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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Feb 20. 2024

나는 노예가 아니오!

# 모리셔스 - 포트루이스

   

모리셔스 공항에 내리자마자 모리셔스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인도계 모리셔스 사람 택시드라이버였다. 숙소로 가는 길에 있는 포트루이스팜플르무스 식물원을 들렀다 가기로 계약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그는 막 도착해 지쳐 있는 여행자에게 편안한 안내자는 아니었다. 여행길에 어쩌다 마주친, 다소 불편했던 사람들(물론 일부에 불과하다)의 모습과 겹쳐졌다. 자꾸 다른 곳을 가자고 하는 그에게 애써 불쾌한 표정을 감춰야 했다.


모리셔스의 첫 풍경은 복잡한 도심과 길 양쪽으로 펼쳐진 사탕수수밭이었다. 도심에서 솟아있는 사탕수수밭 뒤로 보이는 원추형 산들은 실로 기이해 보이기까지 했다. 내가 받은 말없는 충격은 천국을 닮은 세이셸의 섬들을 다녀온 후여서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짙푸른 정글로 뒤덮인 원시적인 화산섬 레위니옹에서 오는 느낌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수도 포트루이스의 다운타운은 복잡하고 부산한 도시의 느낌이 강했다. 어디를 가든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거나 사탕수수밭이었다. 게다가 내가 만난 모리셔스 사람들은  여유가 없어 보이는 흔하디 흔한 도시사람들이었다. 이 무너진 기대감은 남동부에 있는 르몬 산을 다녀온 후에야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그리고 인구가 많을 수밖에 없는 모리셔스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3박을 했던 아파트먼트형의 숙소에 도착하니 열쇠를 가지고 온 숙소 주인은 인도계였다. 그와 몇 번 얼굴을 대하고 나니 그도 택시운영을 하는 것 같았다. 레위니옹처럼 모리셔스에서도 인도계 주민들이 운수업에 많이 종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숙소 근처에서 찾은 레스토랑도 인도계 모리셔스인이 운영하는 인도식 음식점이었다. 심지어 물을 사러 들어간 슈퍼 주인도 인도계 사람이었다. 세이셸이나 레위니옹에서처럼 모리셔스 북부에서는 마다가스카르나 아프리카 동부의 피가 섞인 크리올 주민들의 모습은 찾기가 어려웠다.


3박을 했던 아파트먼트형의 숙소에서 바라본 밖 풍경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저지대까지 숲을 이루었던 모리셔스의 나무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에 이어, 1715년 점령한 프랑스 사람들과, 1810년 모리셔스를 접수한 영국인에 의해 거의 사라져,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모리셔스를 떠난 네덜란드에 이어 프랑스는 더욱 넓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개발하였다. 이들은 마다가스카르와 아프리카 동부에서 더 많은 노예들을 데려왔다. 수익이 많은 사탕수수 농장에는 사탕수수를 가공하는 공장까지 만들었다. 사탕수수를 가공하는 공장은 모리셔스의 질 좋은 나무들이 땔감으로 사용되었다. 1810년 영국이 통치를 시작하고 나서도 사탕수수는 해마다 호황이었다.


그러다가 1834년 노예무역은 불법이 되었다. 계약노동자로 섬에 들어온 인도인들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제주도만 한 작은 섬 모리셔스의 인구밀도는 점점 높아졌다. 이주민은 산기슭의 남아있는 숲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나무로 집을 지었으며 남은 허드레나무로는 땔감을 만들었다. 노예무역과 설탕 가공으로 유명한 영국의 리버풀을 위시한 항구로 사탕수수 원당을 나르기 위해 기차가 운행되었다. 증기기관차를 달리게 만드는 것도 모리셔스의 나무를 사용했다. 베어도 베어도 쑥쑥 자랄 것 같은 정글을 이루었던 모리셔스 섬의 나무들은 어느 틈에 산 봉우리만 남기고 사라져 갔다. 현재 모리셔스의 남아있는 정글을 유추할 수 있는 곳은 도망친 노예들이 숨어들었던 남동부의 산악지역북서쪽의 모카 산맥 등지에 불과하다.


시티델에서 바라본 포트루이스 항구


미국 작가 마크트웨인 Mark Twain(1835~1910)은 1895에서 1896년 사이 약 1년 동안 여행기를 집필하기 위해 세계일주 길에 올랐다. 시절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글을 써서 어떻게든 해결을 하기 위해 여행길에 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여행기의 내용은 그의 성품처럼 시종일관 유쾌하고 따뜻하다. 톰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핀의 모험으로 인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그의 필력이 어디 갈까. 그는 태평양을 넘어 인도양을 거쳐 아프리카를 돌아 영국에서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그가 탄 증기선은 요즘으로 말하면 크루즈선이었다. 여객선은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 남쪽에 들르기 전, 4월 15일 인도양 서쪽의 섬 모리셔스 섬에 잠시 정박했다. 그가 모리셔스 섬에 내렸던 시기는 모리셔스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약 20여 년이 흐른 후였다. 영국은 인도계약노동자들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것이다. 1986년 영국령 모리셔스는 인도양에서 가장 북적이는 섬 중의 하나였다. 이 날 마크트웨인은 부두에서 일하는 수많은 인도인들을 보았다. 그날의 생각을 여행기에 아래와 같이 실었다.  

     

“모리셔스에는 인도에서 온 짐꾼들이 유독 많다. 지금은 그들이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높지 않아 보이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 이 근면한 종족은 번 돈을 차근차근 모아 조금씩이나마 땅을 살 것이고, 그렇게 해서 언젠가는 모리셔스 섬을 몽땅 차지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방문이 있었던 1896년의  인도계 인구의 비율은 현재와 많이 다르지 않았던 시기이다. 그때부터 한 세기가 지난 현재, 모리셔스는 세계에서 가장 조밀한 인구밀집지역이며, 마크트웨인의 예상대로 이곳에 거주하는 인도계 주민은 모리셔스 인구의 약 68퍼센트를 차지한다. 반면에 크리올은 약 27퍼센트이다. 내가 모리셔스를 여행하면서 돈을 거래(택시, 슈퍼, 레스토랑 등)한 이들은 모두 인도계 모리셔스 인들이었다. 모리셔스의 상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은 인도계 모리셔스인들인 것이다. 이 시기 영국의 힘에 의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간 인도계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족속에 비해 부유하다. 부유한 이들은 마크트웨인의 말대로 어쩌면  모리셔스 섬을 몽땅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1834년 영국 제국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였다. 노예제도 폐지를 했다고 해서 단번에 노예무역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려 1세기가 지난 20세기말이 되어서야 지구상에서 표면적인 노예무역은 사라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400년 동안 노예무역으로 부자가 된 유럽제국은 노예무역이 떠받치고 있는 경제적 타격을 서서히 헤쳐나가야만 했다. 서인도제도와는 달리 모리셔스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은 성공적인 생산량을 갱신하고 있었다. 노예들을 대체할 수 있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영국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노동자들에게 눈을 돌렸다. 모리셔스는 거리상으로도 인도와 매우 가까웠다. 그러므로 노예무역을 통한 강제노역에서 자유계약노동으로 전환하는 대규모 실험장으로 모리셔스는 매우 적합했다.


나는 노예가 아니오!


영국인들은 인도에서 최초의 계약직 노동자를 불러 모았다. 계약기간은 5년이며 일급은 28센트였다. 물론 왕복 뱃삯은 무료였다. 글을 모르는 다수의 인도인들은 계약노동 조건에 속아 사인을 하고 콜카타(캘커타)항에서 모리셔스행 배에 올랐다. 이중에는 납치된 이들이 적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들이 탄 배의 환경은 예전의 노예선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족쇄나 채찍 따위는 사라졌다. 적어도 이들은 노예는 아니었으니.   

  

배에서 모리셔스에 내린 첫 이주민들이 마주한 것은 노예들이 사용하던 움막 같은 숙소뿐이었다. 계약노동자를 맞이할 어떤 준비도 없이 영국은 모리셔스에 인도인 이주민들을 데려온 것이었다. 1849년이 되어서야 계속되는 이주민들을 위한 창고형 숙소가 포트루이스 Fort Louis 항구 Trou Fanfaron 지역의 동쪽 만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주민 자신들의 손으로 지어진 수용 시설은 인도식 모르타르를 사용한 건축방법을 사용하였다. 수용시설은 1857년까지 언제든지 모리셔스에 입항한 이민자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로 확장되었다. 대규모 수용시설인 아프라바시 가트는 이주민들이 꼭 거쳐가는 출입국관리소가 되었다. 아프라바시 가트 Aapravasi Ghat는 인도식 명칭이다. 즉 인도계 외에 들어온 다른 이주자들은 매우 소수에 불과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을 통해 1834년에 시작되어 1923년까지 이어진 모리셔스로 들어온 인도 출신 계약이주민의 숫자는 약 50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러므로 아프라바시 가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집단이 이주한 유적이다.

아프라바시 가트에는 창고 형의 수용소와 사무실, 옥외 화장실 및 샤워장이 갖춰져 있다. 수만 명이 들락거리는 곳의 공중 화장실과 샤워장이 해안선에 접해 있다. 바다의 오염은 눈에 보이듯 뻔했다. 당시 포트루이스 항구는 오염수가 흘러들어 바다는 심한 몸살을 앓았을 것 같았다. 몇 해전(2020년) 일본 유조선의 기름 유출 사건이 떠올랐다. 일본 선박은 경로 수정 요청을 묵살하고 항해하다가 모리셔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동쪽 해안에서 좌초되었다. 이 지역에 암초와 산호초들이 많은 것을 아예 모르거나 간과한 것이었다. 유출양(중유 1천 톤)은 해양 관광국인 모리셔스에 매우 심각한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미흡한 대처는 입방아에 올랐다. 그러나 2007년에 발생한 대한민국의 대기업이 일으킨 태안 기름유사고(1만 9백 톤)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트루판파롱 아프라바시 가트 옆에 위치한 워터프런트
복원한 아프라바시 가트  건물의 일부/ 오피서들을 위한 부엌
1930년, 우체국앞에 사탕수수를 실어나른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레일이 나있다 en.wikipedia/현재의 우체국(아프라바시가트 옆)


모리셔스는 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인도인 계약노동자를 성공적으로 받아들였다. 족쇄는 사라졌지만 수백 년 동안 다져온 노동착취는 형식만 달리하는 것이었다. 근대판 노예 노동 계약은 오히려 플랜테이션 오너들에게 안정감을 가져왔다. 이 방법은 노예무역을 통해 노동력을 조달했을 때보다 위기감이 적었을 뿐 아니라 사탕수수 수확량의 감소도 나타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실시한 계약노동 이민정책이 성공하자 영국은 재빠르게 영국령 서인도 제도까지 인도 계약노동자 수용을 확대하였다. 다만 가까운 모리셔스와는 달리 인도에서 카리브해까지는 87일 이상이나 걸렸다. 노예들이 족쇄를 차고 갑판아래 열을 맞춰 누워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 해도 열악한 배의 환경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목숨을 위협할 만큼 힘든 항해였다. 일거리를 찾아가던 배 안에서 생의 마지막을 달리 한 사람들도 생겨났다.

      

인도계 주민들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인도계 다음으로 많은 중국계 계약노동 인구는 두 번의 아편 전쟁(1차(1840~1842), 2차(1856~1860)) 이후에 모리셔스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이주했다. 당시 중국은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 독일 등에게 종이호랑이 취급을 당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수많은 중국인들이 계약노동자로 세계 각지로 이주하였다. 중국인들은 원해서 이주한 노동자보다 납치되거나 속아서 이주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음은 물론이다. 이들이 모리셔스에 정착한 중국인들의 선조이다.


포트루이스의 차이나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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