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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Feb 06. 2024

《폴과 비르지니》

# 모리셔스

불행의 곶  

   

인도양의 섬을 돌아다니다 보면 가끔 사연이 얽힌 지명들이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면 불행의 언덕이라든가. 무덤의 만 등이 그렇다.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지명들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응어리진 누군가의 마음이 내 가슴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리셔스 남쪽 르몬 산에 다녀온 날, 오후에 아름다운 교회가 있는 모리셔스 최북단에 있는 곶을 찾았다. 목적은 하늘과 푸른 바다와 맞닿은 붉은색 지붕을 인 캡 말뢰회 교회를 보기 위해서였다. 바닷가에 있는 빨간색 지붕을 가진 교회는 생각만큼 아름다웠다. 교회 앞바다에는 작은 섬 하나가 길게 누워있다. 코엥드미흐Coin de Mire 섬이다. 대항해시절 이 섬은 포트루이스 항구를 목적지로 하는 함선이 꼭 인지해야 하는 등대와 같은 중요한 섬이었다. 해안선에 산호가 발달한 모리셔스는 산호초와 암초를 주의해야만 했다. 배들이 다니는 길목인 이곳은 다른 곳과는 달리 암초가 많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1938년 설립한 교회는 소박한 내부 장식마저도 맘에 들었다. 그런데 교회 현판에는 캡 말뢰회 Malheureux가 아닌 Notre-Dame Auxiliatrice이라고 쓰여 있다. 그제야 Malheureux의 뜻을 찾아보니 프랑스어로 ‘불행’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캡 말뢰회는 ‘불행의 곶’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불행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후대에 세워진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닷가의 예쁜 교회를 보러 왔다가 갑자기 ‘불행’이란 단어에 생각이 묶여버렸다.   

   

교회에서 보이는 코엥드미흐Coin de Mire 섬


1744년 8월 17일, 폭풍우가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을 지니고 있던 새벽녘. 모리셔스 섬 북쪽 바다에 승객 200여 명을 실은 Saint Geran호가 폭풍우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옴짝달싹도 못하는 여객선에는 구조깃발이 내 걸려 있었다. 선장 Delamere는 모리셔스에는 첫 방문이었다. 6개월 전 프랑스 북서부지역 노르망디 지방 Lorient 항구에서 출발한 생 제랑호는 원래대로라면 이미 코엥드미흐 섬을 지나 포트루이스로 향해야 했다. 급기야 제랑호는 폭풍우에 견디지 못하고 북동쪽에 위치한 Amber 섬 부근 암초에 침몰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날 희생된 사람은 200여 명이나 되었다. 이 사건으로 모리셔스 인들은 큰 충격과 씻을 수 없는 슬픔에 빠졌다. 베르나르댕 Bernardin de Saint-Pierre은 소설 《폴과 비르지니》에서 생 제랑호에 주인공 ‘비르지니’가 타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폭풍우를 피하기 위해 배가 임시로 상륙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곳은 불행의 곶 Cap Malheureux이라 불리었으며 희생자들의 시신이 떠내려온 북동쪽 해안은 무덤의 만이라 불렀다. 주민들에게 꽤 인망이 높았던 라 부르도네가 모리셔스 섬에 총독으로 부임한 지 9년째 되는 해였다. 


원래의 교회 이름보다 캡 말뢰회 교회로 더 많이 부르는 이유는 폴과 비르지니를 기억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제주도보다 약간 큰 모리셔스 섬 곳곳에는 지명과 카페, 거리이름 등으로 폴과 비르지니의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주민들을 심각한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이 있은 지 약 55년이 지난 1810년 프랑스는 영국에게 모리셔스 섬을 양도한다(빼앗긴다). 기세등등한 영국군은 이곳 캡 말뢰회를 통해 상륙했다. 그러나 통치세력이 바뀌는 사건은 권력과 닿아있는 소수를 제외하고는,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불행이라든가, 행복 같은 감정이 동요될 정도의 사건은 아니지 않은가. 


 

 1770년, 프랑스 점령시기에 피에르 프와브르가 모리셔스에 만든 팜플르무스 식물원이다. 이곳에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의 동상이 서있다.


<폴과 비르지니>의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폴과 비르지니>의 작가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Bernardin De Saint pierre(1737~1814)는 식민지에서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열대의 섬 모리셔스에 온 식물학자였다. 그는 1768년에서 1770년까지 모리셔스(당시에는 일 드 프랑스)에서 식물을 연구했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모리셔스를 배경으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1773년 <폴과 비르지니>를 집필하였다.

 <폴과 비르지니>를 비롯한 그의 작품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문화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이런, 샤토브리앙, 톨스토이, 발자크, 플로베르 등 세계적 문호는 그에게 끝없는 경의를 표했다.

 

소설은 짧기도 하지만 18세기 작가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지루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읽어진다. 당시 프랑스 작가들의 연애소설에서 나타나는 고리타분한 밀당은 찾아볼 수 없다. 비극이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마치 키 큰 야자나무가 우거진 모리셔스의 기다란 산 개울가에서 반나절 눈을 떼지 않고 읽고 난 것처럼 개운하다. 작가는 쉽고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해서 격정적인 장면에서조차 시종일관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또한 모리셔스의 자연과 풍광을 귀를 기울이고 싶을 만큼 속삭이듯이 그렸다.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장면조차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마치 화가인 것처럼 섬세하게 묘사해 놓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그들과 함께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배를 타고 오는 비르지니를 찾아갈 때에는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숨이 찰만큼 금가루마을까지 그들과 동행하였다. 


식물학자답게 책의 내용에는 모리셔스의 산야는 물론 그곳에 서식하는 식물들과 동물들을 하나하나 아름답게 설명하는 장면들이 여러 번 나온다. 그 장면에서는 침략국의 수탈자라고 하기에 모리셔스를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흘렀다. 열대 식물들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마치 나는 그 식물을 잘 알고 있는 것 마냥 머릿속에서 그렸으며,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침이 고였다. 아주 조금 필요이상의 현자 같은 내용이 나오긴 한다.(지혜로운 캐릭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베르나르댕이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표시이기도 하다. 

     

18년 동안의 서사를 간결하면서도 디테일하게 단숨에 묘사한 책의 내용은 마음에서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소설을 두 번 읽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러나 며칠 후에폴과 비르지니를 다시 집어 들었다. 두 번째는 필사를 하면서 천천히 정독했다. 한 구절도 버리고 싶지 않았던 '샤또브리앙'처럼 책 전문을 다 외우지는 못할망정 꼭꼭 씹는 심정으로 가슴에 담았다. 모리셔스를 통해서 폴과 비르지니의 존재를 알게 되었지만, 폴과 비르지니를 알게 되면서 모리셔스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폴과 비르지니>에서는 모리셔스의  원추형 산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온다. 엄지산이라고 표현한  823미터의 Piter Both 산


어떤 책이든 요약본은 안 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글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이 쏙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요약본을 첨부했다. 


폴과 비르지니


프랑스령 모리셔스 섬에서의 이야기이다. 당시에는 프랑스 섬이라고 불렀다. 1726년,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청년 라 투르는 자신의 부인과 함께 모리셔스 섬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노예를 사 오겠다며 근처의 섬 마다가스카르로 떠난 라 투르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혼자가 된 라투르 부인은 역시 혼자인 마르그리트와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었다. 마르그리트는 귀족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후 임신을 한 채로 섬에 먼저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역시 라 투르 부인의 뱃속에서도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자신은 귀족이지만 평민을 사랑하여 모리셔스 섬에 도피한 라투르 부인과, 자신은 평민이지만 귀족 남자를 사랑하여 그 남자에게 버림받은 마르그리트의 모습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병든 모습에 다름 아니다. 어쨌든 프랑스 사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두 여인은 모리셔스 섬으로 도피하였다.    

  

마르그리트는 사내아이 을 낳았으며 얼마 안 있어 라 투르 부인은 딸 비르지니를 낳았다. 이들 가족에게는 앙골라에서 온 도맹그와 마다가스카르에서 온 마리가 있었다. 두 사람은 노예였지만 동고동락하는 가족이었다. 폴과 비르지니가 태어난 후 두 가족은 더욱 풍요로웠으며 삶은 온기로 가득했다. 이들은 아름다운 모리셔스 섬에 펼쳐진 자연의 시계에 맞춰 살아가면 될 뿐이었다. 폴과 비르지니도 아름답게 성장했다. 그러나 행복에는 늘 시샘하는 자가 있기 마련이다. 


1738년, 부르도네 Mahé de La Bourdonnais가 인도양 총독으로 부임한 지 3년이 지났을 때 라 투르 부인은 노르망디에 살고 있는 돈이 많은 백모의 편지를 받았다. 백모는 상속을 미끼로 라투르 부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름답게 성장했을 손녀 비르지니를 프랑스로 보내면 교육도 시키고 상속시키겠다는 약속은 기어이 비르지니를 프랑스로 떠나게 만들었다.      

떠밀리듯 프랑스로 떠난 비르지니는 백모의 감시를 받으며 약 3년에서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돈 많고 나이 많은 귀족에게 비르지니를 결혼시키려는 백모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744년 비르지니는 상속을 포기하고 노르망디 로리앙 항구에서 모리셔스행 배를 탔다. 이제 돌아가서 폴과 결혼하고 예전처럼 주어진 자연에서 행복하게 살게 되리란 꿈을 꾸었다. 

하지만 6개월 후 도착한 고향 모리셔스는 비르지니의 상륙을 허락하지 않았다. 200여 명을 태운 배는 난폭한 폭풍우로 인하여 피항도 하기 전에 난파되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승객들은 모리셔스의 북동 해안선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비르지니가 죽은 후에 폴이 그녀 곁에 묻혔다. 자식을 보낸 그들의 어머니들은 어떻게 세상을 부여잡을 수 있었겠는가. 폴의 어머니 마르그리트도, 비르지니의 엄마인 라투르 부인도 폴과 비르지니 곁에 묻혔다.   

   

폴과 비르지니가 모티브이다. Pierre Auguste Cot 1880년작 The Storm/ 베르나르댕 드 생피에르/ en.wikipedia.


베르나르댕은 서문에서 소설의 이야기는 실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열대 지방이 보여 주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작은 사회에 존재하는 도덕적 아름다움을 결합하고 싶었다. [...]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이며 주요 사건 또한 있었던 일이다. 내가 덧붙인 것이라고는 사소한 상황뿐인데 그것은 내 사적인 이야기지만 또한 실제 겪었던 일이다.”     

 

두 가족이 삶을 영위했던 모리셔스 섬에서의 삶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작가가 꿈꾸던 이상향이었다. 현자의 입을 통해 당시 기독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피력하였다. 18세기의 기독교도 현재의 세태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가장 훌륭한 책이라는 복음서는 평등, 우정, 인간성, 화합을 강조했으나 수 세기 동안 유럽인의 광기를 불러일으키는 구실로 쓰이기도 했단다. 지금도 이 땅에서는 복음서에 나온다는 구실로 얼마나 많은 횡포가 공과 사를 막론하고 일어나고 있는지! 그걸 보면 한 권의 책이 인간에게 도움을 준다고 누가 자부할 수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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