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고 싶어서
iEspere un momento! 에스뻬레 운 모멘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운 모멘또!!”
은수가 스페인어로 소리쳤다가 다시 한국말로 말한다.
“잠시만요”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 부르고스는 생 장 피드 포르에서 26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페레그리노는 여기까지 빠르면 열흘, 보통은 2주일이 걸려서 걸어온다. 그동안 느긋한 스페인 문화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어서 오세요” 한국말에 갑자기 이곳을 한국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한국 사람들은 테이블을 지정해주지 않았는데 성큼성큼 들어가 앉는다. 함께 일하는 까마레로 모모는 모로코사람인데, 며칠 되지 않아 “김치 하나 제육 하나”를 배웠다. 모모가 과장된 몸짓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돌아서서는 “김치 하나 제육 하나”하며 꼬레아 페레그리노 흉내를 내자 은수는 얼굴이 벌게졌다. 그녀도 며칠 만에 한국 사람의 무례함에 질려버렸다. 이제는 느긋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화난 표정으로 무례한 손님들을 밖으로 내몬다. 그러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운 모멘또, 잠시만요”. 스페인에 오면 스페인 법을 따르는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사장이나 까마레로, 손님의 위치가 대등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오지 말라는 식이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 특히, 은수를 꼭 안아준 몇몇의 손님들은 그녀에게도 특별하다. 은수는 처음 허그를 하고 서로의 등을 토닥였던 사람을 기억한다.
몸집이 유난히 작은 그녀는 거의 울먹울먹 하면서 들어왔다. 은수가 반갑게 ‘올라’ 하고 인사하니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올라” 인사한다. 은수가 다시 “안녕하세요” 한국말로 인사하니 그녀는 잠깐이지만 눈을 반짝였다. 은수가 “혼자 오셨나요” 물으니 역시나 모기 목소리로 “혼자요.” 하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리가 아파 버스를 타고 왔어요.”라고 덧붙인다.
은수는 2인용 바 테이블로 그녀를 안내한다. 한국 사람들은 바 테이블의 높은 의자를 싫어한다고 한다. 나혜는 어느 날, 바 테이블에 앉았던 한국인 여자 순례객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나를 이런 데다 앉히고, 매운 것 못 먹는다고 했는데 매운 김치찌개를 주고 말이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 여자도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게 영업시간이 거의 끝날 때 혼자 왔다고 했다. 나혜는 영업이 끝났다고 돌려보내려 했으나 그녀는 물어물어 힘들게 이곳을 찾아왔다며 부득불 음식을 먹고 가야 한다고 우겼단다. 김치찌개가 맵냐고 묻기에 적당히 맵다고 했으나 자신은 매운 음식을 못 먹지만 그래도 김치찌개가 먹고 싶다고 달라고 했단다. 그래놓고 김치찌개가 맵다고, 자신을 높은 바 테이블에 앉혔다고 엉엉 울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은수는 다리가 아플 때 오히려 바 테이블에 다리를 걸치는 게 편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혜의 가게는 4인 테이블이 4개, 2인 바 테이블이 3개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을 아무렇게나 앉히면 결국 한국 손님들 대기만 길어질 뿐이다.
모기 목소리의 그녀는 군소리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스페인 할아버지가 바에 앉으며 자꾸 은수에게 말을 걸더니 몸을 부산스럽게 움직이기까지 한다. 은수가 걱정스레 쳐다보니 모모는 자기 친구라고, 괜찮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가 자리를 바꿔 앉는다. 스페인 할아버지와 몸이 닿아 불편한 모양이다.
은수가 “천천히 고르세요.” 하니 신중하게 메뉴판을 정독한 그녀의 선택은 결국 김치찌개와 계란말이였다. 한국 음식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특히 계란말이는 다른 음식과 함께 동시에 조리하면 불에 타버리고 만다. 바쁜 시간에 계란말이를 시키면 나혜가 할 수 없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많지 않지만 은수는 나혜에게 “계란말이 가능할까?” 물어본다. 그래도 마음이 쓰여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들어왔어, 다리가 아파 버스를 타고 왔대.” 덧붙인다. 나혜는 해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다리 앞부분이 아파서 병원을 가야 하나, 파스를 붙여야 하나 고민이라고 한다.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아침부터 같이 걷기 시작했던 이들이 보이니 화가 났다고도 한다.
“나도 걸을 수 있는데, 나도 다리만 아프지 않으면 잘 걸을 텐데....”
그녀가 아픈 건 다리가 아니다. 전형적인 한국인의 빨리빨리 병이다. 남보다 잘하고 싶은...
은수는 계란말이와 김치찌개를 가져다주고 밥도 한 그릇 가득 고봉으로 퍼 주면서 “밥 더 필요하면 말해요.” 하고는 물러섰다. 얼마나 반가운 한국의 음식이겠는가. 그녀가 온전히 음식을 즐길 시간을 주고 싶다.
곧이어 다른 손님들이 들어와 주문을 받고 지나가다 은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다. “맛있죠?” 하고 물으니 그녀가 피식 웃으면서 대답한다. “한국에서는 있어도 안 먹던 게, 이 일상적인 게 왜 이렇게 좋아요?” 어이가 없다는 웃음이다.
페레그리노들은 매일 20-30킬로미터씩 걸으니 입맛이 돌고, 스페인 음식이 좀 짜기는 해도 한국인 입맛에 잘 맞는다. 굳이 한국 음식을 찾아 먹을 필요가 없다. 부르고스까지 오는 길 중간에도 스페인 사람과 결혼한 한국인이 하는 비빔밥과 샐러드바나 알베르게, 한국어가 하고 싶어 한식을 배달로 파는 할머니 등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까미노는 대개 시골의 작은 마을을 지난다.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처럼 한식 재료를 구하기 쉽지 않다. 10년 넘게 스페인에 살면서 이곳의 재료를 요령껏 한식에 맞춘 나혜의 노하우로 <두 번째 소풍>처럼 제대로 한식을 하는 곳은 거의 없다. 게다가 부르고스는 생 장 피드 포르에서 26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빨리 걸으면 열흘, 천천히 걸으면 2주 정도 걸린다. 갑자기 만난 한식이 맛이 없을 수 없다.
“저는 다음 주부터 걸을 거예요.”
좀 한가해지자 은수가 그녀에게 다시 말을 건다. 그녀가 놀란 토끼눈을 한다. 은수는 예전에 까미노를 걸을 때, 메세타를 버스 타고 건너뛰었다. 그래서 다음 주부터 메세타를 걸으려 한다. 이곳 사장님과는 까미노 친구고, 지금은 한식당에서 자원봉사 중이다,라고 간략하게 말한다.
“유럽 사람들은 열흘 걷고, 그다음에 또 열흘 걷고.... 그렇게 잘라서도 많이 걸어요.”
덧붙이니 그녀가 또 한숨을 쉰다.
“나는 왜 그런 생각을 못할까요? 왜 한 번에 다 걸으려고 할까요?”
그녀는 자신이 정말 한심하다는 듯이 자꾸 한숨을 쉰다.
“한국은 멀잖아요, 제가 엊그제 부르고스까지 오는 데 27시간이 걸렸어요.”
은수는 괜히 마음이 쓰여 부드럽게 말한다. 유럽 사람들이야 비행기로 한두 시간 혹은 기차를 타고 오면 되지만 한국에서는 파리나 바르셀로나, 마드리드까지 직항으로도 14시간이 걸리고 그곳에서 다시 5-6시간 이상 이동해야 한다. 쉽지 않은 길이다. 열흘의 휴가를 낸다고 해도 오가는 시간을 빼고 나면 일주일도 채 걷지 못한다. 오죽하면 까미노를 실연자의 길, 실직자의 길이라 부르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한 달 이상의 시간을 내서 까미노를 걷기 힘들다. 물론 은퇴 후 연금 생활자들도 많이 걷는다.
“제가 여기 와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운 모멘또, 잠시만요’ 예요. 2주 동안 느긋하게 걸어온 한국 사람들이 여기만 오면 급해져요. 말이 통하니까 느슨해져서인지 빨리빨리 한국인으로 돌아가는 거죠. 그런데 스페인에서는 ‘빨리빨리’가 절대 안 통해요. 운 모멘또, 그러면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그가 나에게 와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스페인에서는 정말 그랬다. 뭐든지 기다려야 한다. 식당이나 가게에 가서 기다리다 못해 종업원을 부르면, 그들은 ‘운 모멘또!’ 하고는 기다리게 한다. 설령 그게 지나가는 사람과 안부를 나누거나, 다른 손님과 잡담을 나누는 일이어도, 자기 볼 일을 다 보고서야 손님에게 온다.
그녀가 밥공기는 물론 김치찌개와 밑반찬까지 깨끗하게 비웠다.
“한식으로 힐링을 했어요. 영혼의 닭고기 수프 저리 가라 인데요.”
해외여행을 와서 한식을 찾는 것이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힘들고 고된 까미노에서는 한식을 찾는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들 하지만 어쨌든 두 발로 800킬로미터를 걷는 것은, 10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메고 산길과 아스팔트를 번갈아 걷는 것은 힘들다. 아무리 사서 하는 고생이라 하지만 말이다.
“한국인은 역시 밥심! 김치찌개가 최고죠”
그녀는 은수가 모모가 더듬거리는 영어와 스페인어, 한국어로 장난치는 게 재미있었나 보다.
“한국어를 잘하네요.” 한다.
은수는 “모모는 모로코 사람인데 스페인어와 영어도 잘해요. 여자친구가 한국인이라 한국어도 조금 하고요. 언어 능력자죠.” 하며 부러운 눈빛으로 모모를 본다. 모모는 은수가 손님과 한국어로 말하다 눈이 마주치니 싱긋 웃는다.
은수가 모모에게 그녀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누나, 한 번 불러줘”라고 하니, 모모가 그녀에게도 “누나”라고 부른다. 그녀가 “어머나” 하며 좋아한다. 그녀는 가게에 들어와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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