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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병호 Sep 18. 2022

하랑이에게

가까운교회 베이비샤워 편지

하랑이에게


1991년 4월 12일, 선희는 충남 논산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태어났어. 어릴 땐 좀 재밌게 생겼었어. 초등학교 때부터 벌써 키가 많이 큰 아이였고, 그래서 그런지 일진들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아이였단다.


초등학교 단짝 친구가 머리에 이가 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소외되면서, 선희도 거리를 둔 적이 있었어. 그때의 미안함을 2022년 9월 17일, 오늘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아이란다.


미술을 좋아하던 선희는  안된다는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상업 미술에 가까운 시각정보디자인과에 진학했고, 대학 선교단체 활동을 시작했어. 졸업 후엔 서울에 있는 제조 회사에 선희 삼촌 지인이 대표였는데 입사하게 됐고,   근무하다 보니 디자이너로 성장이  보여 퇴사를 하기도 했어.


서울에 빼빼로 같은, 인형 같은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이런저런 외모 가꾸기 노력도 해보고 지내다 대학 시절, 좋아했던 한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 수업이 기억났고, 그런 디자인을 하는 디자이너로 살기 위해 윤디자인이나 네이버 같은 곳에 입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어.


크리스천 진로 교육 단체에 갔다가 가고 싶던 윤디자인을 다녔다는 코치님을 만났어. 명확한 이목구비도 아닌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같은. 자존감이 굉장히 높아 보이는 분이었대.


(그게 아빠야.)


하랑아,


선희가 만난 아빠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이상한 사람이었고, 데이트할 때 돈이 없어 카톡 선물 보내기로 편의점 바나나우유를 두 개 사서 선릉역 길거리를 서성이며 데이트를 했었어.


양가 부모 허락 하에 혼인 신고를 하고 결혼식은 미루고 원룸에서 지내기 시작하려는데 가까운교회라는 생활 선교사로 살겠다고 모인 분들이 성대하게 언약식을 해주었고, 5평 원룸에서 함께 시작했어.


필요가 많아 보이는 강병호와 백선희를 이웃들은 일방적으로 사랑해주셔서 우리 하랑이가 태어난다고 꼭 필요한 물품들은 다 선물을 받았고, 이젠 있으면 좀 더 좋을 물품들을 받고 있단다. 오늘은 가까운 교회에서 선희와 너를 위해 기도해준다고 이렇게 모여있다.


하랑아,


너처럼 사랑받고 태어난 선희였지만 어려움을 경험하며 피난처로 간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목구비가 명확하진 않지만 자존감이 높아 보이는 이상한 남자를 만나 선릉역 주변을 걸으며 바나나 우유 하나를 같이 먹어도 행복해하는, 싸워도 붙어 자야 하는 5평 원룸에서도 행복해하는, 화려한 웨딩드레스가 아닌 가까운교회 예배당에서 수수한 꽃 화관을 머리에 쓰고도 감격해 우는. 선희를 닮은 아이였으면 좋겠다.


혼자 내버려 두면 어느새 노란색 퐁퐁, 초록 식물과도 도란도란 대화하고 있는 안개꽃 같은 선희가 너를 품고 있다. 뼈 마디마디가 벌어지고, 붓고, 무거워지며 너를 잘 낳기 위해 일분일초도 빗나가지 않는 철저한 계획 속에 하루하루 만남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하랑아,


내가 치약 살 돈 없을 때도, 바나나 우유 하나도 살 돈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준 선희가 낳는 소중한 하랑아.


너의 삶도 선희처럼 여러 고민과 굴곡이 생기겠지. 너의 삶에도 선희에게 처럼 결핍, 실패, 고난 같은 것들이 생기겠지. 그때마다 너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함께 만나고, 함께 감사하고, 함께 찬양하며 살아가자.


10주 차 20주 차 30주 차 매주 매주 착착 해내야 할 성장 과정을 곧잘 해내고, 애초 예정된 날보다 벌써 한 주 앞당겨 씩씩하게 나오려는 3kg의 널 보니 내가 보기엔 나보단 선희를 닮은 것 같다. (나였으면 좀 느렸을 거야.)


내 생각엔 얼굴도 선희 닮았으면 좋겠는데… 보통 딸은 아빠를 닮는다던데… 뭐, 나도 살아보니 크게 얼굴 때문에 피해를 본 건 없었어. 나 닮게 태어나도 용기를 갖길 바라. 선희랑 나는 그럼에도 널 사랑할 테니까.


그리고 선희야,


일상이 기적이 되는 삶을 살게 해 줘서 고마워. 너와의 이 결핍과 실패와 고난의 일상이 너무 행복해. 2017년 5월 7일 처음 데이트했을 때보다 지금이 외모도 마음도 더 예뻐. 너뿐만 아니라 내 모습도 더 그렇게 된 것 같아. 널 만나고 더 좋아졌다고. 사람이 안정되어 보인다는 소리 많이 듣는다.


하랑이랑 이렇게 앞으로 우당탕탕 하루하루 살아갈 것이 정말 기대돼. 사랑해 선희야.

가까운교회 13번 째 베이비샤워, 2022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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