래와 성 안의 한옥/ ‘一’ 자형 한옥은 앞 뒤로 창이 많다.


성 밖에는 어디에서나 있을 것 같은 한국의 옛 마을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개울이 흐르고 그 위에는 작은 아치형 다리가 두 개 걸려있다. 이것들을 쌍운교, 단운교라고 부르는데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이상하리만큼 소박하다. 마을 사람이면 개울에서 주어온 돌로 누구나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예쁜 다리 위로 우리의 선조였던 옛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남도진성 앞 쌍운교와 단운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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