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리셔스 - 팜플르무스 식물원((SSR 보타닉 가든)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점령한 땅의 식물들을 연구하기 위해 식민지에 식물원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점령한 땅의 식물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어렵게 구해온 각종 향신료를 비롯한 희귀한 식물들을 시험하고 키우며 보급시켰다. 자신들이 황폐화시킨 땅의 복원을 위해서가 아니었으며, 자연을 사랑하는 그들의 고귀한 취향 때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직 식물의 결실에서 창출되는 돈이 목적이었다.
학자와 화가, 특히 식물학자들은 탐험가와 신부와 목사들처럼 침략의 선봉에 서 있었다. 그들이 원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결론은 그랬다. 수많은 식물학자들은 국가를 위해서 점령한 곳의 땅과 식물들을 연구했는데 사람으로 치면 그 땅의 인구조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식물학자인 Alfred Grandidier는 1865년부터 그 넓은 마다가스카르 섬을 세 번이나 횡단했으며 해안선을 따라 2500킬로미터를 여행했다. 마다가스카르의 상징인 바오밥나무를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가 그린 바오밥지도는 대륙같이 큰 마다가스카르 섬에 프랑스의 군대가 들어오는 침략의 내비게이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프랑스와 영국은 뛰어난 식물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프랑스 사람 피에르 푸아브르는 포트루이스 팜플르무스 지역에 야심 차게 대규모의 식물원을 만들었다. 각지를 떠돌며 어렵게 구한 씨앗과 묘목은 이곳에서 발아시켜 키운 다음 각지의 플랜테이션에 이식시켰다. 1770년 설립한 이곳은 프랑스의 핵심 연구소 중의 한 곳이었으며 거대한 식물 실험실이었다. 푸아브르는 어느 국가도 하지 못한, 할 생각조차 못했던 네덜란드 향신료 제국의 아성을 쓰러뜨린 사람이었다. 그로 인해 네덜란드가 한 세기 이상 구가한 향신료 제국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푸아브르가 그의 조국 프랑스를 위해서 평생 행한 사업은 궁극에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로움을 가져다주었다.
네덜란드와 향신료
푸아브르를 더 알기 위해서는 그가 공략한 네덜란드 향신료 이야기를 더 해야 한다. 다음은 대항해 시대 악명으로 이름을 떨쳤던 네덜란드 이야기 2탄이다.
네덜란드는 포르투갈을 따라잡기 위하여 포르투갈의 극비사항이었던 항해지도를 어렵게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한동안 향신료를 독점했던 포르투갈을 제압하고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를 빼앗았다. 네덜란드는 잔인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포르투갈인들을 더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잔혹함으로 제압했다. 대항해시대에 향신료는 곧 금이었다. 후추가 가장 대표적인 일반적인 향신료였다면 이들이 금보다 귀하게 여겼던 것은 정향 Clove과 육두구 nutmeg였다. 이것들은 음식의 맛뿐 아니라 페스트를 비롯한 온갖 질병에서 약효가 탁월한 약재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향신료 묘목과 씨앗을 얻기 위한 각 나라의 비밀 원정대가 목숨을 걸고 동인도 바다를 숨죽이고 다니던 시기였다.
네덜란드는 몰루카제도에 향신료를 탐내는 그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해안선을 강력하게 엄호했다. 프랑스는 물론 영국조차도 네덜란드의 향신료 지배를 꺾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육두구는 반다 섬에서, 정향은 암본 섬에서만 재배했다. 그리고 육두구와 정향의 가격은 일정하게 높은 가격을 유지하도록 한 해에 일정량만 생산해서 제한된 양만 세계시장에 공급했다. 근처의 다른 섬에서 서식하는 정향과 육두구는 모두 뽑아버렸다. 말을 듣지 않는 주민들은 아예 농사에서 제외시켰으며, 주민들 대신 노예들을 데려와 노동력을 대치시켰다. 땅은 황폐화되었고 수천 년 동안 향신료 재배로 가업을 이어왔던 주민들과 상인들에게는 난생처음 겪는 가난이 스며들었다. 마음대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다. 씨앗이나 묘목을 가져가거나, 허가받지 않은 이가 향신료를 재배하는 것을 들키면 그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 정향과 육두구의 생산량이 넘치는 해는 남은 양을 전부 소각했다.
‘앙리 르클레르느 방몽 드 보마르 Vamont de Bomae가 1760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목격했던 광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나는 해군 장관 옆에서 어림잡아 8백만 프랑스 은화어치는 되는 향신료가 불타는 것을 보았다. 이 불은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다. 구경꾼들의 발밑으로는 방향유가 흘러내렸지만 아무도 가져갈 수 없었다. 몇 년 전 같은 장소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유난히 가난한 한 사람이 불 주위로 굴러다니는 육두구 몇 개를 주워오려다가 이내 붙잡혀 즉석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장-마리 펠트《향신료의 역사》 112페이지
위의 내용처럼 향신료를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만 소각했던 것이 아니었다. 풍년에는 암본 섬과 반다 섬에서도 수시로 소각했으며,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면 멀리서 싣고 온 육두구와 정향일지라도 가차 없이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불태웠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집착에 가까운 향신료 독점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렸다. 네덜란드에게 그것도 갑작스러운 내리막길을 선물한 사람은 프랑스 식물학자인 피에르 푸와브르 Pierre Poivre(1719~1786)였다. 그의 이름 'Poivre'는 프랑스어로 후추를 뜻한다. 그가 속한 가문의 이름이기도 한데, 아마도 그의 선조들은 향신료 판매에 종사했던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결론적으로 그와 향신료는 운명이었다.
피에르 푸와브르, 진정한 적은 가장 가까이 있다
프랑스 리옹 출신인 그는 스무 살에 수련수도사의 자격으로 중국으로 선교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그는 사람을 구원하는 선교사업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여행지에서 만난 각종 식물에 관심을 기울였다. 선교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사명감이 없는 예비 수도사는 곧 수도회에서 제명되었다. 1745년, 그는 할 수 없이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그가 탄 배와 영국 사략선(해적) 사이에 접지전이 벌어졌다. 배는 중국에서 남중국해를 따라 내려왔으니 인도네시아 주변의 해상이었다. 18세기, 두 나라는 마주치면 늘 싸우는 것이 일이었다. 영국인이 쏜 총을 맞은 푸아브르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깨어나보니 푸아브르는 이미 적군의 수중에 있었다. 당시에는 배에 상주하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를 겸하던 시기였다. 별다른 치료제도 없는 상태에서 푸아브르는 영국인 이발사가 꿰맨 상처가 덧나 팔 하나를 잘라내야만 했다. 소규모 접지 전에서도 죽는 사람은 부지기수였으며 발이 달아나고 팔이 잘리는 것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영국인들은 귀찮은 프랑스 환자 푸아브르를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내려놓았다.
바타비아 Batavia에서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그가 본 것은 프랑스에서는 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육두구와 정향이었다. 정향은 당시 프랑스요리에서 날이 갈수록 사용량이 증가하는 향신료였다. 그것은 값이 매우 비쌌으며 구하기 힘든 귀한 향신료 대접을 받았다. 그는 운명적으로 육두구와 정향을 비롯한 도시에 넘치는 향신료를 목격한 것이다. 시나몬과 후추 등 다른 향신료는 시간이 흐르면서 원산지가 아닌 곳에서도 제법 재배가 되고 있어 가격이 어느 정도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육두구와 정향은 네덜란드령 몰루카 제도 외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네덜란드 사람들이 철저하게 육두구와 정향의 유출을 막았기 때문이다. 몰루카 제도의 향신료 재배지에는 이방인은 물론이고 원주민들조차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갖은 수단을 동원해도 수많은 새들이 나르는 씨앗은 좀처럼 막을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정향과 육두구의 씨앗을 석회에 담아두거나, 라임주스에 담그거나, 발아를 막기 위한 각종 노력도 병행했다.
인도를 거쳐 모리셔스 섬(당시 프랑스 섬)에 기항한 젊은 푸아브르는 부르도네 Mahé de La Bourdonnais 총독을 만나 모리셔스를 향신료의 섬으로 만들고 싶은 꿈을 이야기한다. 유능한 행정가였던 부르도네 총독은 팔 하나가 없어도 여전히 피가 끓고 있는, 꿈에 부푼 젊은이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들으면서 푸아브르만큼 가슴이 뛰었다.
당시 모리셔스 섬은 프랑스 동인도회사의 소유였다. 부르도네 총독의 격려를 받으며 푸아브르는 본국에 있는 동인도회사 본사의 관계자를 만나기 위해 배에 올랐다. 하지만 프랑스로 돌아가는 길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탄 배는 앙골라 앞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 배가 난파되었다. 사고가 잦은 것이 뱃길이었지만 웬일인지 그가 배만 타면 사고가 일어났다. 공교롭게도 의식을 회복한 곳은 네덜란드 배 위였다. 네덜란드 배는 해적 손에 바로 넘겨졌다. 해적선은 다시 영국군을 만나고 그들의 포로가 되었다. 그야말로 당시 인도양과 대서양 등의 바다는 서로를 죽이고 빼앗는 치열한 경쟁이 난무하는 현장이었다. 영국군의 포로생활(건지섬)에서 풀려나 그가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는 스무 살에 선교를 위해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떠난 지 10년이 채 안된 1748년이었다.
다음 해, 여전히 젊은 푸아브르는 동인도 회사의 허가를 얻어 향신료 사냥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베트남을 비롯하여 인도, 필리핀, 몰루카 제도 등을 돌면서 각종 향신료의 묘목과 씨앗들을 구했다. 위험과 죽을 고비를 넘기며 10년 동안 가져온 씨앗과 묘목들은 모리셔스에서 발아를 책임지는 원예가들에게 맡겨졌다. 나중에야 안 일이었지만, 동료라고 믿었던 식물학자들은 푸아브르 편이 아니었다. 그를 견제하는 것은 네덜란드, 영국, 포르투갈을 비롯한 경쟁국의 사람들과 해적들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이어지는 실패는 그의 성공을 시샘하는 동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일어난 실수였다. 묘목에 뜨거운 물을 붓거나, 산성 용액을 주거나.
어쩌면 진정한 적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이다.
뒤늦게 모든 것을 알아차린 푸아브르는 1758년, 모든 걸 내려놓고 고향 리옹으로 돌아가 정착했다. 하지만 그는 1767년, 프랑스에서 결혼한 처와 함께 운명처럼 모리셔스 섬으로 다시 향했다. 레위니옹 섬(부르봉 섬)과 모리셔스 섬(프랑스 섬)의 최고관리로 부임한 것이다. 운명은 비껴갈 수가 없는 건인가?
모리셔스 섬으로 돌아온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향신료 사냥이었다. 가시 울타리를 치고 있는 소문이 난 험악한 강도인 네덜란드의 것을 훔치려고 하는 것이었으니 정확하게 말하면 향신료 도둑질인 셈이다. 푸아브르에게 예전에 있었던 실수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몰루카제도와 주변 섬들의 상황을 거울 보듯 파악하고 있던 그는, 네덜란드의 악랄한 통치에서 벗어나고 싶은 주민들과 예전 통치자들을 공략했다. 1769년에서 1770년에 걸쳐 푸아브르가 보낸 향신료 원정대(밀수선)는 돌아올 때마다 정향나무와 육두구 나무, 씨앗 등을 모리셔스로 가져왔다. 1770년에는 동인도회사에게 자비로 땅을 사들여, 이것들을 연구하기 위한 팜플르무스 식물원을 만들었다. 약 25 핵타르(1ha는 한 변의 길이가 100m인 정사각형의 넓이)의 식물원에는 아메리카와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서 가져온 다양한 식물과 향신료, 흑단과 85종의 야자수 등을 심었다. 식물원은 향신료 연구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팜플르무스 식물원의 공식 명칭은 모리셔스 총리를 지낸 시우사구르 람굴람의 이름을 딴 Sir Seewoosagur Ramgoolam(SSR) 보타닉 가든이다.
그는 향신료 묘목과 씨앗을 레위니옹과 모리셔스 뿐 아니라 카리브해 프랑스의 식민지 섬에도 분산하여 이식시켰다. 드디어 레위니옹에서 크리올인 위베르가 돌본 정향나무 한 그루가 성공적으로 잘 자라 열매를 맺었다. 푸아브르가 임기를 마치고 프랑스로 돌아온 후, 1779년 모리셔스에서는 30그루의 나무에서 최초의 정향을 성공적으로 수확하였다. 이제 육두구와 정향 등 귀한 향신료는 네덜란드의 속박에서 벗어나 말라카와 잔지바르, 마다가스카르의 생트-마리와 코모로, 세이셸 등 기후와 풍토가 맞는 열대 땅으로 자유롭게 이주하였다. 특히 잔지바르는 정향 재배 중심지가 되었다. 이리하여 네덜란드 향신료 제국의 몰락은 너무나 빠르게 이루어졌다.
푸아브르는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는 의지와, 지칠 줄 모르는 추진력을 가지고 있는 놀라운 사람이다. 그는 비록 프랑스 제국의 관리(1767~1772)로 일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권리를 이용하여 철옹성이었던 향신료 제국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것은 20대부터 평생을 노력하고 경주하던 일이었다. 푸아브르가 아니었다면 네덜란드의 광기로 유지되던 향신료 독주는 오랜 시간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국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강력한 네덜란드의 힘에 저만치 후퇴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에게 몰아닥친 어려움을 기이할 정도로 툭툭 털어내듯이 일어섰다. 아픔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출세를 저지하기 위한 동료들의 시샘으로 10년 동안 고생한 그의 노고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는 땅을 치고 통곡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모리셔스 섬에서 프랑스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간 모리셔스 섬에서 드디어 그는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 20대에 만났던 부르도네 총독과 ‘모리셔스를 향신료 섬으로 만들자’고 이야기했던 그 꿈을 말이다. 팜플르무스 연못 앞에서 지긋이 웃고 있는 그의 모습에 나도 따라 웃었다. 프랑스인이지만(당시의 제국주의자들을 일단은 색안경을 끼고 본다) 꿈을 현실로 만든 작은 거인 푸아브르에게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