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 모멘또 Momento!
모모 : 모멘또 노, 운 모멘또 비엔! ‘Momento’ no, ‘Un momento’ bien!
은수가 스페인어를 틀리게 말하면 모모가 바로 잡아준다. 스페인어로 momento는 순간, 짧은 시간을 말한다. 앞에 정관사를 붙여야 하는데 모멘토는 남성 단수이므로 운 un을 붙여야 영어로 wait a minute과 같이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가 된다. 그는 역시 좋은 에스파뇰 쌤이다.
은수 그라시아스, 쌤!
모모 쌤 노! 선생님, 프로페서!”
은수는 모모를 ‘미 에스파뇰 쌤(나의 스페인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스페인어로 프로페서, 영어로 티쳐가 한국어로 선생님인데 줄여서 쌤이라고 친근하게 부른다고 알려주자, 모모는 그 발음이 싫다고 그냥 프로페서 한다.
그녀는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영어로 teacher은 스페인어로 마에스트로 maestro : Persona que enseña una ciencia, arte u oficio, o tiene título para hacerlo(과학, 예술 또는 공예를 가르치거나 그러한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혹은 프로페서 profesor : Persona que ejerce o enseña una ciencia o arte(과학이나 예술을 실천하거나 가르치는 사람)이다.
진중하고 우직한 황소자리에 염소자리인 모모는 은수에게 스페인어라는 예술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프로페서다.
모기 목소리의 그녀는 3일 연달아 소풍에 왔다. 둘째 날에는 한국인 Y가 전화로 6명을 예약하고 7명이 몰려왔는데, 그 무리에 그녀도 함께 왔다. 다른 친구들이 워낙 시끄러워 은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녀는 구석에 앉아 비빔밥을 시켰는 코파 데 비노를 두 번 시켰다. 은수가 그녀에게 두 번째 비노를 따라줄 때, 역시나 작은 목소리로 “좀 쉬었더니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은수는 가만히 웃으면서 잔을 반 넘게 채워주었다. 그녀가 자신을 부르고 싶어서 비노를 두 번이나 시킨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은수는 그냥 그렇게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그다음 날, 오픈하자마자 Y가 또 소풍에 왔다. 전날 솔드아웃된 김치찌개를 먹고 버스를 타러 갈 것이라고 했다. 곧이어 그녀도 와서 Y와 합석을 하고는 신라면을 시켰다. 다행히 가게가 한가해서 은수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교사이고 55살이다. 올해 안식년을 가졌는데, 그동안 열심히 달려온 그녀는 7월이 될 때까지 밥만 해 먹고 잠만 자면서 쉬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12월이 될 것 같아 두려웠다.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검색하다 까미노를 알게 됐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온 까미노가 그녀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다리가 아프니 화가 나고 이 길을 왜 온 것인가 후회도 됐다. 하지만 소풍에 와서 은수와 이야기를 나누고는 천천히 자신이 걸을 수 있는 만큼만 걸어 보겠다고 생각했다.
은수는 그녀의 라면 국물과 Y의 밥이 조금 남은 것을 보고 아까웠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부르고스 한식당 일주일도 안 되어 파 한 뿌리가 소중하고 손님이 음식을 남기면 마음이 쓰리다.
“라면에 밥 말아먹어요. 나중에 생각날 걸요.”
은수의 말대로 그녀는 라면에 Y가 남긴 밥을 말아먹었다.
“한국인은 밥심이잖아요!”
그녀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니 은수는 왠지 엄마 생각이 났다. 방송작가는 일이 불규칙해서 혼자 밥을 먹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 엄마는 옆에 앉아서 두런두런 말을 걸었었다.
“55세면 나보다 나이가 많은데, 왜 하는 짓은 딸내미 같아요.”라고 하자
“아들이 둘이에요. 스물, 스물둘!”이라고 말한다.
“그래도 하는 짓이 어린데 뭘요. 17년 전, 까미노를 걸을 때 영어를 못하는 날 위해 쉬운 영어로 대화해 준 프랑스 파파가 있었어요. 맨날 길을 잃고 헤매는 날 걱정해 주고, 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어 먹으라고 걱정해 주던 아저씨였죠. 스위스 마마도 있었어요. 치아 교정기를 하고 있는 내게 스스로 할머니라 말했던 호스피탈레로는 알고 보니 우리 엄마와 나이가 같아서 마마라고 불렀어요. 우연히 이틀 연속 만난 멕시코에서 온 호스피탈레로는 시스터가 됐죠. 우리 큰언니랑 닮았었거든요. 그런데 두 번째 까미노를 걷기 위해 온 부르고스에서 코리안 딸내미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당신은 내 코리안 딸내미 합시다.”
은수는 그녀와 Y의 테이블에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래 봤자 한국인의 식사 시간은 채 20분이 되지 않는다.
Y의 김치찌개까지 계산을 마친 그녀는 “한 번 안아봐도 돼요.” 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처음 소풍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울먹울먹 하던 바로 그 눈빛이다.
“그럼요.”
은수는 더 밝게 웃으며 그녀를 안아주었다.
“평생 못 잊을 거예요.”
역시나 모기만 한 목소리다. 은수는 프랑스 파파가 자신에게 “커피에 설탕을 더 많이 먹어. 너에게는 설탕이 필요해!”라고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밥을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시 내가 책을 쓰면 당신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
“작가세요?”
울먹거리던 눈을 반짝 빛내며 그녀가 이름을 묻는다. 은수가 이름을 알려주니 옆에서 Y가 바로 모바일을 검색해 은수의 책과 신문 기사를 찾아 보여준다. 역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빠르다. 모기 목소리의 그녀는 메모를 하고는, 꼭 읽겠다며 다시 한번,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라고 말한다.
은수에게도 그녀는 오래 기억될 것이다. 운 모멘또 Un momento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정말로 다시 까미노를 걷고 싶게 만들었으까.
은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어서 쉼 없이 달려오다 지쳐서 잠시 도망쳐온 이곳 부르고스에서조차 그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라면서 한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놀면서도 일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서 까미노에 한국인들이 많고 완주하기 위해 기를 쓰는 한국인 페레그리노가 많다. 다리가 아프고 발에 물집이 잡히고, 새끼발가락에 고름이 차서 의사가 쉬라고 해도 “쉬면 뭐해요, 걸을래요.” 하고 걷는 한국인 순례자들. 역시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부터 가슴, 그리고 손과 발이다. 생각대로 살기 어렵다.
은수는 다시 까미노를 걷겠다고, 그때는 쉬엄쉬엄 천천히 걷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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