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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우노 까페 콘 레쩨 우노 또르띠야, 포르파

때로 도망쳐도 괜찮아

- 올라 ¡Hola! (안녕하세요)

-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 ¡Hola, Buenos días!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 우노 까페 콘 레쩨, 우노 또르띠야 포르 파보르 Uno Café con leche, uno tortilla, por favor! (카페라테 하나와 또르띠야 하나 주세요.)

- 알 고 마스 Algo más? (더 필요한 것 없나요.)

- 나다, 그라시아스 Nade, gracias. (아니요, 고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부스스 눈곱만 겨우 떼고 집을 나서서 바르에 가는 거야. 그리고 또르띠야와 카페 콘 레쩨를 먹는 거지.”     


“또르띠야? 까페 뭐?”     


“음, 또르띠야는 스페인식 감자 오믈렛이라고 할까? 계란과 감자에 께소(치즈)나 하몬 등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스페인에서는 아침이나 브런치로 많이 먹어. 그리고 진한 에스프레소에 스팀 우유, 카페 라떼가 까페 콘 레쩨야.”     


은수가 부르고스에서 12주를 살겠다고 하니 사람들은 물었다.      


“가서 뭐 할 거야?”     


그녀에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냥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든 지금보다 나쁠 것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생각한다. 오늘은 무엇을 할까? 미팅도 없고, 써야 할 글도 없다. 아니 써야 할 글은 있으나 써지지 않았다.      


은수는 스물여섯에 처음 방송작가로 일하기 시작해 25년 동안 일했다. 살아온 날의 절반을 방송작가로 산 것이다. 그런데 점점 방송국은 물론 프로덕션에서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불안했다.      


4년 전, 취미로 시작했던 별자리를 테마로 책을 출간하고, 종편사의 아침 방송 메인작가로 일하며 북콘서트와 상담, 강연을 하느라 바빴다. 번동 집에서 마곡의 방송프로덕션 사무실과 강연을 하는 대림 디지털단지, 그리고 상담을 위해 도곡동과 양재동까지 서울의 네 귀퉁이를 점찍고 다녔다. 하루에 운전하고 다니는 거리가 최소 70킬로미터에서 150킬로미터를 넘기도 했다. 주말에는 지방 서점에 북콘서트도 다녔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갑자기 일이 끊기더니, 이번에 새롭게 시작하려던 강연도 취소가 되었다. 시간이 많으니 책을 써야지, 생각했으나 도무지 글이 써지지 않았다. 출판사와 계약한 책의 마감 기한은 이미 9개월이 지났다. 책의 목차는 진즉에 나왔고, 구성과 내용도 모두 정리돼 있는데 왜 쓰지 못하는 걸까?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나날들이 행복이라 하지만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날들이 이어지자 그녀는 자신이 싫어졌다. 슬럼프인가? 우울증인가? 둘 중 무엇인지 혹은 둘 다 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녀는 끝이 없는 동굴, 바닥의 바닥을 찍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을 내일이 이어지던 어느 날, 나혜의 초대를 받았다. 기뻤으나 두 가지가 걸렸다. 엄마의 건강검진 결과가 좋지 않았고, 동거 중인 태현이 걱정되었다. 태현에게 먼저 물었다.     

 

“부르고스에 가서 좀 지내면 어떨까?” 

“나라면 부르고스에 가겠어,”      


태현은 그녀에게 항상 그랬다.      


“너, 하고 싶은 건 다 해!”      


둘이 처음 함께 해외여행을 갔던 태국에서 시작된 말이다. 은수는 태어나 처음 간 동남아시아가 좋았다. 향신료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 음식도 입맛에 잘 맞았고 과일도 맛있는데 물가도 놀라울 만큼 쌌다. 양도 조금씩이라 이것저것 많이 시켜놓고 맛있는 것만 골라 먹었다. 날씨가 너무 더웠지만 태현이 렌터카를 빌려 에어컨을 시원하게 틀고 다닐 수 있었다. 매사 꼼꼼한 태현이 덜렁대고 정신없는 은수를 챙겨주었다. 그때 태현은 은수가 무엇을 할 때마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고 말했었다. 이후 은수에게 그 말은 태현의 주문과도 같았다. 그녀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주문이자, 그녀가 그에게 묶이게 하는 주문. 일이 끊기도, 태현의 중국 출장이 잦아지면서 은수는 거의 집에만 있었다. 미팅이 줄어들고 친구도 거의 만나지 않는데, 그도 그녀의 곁에 없었다. 그녀는 외로웠다.      


혼자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고, 음식점에서 가서 혼밥도 잘하던 은수였다. 그런데 태현과 함께 한 이후, 혼자 무엇을 하지 않았다. 하지 않다 보니 하지 못하게 된 것도 같았다.      


은수는 별자리 강연 중에 자신이 했던 말을 일상에서 복기할 때가 많다.     

 

“전갈자리 남자는 여자의 손발을 끊어놓는 것 같아요.”     


그녀는 전갈자리 남자와 이혼했다. 함께 미국에 가서 살았는데 어느새 자신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해 보니 결혼하기 전부터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자신의 모든 것을 지배했다고.      


“피카소가 전갈자리인데 그의 여자들은 모두 그와 사랑한 이후 죽거나 미쳤습니다. 제 남자친구도 어센던트가 전갈자리인데, 저도 조심해야겠군요.”     


전갈자리 남자는 비밀스럽고 철두철미하다. 천방지축 양자리가 늘 새로운 우물을 판다면 우직한 황소자리는 한 우물을 깊게 파고, 호기심천국 쌍둥이자리는 이 우물 저 우물을 동시다발적으로 판다. 그런데 전갈자리가 우물을 판다면? 우물의 끝을 본다. 한 번 파기 시작하면 지구의 핵을 지나 반대편까지 뚫고 나가는 것이다. 말하지 않고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해 옭아맨다. 그들은 열 수 앞을 내다보는 바둑기사처럼 속으로 모든 것을 철저하게 계산해 상대의 마음까지 지배해 버리는 것이다.      


태현도 그런 면이 많다. 일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그렇다. 은수와 밥을 먹을 때면, 꽁치의 가시를 기가 막히게 발라주고, 꽃게의 살만 발라 그녀의 숟가락에 올려 놓아준다. 여수에서 도미매운탕을 먹었던 날. 생선 대가리의 볼살, 턱살까지 부위별로 곱게 발라 은수의 앞접시나 숟가락에 올려놓아 먹이더니, 식당의 하얀 종이 위에 생선을 완벽하게 복원해 놓았다. 마치 박물관의 공룡 뼈처럼.     


어느 날 은수도 친구와 생선구이를 먹다가 문득 깨달았다.      


“나 생선 먹는 능력이 퇴화했어.”     


친구는 뭐가 문제냐는 듯 젓가락으로 생선의 가운데 토막만 집어 먹었다.      


“그냥 대충 좀 살자.”     


하지만 은수는 그 순간 생각했다.      


“나, 도망쳐야겠어!”     


친구는 말했다.      


“은수야, 때로는 도망쳐도 괜찮아.”     




부르고스에서 은수는 아침 7시에서 8시쯤 일어난다. 침대에 누워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 깔린 창밖을 내다보면 스페인의 주홍색 지붕들 너머 14세기에 지어진 고딕풍의 산 레스메스 아바드 성당(Iglesia de San Lesmes Abad)의 종탑이 보인다. 건물들 사이로 산따 마리아 대성당의 공사 중인 탑이 빼꼼히 보이고, 멀리 메세타에는 풍력발전기가 펼쳐져 있다.      


나혜네 집은 역시나 뷰가 좋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뷰였다.      


산 레스메스 아바드 성당은 고딕 양식으로 도시의 수호성인인 산 레스메스 아바드(San Lesmes Abad)가 묻혀 있다고 한다. 11세기 프랑스 태생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아델렐무스 Adelelmus의 스페인 이름이 Lesmes이다. 성당의 외관에는 출입구, 장미창, 종탑을 제외하고는 장식이 거의 없지만, 석조 강단은 부르고스에서 최고라고 한다.      


성당 옆은 주립 공공도서관이고, 까미노 데 산티아고를 걷는 순례자들은 도서관과 산 레스메스 성당 사이를 지나 산 후안 문을 통과해 산따마리아 성당, 공립알베르게까지 부르고스를 동서로 길게 가로질러 걷는다.  

    

은수는 잠시 침대에서 빈둥거리며 희부옇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이한다. 도서관은 아침 6시에 불이 켜지고 저녁 8시면 불이 꺼진다. 그녀는 24시간 불을 밝히고 있는 도서관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다가 배가 고프다.      


눈곱만 떼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집을 나선다. 왼쪽으로 돌면 까미노의 노란 조가비 표시가 보인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마자 커다란 배낭에 조가비를 달고 판초 우의를 입고 걷는 페레그리노(순례자)를 볼 때, 산 후안 문 앞에서 왼쪽으로 돌아 식당으로 향할 때 은수는 생각한다. “나도 곧 다시 걸어야겠다.”     


오늘 그녀는 광장으로 들어선다. 문 안쪽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맛있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집이고 왼쪽으로는 군밤 파는 집이다.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다 마음 내키는 대로 오른쪽 왼쪽 골목을 누빈다. 그러다 오늘의 바르에 가서 밝게 인사한다.      


"올라~ "


"올라, 부에노스 디아스!"

 

"우노 까페 꼰 레쩨, 우노 또르띠야, 포르파!"


커피와 또르띠야를 들고 테라사terraza에 앉아 담배 한 대를 물며 은수는 생각한다.     

 

‘부르고스에 오길 참 잘했어!’     


뜨거운 또르띠야 안에 하몬과 께소(치즈)가 녹아내린다. 커피는 진하고 우유는 고소하다. 바람이 차가워 가방에서 머플러를 꺼내며 또 생각한다. 나혜가 말한 것보다 많이 춥지만 한국에서 실종한 아름다운 가을을 즐길 수 있다. 때로 도망쳐도 괜찮다. 넵튠의 시간이잖아!


00. 나에게 시간을 주고 싶어서 https://brunch.co.kr/@bluetwilight/522     


01. 올라 부르고스 Hola, Burgos!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언제인가요? https://brunch.co.kr/@bluetwilight/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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