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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 Jan 23. 2024

탐나도다 모리셔스!

# 모리셔스와 도도새


     

모리셔스 섬은 인도양에서 긴 항해 중에 휴식을 위해 거쳐가는 장소로는 가장 적합했다. 평지와 숲이 골고루 분포하며 식량과 물을 공급하기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리셔스는 주변의 다른 섬에 비해 유럽인들의 정착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유럽인들이 들어오기 전 인도양은 페르시아와 아랍 무역상들이 항해하던 곳이었다. 많지 않은 섬들은 기항지로서 매우 소중했다. 아랍인들은 10세기경부터 마다가스카르의 동쪽에 거의 수평으로 나란히 서있는 세 개의 섬(레위니옹, 모리셔스, 로드리게스)을 그들의 지도에 Dina Arobi(또는 Dinarobin)라는 이름으로 표기했다. 1507년경 모리셔스를 발견한 포르투갈 항해사 Diogo Fernandes Pereira는 모리셔스를 그들의 기항지로 삼고 지도에는 Cirne라고 표기했다. Cirne는 백조를 뜻하는데 포르투갈 탐험대의 배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모리셔스 섬의 왼쪽 끝에 나와있는 곶이 뒷모습을 하고 있는 백조 꼬리로 보이기도 한다.  

    


다른 나라들이 기항지로만 사용하던 모리셔스를 1598년 네덜란드 인들이 모리셔스 동남쪽 그랑포트Grand Port를 통하여 점령하였다. 네덜란드는 이미 포르투갈 사람들이 부르는 섬의 이름 Cirne를 무시하고 당시 네덜란드의 지도자인 모리스 왕자 Maurice, Prince of Orange(재위 1585~1625)의 이름을 따서 섬 이름을 ile Maurice라고 명명했다. 

네덜란드는 노예들을 데려와 흑단나무를 벌목하고 담배와 사탕수수를 심었다. 그들에게 모리셔스 섬은 동인도를 비롯하여 새로운 땅을 개발하기 위한 최적의 발판이며 출발지였다. 40년 후, 1638년에는 본국의 네덜란드 인들이 정착했다. 그러나 1662년 이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모리셔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아프리카 남쪽(지금의 케이프타운 주변)을 보급항으로 개발했다. 그곳에는 아프리카 선주민인 코이족과 산족이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네덜란드 정착민은 최종적으로 1710년 모리셔스를 떠나 또 다른 이주지인 케이프타운에 정착했다.  혹자는 네덜란드 인들이 모리셔스 섬을 떠난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이클론의 피해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들은 모리셔스 섬을 버리고 떠났지만 100여 년 이상 점령하는 동안 섬을 파헤치고 많은 동물들을 데려왔다. 그들의 동족을 이주시켜 살았던 흔적만으로도 모리셔스는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사탕수수밭으로 뒤덮인 모리셔스 동남쪽 평야


도도새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영국의 입국수속은 힘들기로 유명하다. 영국 사람들은 그들이 확인하고 싶은 정보를 꼼꼼하게 천천히 확인하느라 비행기에서 방금 쏟아진 피곤을 뒤집어쓴 여행자들의 줄을 끝도 없이 세워놓는다. 그래서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 영국에 도착해 본 사람은 런던의 히드로공항을 절대 잊지 못한다. 모리셔스는 영국 식민지였다가 독립했다. 그렇다고 해도 영국만큼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 생각보다 수속시간은 길지 않다. 입국도장을 꽝 찍어서 건네받은 여권에는 도도새 한 마리가 찍혀있었다.  

    

모리셔스의 입국 스탬프이다. 왼쪽에는 도도새, 오른쪽에는 백조의 뒷모습을 닮은 모리셔스 지도가 있다.


사람들이 인도양의 섬에 상륙하기 전 모리셔스를 비롯한 주변 섬에는 개체수가 많은 육지거북과 도도새가 살고 있었다. 물론 더 많은 동물들이 있었지만 말이다. 육지거북의 이야기는 세이셸 부분에서 언급했으므로 이 장에서는 모리셔스 섬에 살았던 도도새의 이야기만 풀어볼까 한다.(레위니옹 섬과 로드리게스 섬에서 살던 도도새의 친척인 솔리테어도 18세기에 도도새와 같은 길을 걸었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먼 옛날 원시시대 언제인가 도도새의 조상은 날아서 모리셔스 섬으로 들어왔다(육괴덩어리를 타고 들어왔거나). 환경이 더할 나위 없이 안락한 섬은 상위 포식자는 물론 알에 치명적인 설치류나 파충류도 없었다. 먹을 것은 많고 나른할 정도로 할 일이 없는 낙원에서, 도도새의 후손들은 천천히 모습이 변해갔다. 사용하지 않는 근육과 기관은 없어지거나 퇴화되고 언제부터인지 조상새의 모습과 날았던 습관은 하나씩 잊혔다. 경계심이 없어진 도도 새는 그저 맨땅에 풀을 깔고 알을 낳아도 좋았다. 모리셔스 섬에서 도도새는 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스스로 버렸다. 진화한 것이다. 대신 몸뚱이는 뚱뚱해지고 약 24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다리는 튼튼해졌다.

모리셔스 공항에서 산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도도새 두 마리, 원래의 생김새보다 다리가 좀 짧아 보인다.


뒤뚱거릴 정도로 통통한 몸에는 귀여운 장식품처럼 달린 양쪽의 작은 날개모양의 깃털과 동그랗게 말린 짧은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부리는 딱딱한 열매도 단숨에 깰 것처럼 튼튼하게 생겼다. 의성어로 생각되는 도도의 귀여운 이름은 포르투갈어로 '멍청한', '게으른'이란 뜻을 지닌 doudo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사람을 보자마자 경계 없이 친구 하자고 달려든 도도새는 곧바로 뱃사람들의 뱃속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그들의 식탐을 위해 몸을 바치는 도도새를 발크뵈헬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 어로 ‘역겨운’이라는 의미이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도도새와 육지거북을 비롯하여 온갖 동물들을 먹어치워 멸종시킨 그들이 역겨운 짐승들인 것을. 

하지만 다양한 조롱과 모욕적인 형용사로 불린 도도새는 영원히 그들의 뱃속을 채울 수 없었다. 도도의 멸종을 앞당긴 것은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포르투갈 인은 섬을 보급기지로 이용하기 위해 돼지를 들여왔다. 신선한 고기를 지나가는 배에 조달하기 위해서였다. 네덜란드 인은 염소, 닭, 소, 사슴, 고양이, 개, 원숭이, 고양이 등을 들여왔다. 네덜란드 인들은 모리셔스에서 천년만년 살려고 한 것이다. 돼지와 원숭이는 사람을 제외하고 상위 포식자가 되었다. 원숭이를 데려온 것은 포르투갈의 소행이라고 네덜란드는 잡아떼지만 모리셔스에 살고 있는 원숭이의 조상은 그들의 식민지 자바섬에서 온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과 더불어 돼지원숭이가 먹어치운 육지거북과 바다거북, 도도의 알과 새끼는 전방위적으로 도도의 멸절을 부추겼다. 사람과 돼지, 원숭이 이들은 도도를 멸종시킨 공범인 것이다. 1662년까지도 도도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있었다. 그러나 1663년에서 1681년 사이에 누군가는 도도새를 보았다고 했다. 마침내 1690년 이후에는 도도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이미 멸종한 것이다. 육지거북을 비롯한 다른 생명들은 차지하고라도 도도새에 관한 한 모두 네덜란드 점령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1601년 네덜란드에서 출판된 도도새가 있는 모리셔스 풍경, 왼쪽에 육지거북과 다리가 긴 도도새가 보인다. /en.wikipedia.org


마다가스카르의 자이언트쿠아 이야기


마다가스카르 칭기 국립공원에서의 일이다. 짙은 회색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계곡까지는 숲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야 했다. 마다가스카르만의 특별한 고유식물들을 설명하는 가이드의 목소리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집중하면서 걷고 있는데 주황빛과 푸른 회색빛을 띤 깃털을 가진 커다란 새 한 마리가 길 옆에서 후드득 소리를 내더니 나타났다. 눈 주변으로는 마다가스카르 바다를 닮은 푸른색을 띠었다. 생기발랄한 몸짓을 보니 일부러 우리 앞에 나타난 표정이 역력했다. 폴짝 바위 위로 올라가더니 모델처럼 오른쪽으로 한참을, 왼쪽으로 다시 포즈를 바꿨다.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족히 70센티미터는 되어 보였다. 옆에 주머니처럼 남아있는 도도새의 날개보다는 뒤쪽까지 뻗은 넓은 날개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폴짝 뛰어오를 때 보니 옆 날개가 조금 들썩였다. 넓고 긴 꼬리는 공작새 못지않게 아름답기까지 하다. 혹시나 날지 않을까 해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지만 이 녀석 역시 뒤를 힐끔거리며 유유히 걸어서 사라졌다. 다행히도 도도새처럼 아예 날지 못하는 새는 아니었다. 아니 날지는 못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도 퇴화(진화) 중인 그 날개를 이용해서 10미터 높이까지는 점프해서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자이언트쿠아 Giant Coua라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도도새와는 조상이 다르지만 쿠아를 보면서 모리셔스의 도도새가 자꾸 겹쳐졌다.

     

자이언트쿠아 Giant Coua/ 마다가스카르 칭기 국립공원


갑자기 등장한 대항해시대의 주역 네덜란드와 모리셔스


침략, 점령, 대포, 탐욕, 살육, 납치, 강간, 잔혹.. 등 인간이 쓰는 단어 중에 가장 처절한 단어를 얼마나 나열해야 대항해시대의 유럽인들을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의 기세등등한 대제국 사이에서 네덜란드는 의외의 등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때까지 네덜란드라는 국가는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대항해시대를 통틀어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유난히 크고 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이다. 당시 유럽인들로 말하자면 누구나 할 것 없이 과가 없을 수 없으나, 특별히 네덜란드는 모리셔스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생태계파괴를 물려주고 떠났기 때문이다(모리셔스뿐만은 아니지만). 내키지는 않지만 모리셔스 섬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대항해 시대에 혜성과 같이 등장한 네덜란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신교도가 대부분인 네덜란드는 가톨릭교도인 스페인의 억압에서 1581년 독립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독립을 했다기보다는 스페인에게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뿐이었다. 그러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유럽에 네덜란드와의 모든 무역을 금지시켰으며 네덜란드와 스페인은 전쟁에 돌입했다. 설상가상으로 네덜란드의 지도자인 원수 빌럼은 1584년 구교도에게 암살당했다. 빌럼의 아들인 오렌지 공 Maurice van Nassau는 아버지를 이어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도자가 되었다. 네덜란드 현재의 왕가는 오렌지공의 후손나사우오라녜(오렌지) 왕조이다. 네덜란드 스포츠 팀을 오렌지군단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이들은 거대제국 스페인과의 계속된 전쟁으로 텅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1602년 동인도회사를 설립했다. 신생 독립국에 자본을 대준 사람들은 알뜰한 네덜란드 국민들과, 레콩키스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쫓겨나 네덜란드에 정착한 유대인이거나 그들의 후손이었다. 동인도회사는 그야말로 세계 최초의 주식회사였다.(영국과 프랑스의  동인도 회사나 서인도 회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최초의 증권거래소도 동인도 회사 주식 거래를 위해 생겼다. 네덜란드 인들은 포르투갈과 영국을 타산지석 삼아 바다로 나섰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1609년, 12년의 휴전 조약에 서명했다. 네덜란드는 평화로운 12년 동안 식민지 건설과 노예와 향신료 무역에 박차를 가했다. 스페인 또한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기에 매우 바쁜 시기였다. 돈이 보이는 곳만을 향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당시에 최고 이익 무역 루트를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의 뒤를 쫓았다. 16세기에 포르투갈이 가지고 있던 무역루트와 몰루카 제도는 곧(17세기) 네덜란드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암스테르담은 세계의 수도였으며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자카르타)는 네덜란드 동인도의 수도가 되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국력은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었다.   


이처럼 당시 네덜란드 인들의 행동은 무모하고, 빠르고, 저돌적이며, 식민지에서는 매우 잔혹했다. 국가의 태동기에 정부는 구교도인 스페인과 전쟁 중이었으니 격변기의 네덜란드에서 남자들이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에 참여하거나, 나라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배를 타는 일이었다.  


박연과 하멜    


우리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17세기 당시를 살던 사람이었으며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인 박연하멜을 알고 있다. 한국 이름 박연으로 알려진 얀 얀스 벨테브레(1595~1668 이후) 사략선(국가가 공인한 해적선)에 근무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소속 선원이었다. 1627년경 그가 조선에 표류했을 당시에는 약 30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말 그대로 국가가 공인한 해적이었던 사략선 선원들의 생활은 거칠기가 짝이 없어서 선원이 살아서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그의 귀화는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그는 조선에 정착한 뒤 조선사람으로 살았다. 20여 년 후 1653년 제주도에서 억류되어 있는 헨드릭 하멜을 만났을 때는 네덜란드어를 어느 정도 잊은 후였다. 박연과 달리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정식 선원이었던 하멜은 인정받으면서 살 수 있는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8명의 동료들과 함께 13년 28일 동안 억류되어 있던 조선(여수에서)을 탈출하였다. 그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그동안 받지 못한 13년간의 임금을 받기 위해 작성한 보고서는 한국을 유럽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 표류기이다.  


대항해시대 유럽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번 물은 것은 절대 놓지 않는 마치 야수와 같았다. 본국의 창고에 금은보화가 넘쳐날수록 살육은 더욱 대담하고 잔인해졌다. 그들은 대륙과 섬들에 원래 살고 있던 인종들을 없애거나 바꿔놓았다. 사람만 없앤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뱃속으로 들어간 이미 멸절된 동물들은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포르투갈 인들보다 비열하고 참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온 네덜란드 사람들은 포르투갈 사람들은 잊힐 정도로 더 잔혹했다. 프랑스와 뒤를 이은 영국인의 행동은 더해 무엇하랴. 그들의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말할 것이다.    

  



데이비드 쾀만은 그의 책 <도도의 노래>에서 도도새가 멸절된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풀러는 역사적 기록들을 이렇게 요약했다. 도도는 유럽 인과 접촉한 짧은 기간에 무자비하게 사냥당했다. 그리고 인도양을 항해하는 사람들에게 반 세기 이상 신선한 고기의 공급원이 되었다. 산 채로 배에 실려 몇 주일에서 몇 달을 휴면 상태로 쌓여 있어야 했던 황소거북과 달리 도도는 산 채로 배에 실리지 않았다. 공급이 넘칠 때에는 일부는 소금에 절이거나 훈제하여 저장했고 일부는 살아 있는 것을 요리하여 온 배의 사람들이 실컷 먹고 남은 것도 보관했다가 먹었다. 도도 고기의 맛이 역겹다는 이야기는 어쩌면 물리도록 포식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

한편 네덜란드 인은 이곳에 사는 토착 동물을 많이 죽였는데 특히 도도와 거북을 무자비하게 죽여 없앴다. 그 당시 항해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생태계 파괴 행위를 자행했으며 눈에 띄는 것은 무엇이든 먹었다.’


한마디로 그들의 뱃속은 멸종 위기까지 갔던 육지 거북과 멸종된 도도새의 무덤이 되었다. 동물들뿐일까,  경쟁하지 않고 살았던 식물들도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갔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네덜란드 인들은 많은 일들을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반면에 포르투갈은 항해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극비로 간주했다. 그들이 저질렀던 무자비하고 잔인한 폭력의 정점에는 노예무역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당시에 저지른 노예무역을 비롯한 식민지 관련 내용을 2006년에야 학교 역사 교육과정에 포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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