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인가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인가요?”
은수가 조디악 상담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다. 행복한 사람은 상담을 받지 않는다. 대개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 인생이 꼬이고 막막해서 어디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상담을 받는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누군가는 길을 찾고 누군가는 그리운 얼굴을 떠올린다. 은수는 네이탈 차트를 보며 인생의 질문들을 떠올리고, 벽에 부닥친 혹은 절망에 빠져 있는 인생들에 조언한다.
“많이 힘들었겠다. 내가 한 번 안아줄게요.”
차트를 보고 건넨 말 한마디에 은수에게 안겨 30분을 엉엉 울다가 “내가 금정산에 몇 번을 올랐는지 몰라요.”하기도 한다. “죽지 않고 살아주어 고마워. 자기는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라고 말하며 은수는 생각한다. ‘내게도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찬란하게 반짝이던 시간을 꼽으라면 은수는 항상 그날, 그 시간이다. 서른세 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가 아닌 진짜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엘 까미노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가 묻힌 곳, 빛나는 별 들판의 산티아고, Santiago de Compostela까지 800킬로미터의 길을 오로지 두 발로 걷는 순례길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를 읽고 막연히 꿈꾸었던 그 길을 걸으며 은수는 많이 웃었고 모든 것에 고마워했으며 참으로 행복했다. 무엇보다 수없이 많은 천사들을 만났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다시 3일을 걷거나 버스로 가야 닿는 피네스테레, 이름 그대로 세상의 끝! 0km 비석이 있는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은수는 모든 스페인 일정을 끝내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보나와 몇 번이나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입성하고, 함께 미사를 드렸다. 이보나는 슬로베니아에서 온 사진작가이다. 한 번도 사진을 찍어본 적 없던 은수가 DSLR을 들고 다녀 ‘빅카메라 페레그리노’로 불린 데 반해 이보나는 작은 소니 핸드폰으로만 사진을 찍었다. “왜 카메라를 들고 오지 않았지?” 은수가 물은 적이 있다. 이보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카메라를 들고 오면 까미노가 일이 되잖아. 난 여행을 온 거야.”
버스가 도착하고 은수가 이보나와 정말 마지막 포옹과 인사를 나누는 순간, 어디들 숨어 있었는지, 순식간에 수 십 명의 순례객들이 몰려나왔다.
“씨 유 어게인”
피네스테레, 이제 정말 길은 끝났고,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인생을 찾아 집으로 혹은 또 다른 여행지로 떠날 텐데, 다시 보자고 인사한다. 은수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때 그 순간, 은수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씨 유 어게인은 은수의 인사다. 엘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페레그리노(순례객)들은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한다. 스페인어로 ‘좋은 길’이라는 뜻의 부엔 까미노는 힘든 순례길에서 안녕과 평안을 구하는, 당신의 앞길에 행운이 함께 하길 빈다는 말이다. 은수도 처음엔 부엔 까미노라고 인사하다가 어느 순간 인사를 바꾸었다.
“왜 씨 유 어게인이야?”
오늘 길에서, 혹은 알베르게에서 만난 순례객을 내일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른다. 나에게 필요한 모든 짐이 담긴 배낭에 하얀 조가비 하나 매달고, 노란 화살표를 따라 빛나는 별의 들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서쪽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걸어가는 길. 그 길에서 페레그리노는 보통 하루에 20-30 킬로미터 정도를 걷는다. 안내 책자에 따르면 30일에서 36일 정도 걸린다.
은수는 순례길 3일 만에 발병이 났다. 12센티미터 킬힐을 애정하는 그녀는 등산화를 처음 신어보았다. 당연히 새 등산화였고, 새 신발에 발뒤꿈치가 깨물리듯,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산화에 발목이 부풀어 올랐다. 걷기 시작하고 이틀이 지나자 아예 등산화를 신을 수 없었다. 병원을 가려했으나 까미노 위의 마을들은 대개 버스가 하루 한 번 다닐까 말까 하는 시골이었다. 결국 그녀는 등산화를 배낭에 매달고, 알베르게에서 쉴 때 신으려고 산 스포츠 샌들을 신고 걸었다. 하루에 4킬로미터, 10킬로미터... 스스로 속도를 줄였다. 덕분에 자신의 속도를 찾을 수 있었고, 나중에는 하루 60킬로미터까지 걸을 수 있었다. 물론 그녀의 의지가 아니라 길을 잃어서였다. 정해진 코스가 아닌 마음대로 느리게 걷다 보니, 그녀는 거의 혼자 걸었다. 그래도 만날 사람은 만난다. 길에서, 알베르게에서, 바르에서, 성당에서... 그녀를 앞서 갔던 이들을 다시 만날 때도 많았다. 비행기 일정을 맞추기 위해 메세타 고원 평야 구간,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 약 180여 킬로미터를 건너뛰었더니 오리손에서, 산토도밍고 혹은 그라뇽에서 같은 알베르게에 묵었던 천사들을 다시 만나기도 했다. 물론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순간 은수의 인사는 “씨 유 어게인”으로 바뀌었다. 다시 널 보고 싶어. 길 위에서, 알베르게에서 혹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면 반갑고 다시 만나지 못한다 해도 지구는 둥그니까, 너는 나의 천사니까, 우리는 자유로운 영혼들이니까 또 다른 시간, 다른 곳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잖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이보나가 제일 크게 소리친다. “씨 유 어게인, 클라라~”
손이 불편한 그녀가 가방을 고쳐 매는 걸 도와주었다며, 아침에 바르에서 맥주를 한 잔 샀던 가 여전히 피 맺힌 손수건으로 꽁꽁 싸맨 손을 흔든다. “넌 나의 천사야, 너도 네 인생의 천사를 만났지? 씨 유 어게인~”
도대체 왜 까미노를 걷는지 알 수 없었던, 종일 스도쿠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미국의 대학생 리사가 밝은 얼굴로 외친다. “널 다시 만나 정말 반가웠어, 씨 유 어게인!”
가장 소중한 보물을 태우는 피네스테레에서 자신의 순례자 증명서를 태운 흰 곱슬머리의 남자도 외친다. “씨 유 어게인~”
은수는 상담을 할 때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를 질문하면서 그날을 떠올린다. 수십 명의 환대를 받는 그녀를 위해, 버스 기사도 한참이나 기다려주었던 그때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찬란하게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삶의 축소판, 일상에서 멀어진 자유
먹고, 자고, 걷는 단순함 속에서
나의 한계를 알고, 내 자신에 대해 내 주변에 대해 좀더 충실해진다.
솔직 담백 해진다고 할까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떨고, 감사하고, 사랑하고 행복하다.
- 은수의 까미노 일기 중에서
스페인까지 가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는다. 까미노를 걷고 그 길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파울로 코엘료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에나 있는 0.0000000001%의 사람이다.
40여 일 만에 스페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니, 인생에 힘든 일, 불편한 관계는 그대로 은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가 좀 바뀌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래서였을까? 다시 엘 까미노를 가고 싶다고, 올해는 내년에는 그 길 위에서 생일을 맞이할 것이라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녀는 천칭자리인데, 천칭자리는 항상 완벽한 타이밍을 위해 다음으로 미루는 성향이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천칭자리는 처녀자리 아스트라이아 혹은 정의 여신 디케가 들고 있는 저울이다. 이집트 사자의 서에서 저울은 왼쪽에 죽은 인간의 심장이 올라가 있고 다른 쪽엔 깃털이 올라가 있다. 이 깃털은 이집트 법과 정의, 조화, 진리, 지혜의 여신 마아트(Ma'at, Maat, Mayet)의 것으로 깃털보다 가벼우면 천국으로 가고 무거우면 저울 아래 있는 암무트 Ammut, Ammit에게 먹힌다. 그래서 천칭자리는 많은 것들을 뒤로 미룬다. 최종의 최최최최최종까지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녀는 별자리를 공부하며 ‘씨 유 어게인’도 그런 천칭자리의 인사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에게 좋은 사람이란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천칭자리는 싸움을 피하고 적을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싫은 사람도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고, 여지를 둔다. 그때는 몰랐던, 혹은 오해했던 그의 진실을 나중에 알게 될 날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세상에 좋은 길, 아름다운 곳이 얼마나 많은데, 왜 또 스페인이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그녀는 “일정 때문에 메세타를 건너뛰었어. 다시 가면 메세타를 걸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메세타 지역을 걸었다 해도 그녀는 다시 그 길을 원했을 것이다. 세상에는 까미노를 걸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걸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로부터 17년이 흘렀다. 산티아고 가는 길에서 처음 만났던 별자리 공부가 책 출간과 강연으로 이어지고, 남들의 인생을 상담하고 있지만 은수도 자신의 인생이 쉽지 않다. 죽음, 재생, 부활의 플루토(명왕성) 20년을 잘 버텨서 상담도 할 수 있다 했는데, 믿었던, 믿고 싶었던 인생의 선배에게 배신을 당해 2년의 시간이 무(無)로 돌아갔다. 혼돈과 초월의 넵튠(해왕성)이 그녀의 삶을 뒤흔들기 시작한 것이다. 스토커가 플루토의 예고편이었다면, 할머니 방송인의 배신은 넵튠의 예고편일 것이다. ‘그래 인생은 원래 그래. 쉬우면 인생이 아니지’, 생각하던 어느 날, 부르고스에 살고 있는 나혜로부터 전화가 왔다.
“달이 무지개 다리를 건넜어.”
나혜와 은수는 까미노 친구다. 은수가 먼저 까미노를 걸었고, 은수의 추천으로 나혜가 까미노를 걸었는데, 나혜는 이후 스페인에 정착했다. 그런데, 바르셀로나에서 여행가이드를 하던 시절부터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던 반려견 달타냥이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전화기를 붙잡고 며칠을 울었다. 그리고 은수는 마드리드행 비행기 티켓을 샀다.
“올라~ 부르고스!”
00. 나에게 시간을 주고 싶어서 https://brunch.co.kr/@bluetwilight/522
01. 올라 부르고스 Hola, Burg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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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우노 까페 콘 레쩨 우노 또르띠야, 포르파
때로 도망쳐도 괜찮아 https://brunch.co.kr/@bluetwilight/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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